제11강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의 형성과 그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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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 신흥사대부층의 등장 === 고려 전기는 문벌 귀족이 주도한 사회였음. 이후 무신란이 일어나 문벌 귀족을 대체할 한문 출신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지배층의 변화가 일어남. 이들이 ‘신진사류’. 그러나 신진사류가 사대부층을 형성해 지배층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거나 기존의 지배층을 교체하지는 않았음. 구 문벌 귀족 출신 중 무신 집권기에도 살아남았던 이들과 무신란 이후 흥기한 무인 가문, 과거를 통해 진출한 지방 출신의 관인 중 흥기한 집안 -> 대몽항쟁 이후 충렬왕 대에 이르면 이들 집안 출신들이 하나의 정치 세력을 자리잡게 됨. / 한편 원 복속기에 원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급속도로 성장한 ‘부원배’가 있었음. 이들은 대개 왕의 측근으로 권력을 좌지우지하였음. =>13세기 후반 이래 권력을 갖게 된 이러한 정치세력을 총칭해 ‘권문세족’이라고 칭함. (권문=권세가 있는 집안, 세족=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 권문세족이 행세하던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초 사이의 정치지형에는 유의미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함. 안향과 백이정이 그 선두에 있음. 안향 1290년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주자의 책을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서 갖고 옴. 1303년 대성전이 완성되자 이 곳에 공자와 선성들의 화상을 모시게 했으며, 만년에 주자를 숭상하여 주자의 호인 회암을 본떠 회헌이라 자호함. l 대성전: 문묘의 시설 가운데 공자의 위판을 봉안한 유교건축물. 백이정 안향의 문인, 14세기 초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성리학 서적과 <주자가례>를 들고 옴. 백이정에 의해 주자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사서집주>가 고려에서 처음 간행되게 됨. -> <사서집주>의 간행은 주자학의 수용과정에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할 수 있음. 백이정 때에 들어서서 주자학은 본격적인 연구가 되기 시작했으며, 백이정의 문학에서 권부, 이곡, 백문보 같은 주자학도가 배출되기 시작함. 14세기 중후반이 되면 성리학 이념을 가지고 있는 문인 지식인들이 역사, 문학사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됨. (권부, 이곡, 백문보, 최해, 이제현, 이색, 이수미, 정몽주, 정도전, 김구용, 이숭인, 박상충, 권근, 길재 등) -> 14세기에 신유학(성리학 이념)을 수용한 이들은 사대부에 속하고, 따라서 ‘신흥사대부‘라고 불림. {| class="wikitable" |신흥사대부 |신진사류 |- |성리학 이념을 내면화함. - 불교를 배척 - 권문사족에 대항 | |- |이념적, 정치적 결속력이 있었음. (집단적 자기의식을 가짐) =>사대부‘층’이라는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음. |이념적, 정치적 결속력이 없었음. =>같은 계층 의식을 가지지 못해 사대부‘층’으로 이해할 수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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