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신라의 문호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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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최치원은 857년(9세기 중엽)태어남. 12살 때인 868년 당으로 유학을 떠나게 됨. 최치원의 아버지는 이때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함. (당시 신라에 당에 간지 10년 안에 과거 합격을 못하면 귀국을 해야하는 법이 있었기 때문.) 최치원은 당에 간 지 7년 만인 18살에 빈공과에 합격하였고, 2년 후 선주 율수 현의 지방관으로 부임하였음. 이후 3년 뒤 황소의 난이 일어났는데, 최치원은 고변이라는 자의 종사관이 되어 종군하였음. 서기라는 직책을 맡아 격문을 비롯해 갖가지 글을 작성함. 이때 <토황소격문>을 지음. 885년, 17년 만에 황제(당시 희종)의 조서를 가지고 사신의 자격으로 신라에 귀국함. 헌강왕은 최치원이 돌아오자 바로 시독 겸 한림학사라는 벼슬을 내림. 886년 최치원은 자신이 당에서 쓴 글들을 모아 놓은 <계원필경>을 헌강왕에게 올림. 아마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 이후 887년 헌강왕은 최치원에게 사산비명 중 하나인 <지증대사비명>을 지으라고 명령함. 당시 신라는 국운이 기울고 있었고, 최치원은 고국에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주변의 의심과 시기로 인해 뜻을 이룰 수 없었음. 이에 최치원은 경주에서 벼슬하기를 그만두고 지방관으로 나서게 됨. 태산군과 천령군, 부성군의 태수를 지냈음. ->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최치원은 백성들의 동향과 민심을 잘 읽을 수 있었음. 이무렵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음. 894년(최치원 38세)에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조를 올렸음. 진성여왕은 이에 기뻐하며 육두품으로서는 최고의 벼슬인 아찬을 내렸음. 그러나 신라의 귀족들은 부패하였고, 지방에서는 호족이 발호하여 최치원의 개혁안은 실행되기 어려웠음. 최치원은 이에 낙담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게 됨.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치원이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미상으로 남아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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