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강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문학적 대응들
편집하기 (부분)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세조의 왕위 찬탈 === 1453년(계유년, 단종 원년) 10월,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 원로대신 수십명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음. 계유정난이라는 명칭: 정난(靖難)은 변란을 평정했다는 뜻, 수양대군은 얀평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과 모의해 왕위를 찬탈하려 했고, 이를 평정했다고 주장, 즉, 계유정난은 수양대군 측의 용어인 것. 이 사건으로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등이 공식으로 책봉되었고, 2년 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됨. 명목적으로는 왕위를 선양(禪讓) 받고,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추대하는 형식을 취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단종을 내쫓은 것. 다음해인 1456년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하고(병자사화), 이 일로 단종은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 죽임을 당함. 수양대군은 권력욕으로 살육을 일삼고, 친동생들과 어린 조카를 죽임. 유교, 특히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을 국시로 삼는 국가였던 조선에서 ‘세조의 왕위찬탈’은 조선 전기 내내 양심적인 지식인, 문인들을 짓누르는 트라우마가 되었음. -> 왕조의 도덕적 정당성이 상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양대군 측에 붙은 신하들은 공신이 되어 부귀를 누렸으나. 왕위찬탈의 부당함에 맞서거나 그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은 목숨을 잃거나 세상을 배회하다가 생을 마감함. (ex) 사육신, 생육신) -> 그리하여 세조의 왕위찬탈은 유자들에게 ‘절의’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들었으며, ‘천도(天道)’에 대한 회의를 낳게 되었음. 유학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근간은 ‘천도’에 의해서 떠받쳐짐. 유학에서 인간의 삶과 세계의 질서는 선인과 악인에게 각각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진다는 ‘천도’에 의해 지지됨.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 이어지는 현실은 천도에 대한 믿음에 심각한 균열을 낳고 회의를 야기한 것으로 보임. 이는 유교의 정치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해당함. 그리고 유교는 이때 비로소 ‘대자적’으로 인식되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일부 지식인에 의해 유교적 정치철학에 대한 재숙고, 재성찰이 이루어지게 됨. * 즉자적(卽自的) <-> 대자적(對自的): 자기 자신에 매몰되어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것을 즉자적이라 하고, 이것은 동물적 태도이다. 대자적 태도는 이와 반대로 주관인 자기 자신까지도 객관화하여 반성하고 관찰하는 태도임. -> 세조의 왕위찬탈을 겪으며 유교적 통념의 해체 작업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국가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하는 정치사상적인 근본 물음까지 제기되게 됨. -> 이때부터 ‘민(民)’에 대한 인식의 심화가 이루어짐. 이처럼 15세기 중반에 일어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은 정치사뿐만 아니라 사상사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화두가 됨. 그리고 이는 16세기~17세기 초반까지도 문제가 된다.
요약:
DHinDS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DHinDS: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
토론
기여
계정 만들기
로그인
이름공간
문서
토론
한국어
보기
읽기
편집
원본 편집
역사 보기
더 보기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