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강 야담의 성행과 『청구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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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의 야담들 ==== 19세기 경기도 광주!!에 살던 만오 정현동은 <만오만필>이라는 필기, 야담집을 저술함. 야담집의 작자는 주로 노론계 인사인데, 정현동(남인)과 이현기(소론)는 노론이 아님. <만오만필>의 상권에는 야담이 실려있고, 하권에는 사대부 일화를 중심으로 한 짤막한 고사가 실려 있는데, 제목은 붙어 있지 않음. 편폭이 제법 긴 이야기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짧음. 정현동은 이야기에 관심은 있었으나 야담 작가로서의 필치는 부족해보임. Ex) 46화 호랑이를 감동시킨 효부의 이야기가 <청구야담>의 수정절최효부감과 비슷하지만 서사의 묘미가 부족함. 계서 이희평은 1828년 필기서 <계서잡록>을 저술함. 거창 부사로 있을 당시 완성했고, 이희평은 벌열층에 속한 인물. 여러 흥미로운 야담이 실려있고, 제목은 붙어있지 않음. <동패낙송>의 이야기들이 더러 있어 <동패낙송>을 읽었던 것으로 보임. 이현기의 <기리총화>는 19세기 전반 저술되었고, 이야기에 대게 4자의 이름이 붙어 있음. Ex) 포주이문(포주의 이상한 이야기), 채생기우(채생의 기이한 만남), 심가귀괴(심씨집 귀신이야기), 천비식인(천한 여종이 사람을 알아본다) 등 이중 채생기우, 심가귀괴, 천비식인은 <청구야담>에 전재되면서 결방연이팔낭자(열여섯낭자와 꽃다운 인연을 맺다), 궤반탁견곤귀매(밥상을 차려 줬다가 귀신에게 곤욕을 치르다), 택부서혜비식인(지혜로운 여종이 사람을 알아봐 남편을 택하다)7자 제목으로 바뀌어짐. -> <청구야담>의 제목이 독자의 흥미를 훨씬 자아냄. 이현기는 야담작가로서 뛰어난 역량을 보임. -> 작품에 인물의 개성이 뚜렷하고, 정황에 대한 묘사가 정채있음. 또한 사회적 문제의식, 정치의식이 작품 속에 들어있기도 함. (ex) 포주이문: 북벌론의 허상과 인재 등용의 문제점 지적, 채생기우: 조선 후기의 신분제적 모순을 인물들 간의 갈등과 내면 심리 묘사를 통해 포착해냄. -> 조선 후기 야담 문학의 최고 성취라고 할 수 있음.) 이러한 작품들이 <청구야담>에 수록되면서 <청구야담>은 더욱 정채를 가지게 됨. 19세기에는 <청구야담>, <계서야담>, <동야휘집> ‘3대 야담집‘이 편찬됨. -> 18세기에는 없던 현상. 이를 통해 19세기가 야담이 집대성되는 단계였음을 알 수 있음. <계서야담>은 계서 이희평이 죽은 뒤 <계서잡록>에 실린 야담을 토대로 엮은 책으로 보임. 3대 야담집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야기에 제목이 있지는 않음. <동야휘집>은 1869년 이원명이 편찬한 야담집. ‘동국의 야담을 모아 놓은 책‘이라는 뜻. <어우야담>이나 <기문총화>와 같은 전대 야담집에 실린 야담을 윤색해서 싣기도 하고, 편찬자가 들은 민간의 이야기도 기록해 놓았음. 다만 <동야휘집>은 편찬자가 수식을 지나치게 많이 가하여 이야기의 생동감이 사라지고 사대부적 미의식이 강화되어 야담 특유의 정취가 잘 느껴지지 않음. * <기문총화>: 19세기 중반 이후 <계서잡록>을 토대로 엮어진 편자 미상의 야담집 <금계필담>은 1872년 고종 10년에 서유영이 저술함. 서유영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금계에서 살 때 저술됨. 철종 14년(1863) <육미당기>라는 한문장편소설을 창작하기도 함. ‘좌해일사(우리나라 야사)‘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부제에서 보이듯 야담보다는 야사에 가까운 작품들이 많이 실림. 간간히 야담도 발견되지만 그 필치가 뛰어나지는 않고, 심각한 주제의식을 지닌 작품도 없음. 19세기 말 차산 배전이 <차산필담>이라는 야담집을 저술했음. 배전은 중인층이기 때문에 중인층의 야담집이라는 점에서 주목됨. 16편의 야담이 실려 있고, 작품마다 제목이 있음. 대원군 집정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도 있어 시대의 변화를 느낄 수 있지만, <청구야담>만큼의 생기발랄한 면모는 찾을 수 없음. 이러한 점에서 <차산필담>, <동야휘집>은 야담 쇠락기의 산물로 여겨짐. 야담은 시정인층과 문인층의 합작품으로써의 성격을 지님. 시정인이나 여성의 경우 국문으로 된 야담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임. (전근대 시기 <천예록>, <동패낙송>, <청구야담>이 국문으로 번역된 것은 이러한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보임.) 그러나 번역이 아닌 국문으로 창작된 야담은 나타나지 않았음. 19세기 후반 야담의 정체는 이러한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 (과거의 전통(한문창작)을 따를 뿐 새로운 돌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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