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신라의 문호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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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두품 문인의 행방 === 역사적 전환기인 나말여초 시기 육두품 문인의 역사적 행방 1. 최승우 <nowiki>:</nowiki> 최치원과 마찬가지로 당에 유학해 빈공과에 급제한 후 893년 신라에 돌아왔음. 귀국 후 견훤을 위해 일하였음. 왕건에게 보내는 격문을 짓기도 함. 2. 최언위 <nowiki>:</nowiki> 최치원의 사촌 동생. 18살에 당에 유학해 빈공과에 급제했으며 909년 귀국함. 귀국 후 신라에서 집사성 시랑 서서원 학사라는 벼슬을 제수받음. 이후 고려 왕건에 귀의해 태자태부가 됨. 그리고 한림원 대학사 평장사의 지위까지 오름. 왕건을 위해 견훤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신 쓰기도 함. 원래 최인연이라는 이름을 썼었는데, 고려에 귀의한 후 이름을 최언위로 바꿈. 고려 초기 고승의 비문은 최언위가 거의 다 썼음. 고려의 제도적 초석을 놓는대 큰 기여를 한 인물. ㅡ> 이 두 사람은 최치원과 달리 은거를 택하지 않고 신흥 세력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주목됨. 현실에 참여하여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실현하였음. 최승로라는 문인의 행방도 주목되는데, 최승로는 최은함의 아들임. 고려때는 골품제가 없어져 최승로를 육두품 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은함이 육두품이므로 육두품 문인의 행방을 아는 것에 도움이 됨. 최승로는 고려 제6대 임금인 성종에게 시무 10조를 올렸는데, 성종이 이 시무책을 많이 채택함으로써 고려의 유교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됨. 신라는 무열왕 이래 중국화가 점차 진행되었음. 최치원은 이런 추세를 긍정하고 거기에 힘을 보탰었음. 그러다가 고려 때 와서 최승로에 의해 중국화가 다른 단계로 진입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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