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강 탈중화주의와 새로운 세계관의 정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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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주의와 화의론 === 중화주의: 한족이 다스리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고, 중국 문물이 가장 우수하다는 세계관. (자민족 중심주의) 중화주의는 중화와 이적(중국 바깥의 종족과 민족)을 엄별하기 때문에 ‘화이론(華夷論)’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 중화주의와 화이론에서는 이적의 문화에 대한 존중이 없고, 이적을 사람과 짐승의 중간 정도로 여겨 인륜과 예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봄. 따라서 이적은 중국에 복속되어야 하고, 중국 문물을 배움으로써만 야만, 미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고 여김. 유교의 경전들(ex) 논어)에는 중화주의와 화이론이 스며들어 있고, 따라서 우리나라의 식자들은 경전을 통해 중화주의와 화이론을 내면화하게 됨. -> 이는 자국 문화를 무시하고 중국의 문화를 추수하는 풍조를 낳음. (토풍/화풍) 중화주의는 통일신라 말경 현저해져 고려 시대에 강화됨. 그리고 조선시대때는 후대로 갈수록 강해짐. 17세기 이후에는 막강해져 교조적인 이념이 되기에 이름. (지배층에 한함.) -> 17세기 이후 이러한 경향이 생긴 것은 ‘명청교체’와 유관. 조선의 지배층(특히 서인, 노론 세력)은 중원에 청이 들어서자 중화주의와 화이론을 통치 이념으로 삼음. 이는 한족의 나라인 명에 대한 존승과 청에 대한 멸시를 표방한 것. 이를 통해 통치의 명분을 확보하고자 한 것임. 신라 말 이후 조선 후기까지 중화주의는 지속적으로 위세를 떨침. 대부분의 문인과 지식인들은 우리나라가 ‘소중화(小中華)’에 해당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중화주의나 화이론이 잘못된 세계관임을 이론적으로 논파한 사람은 없었음. (중화주의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국 문화에 대한 존중을 표한 사람들은 간혹 있었음.) 이러한 상황에 18세기 후반 홍대용의 <의산문답>에서 중화주의와 화이론에 대한 문제를 재검토하는 작업이 이루어짐. <의산문답>의 흥미로운 점은 사상사적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 텍스트의 자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동아시아 문학의 전통에서 바라본다면 ‘철리산문’으로 간주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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