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강 추방된 자의 글쓰기-정약용과 이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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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배문학 === 유배: 죄인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격리하는 것. 감옥에 갇히는 것은 아니지만 거주의 공간이 제한되며, 유배지 밖을 벗어날 수 없음.(편지를 주고받거나 가족이 유배지에 왕래하는 것은 가능.) 죄의 경중에 따라 2천 리, 2천5백 리, 3천 리로 나뉨. 유배객은 대개 정치범임. 즉, 동아시아에서 유배는 최고 권력자가 신하나 반대자를 처벌하는 통치 행위이거나 정파간의 싸움에서 기인하는 숙청이기도 했음. -> 조선 후기에는 당쟁의 심화로 유배객이 더욱 많아짐. 유배객 중에는 문신이 많았음. 이들의 ‘유배’ 생활이라는 존재요건이 반영된 글은 평상시의 글과 다를 수 밖에 없었고, 여기서 ‘유배문학’이라는 하나의 범주가 성립함. 우리 문학사에서 처음 확인되는 유배문학은 고려시대 정서의 <정과정곡>. 고려 말 정도전의 <답전부>나 조선시대 조위의 <만분가>, 김정의 <제주풍토록>등도 유배문학의 범주에 포함됨. 정약용과 이학규는 1801년 신유옥사 때 천주교인이라는 혐의를 받아 고문을 받은 뒤 오랜 세월 유배살이를 하였음. 조선시대 유배를 간 문인은 많지만, 이 둘은 단순한 정쟁이 아니라 이단 사설로 간주된 천주교 교인으로 몰려 유배를 갔다는 점에서 특별함. 정약용은 이 때문에 본인을 ‘폐족’으로 인식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배지에서 필사적으로 학문에 몰두한 것으로 보임. 또한 정약용은 17년, 이학규는 23년 간 귀양살이를 했는데, 유배 기간이 몹시 길다는 점과 그 기간 내내 글쓰기로 자신을 지탱하며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뤘다는 점, 귀양 살이 이후에 이렇다한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됨. (노수신도 19년의 귀양살이를 했으나 나중에 영의정에 오름. 이광사는 22년동안 귀양살이를 하였으나 이렇다 할 문학적 성취는 없음.) 정약용은 40살에 귀양을 가서 57살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학규는 32살에 떠나 55살에 고향에 돌아왔음. 두 사람다 문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중년을 유배지에서 보냈음. -> 권력에 의해 자신의 공간에서 추방되어 오랜 기간 귀양살이를 한 두 사람의 글쓰기를 살펴보는 것은 문학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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