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신라의 문호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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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공과 출신 육두품 문인의 공과 === 최치원을 위시로 한 빈공과 출신 육두품 문인들에게는 공/과가 동시에 존재함. 1. 공 <nowiki>:</nowiki> 한시 문학의 수준을 크게 향상 시킴. -> 이를 통해 신라의 문학은 동아시아 보편의 높이까지 도달할 수 있었고, 신라 문학의 심미적, 정신적 수준의 향상을 낳았음. 2. 과 <nowiki>:</nowiki> 신라의 문학을 한화시킴 -> 한문학은 중국을 전범으로 삼기 때문에, 이를 따라가며 동아시아 보편의 높이(중국문학)에 도달시킨 것은 결과적으로 자국 문학의 고유성을 억제하거나 약화시키면서 중국을 따라가려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음. ㅡ> 빈공과 출신 육두품 문인들은 ‘자기‘에 대한 고려 없이, ’타자‘에 대한 학습과 수용에만 치중하였음. 안과 밖을 동등하게 고려했다면 한시 뿐만 아니라 향가 역시 함께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 최치원을 비롯한 나말여초 육두품 문인들은 한국문학의 지적, 심미적 수준을 향상시켰음. 하지만 이들이 만들어낸 문화는 지배층의 문화. -> 이들은 한시 문학을 지배층의 문화로 만들어놓으며 이전보다 지배층 <-> 백성 간의 문화적 거리를 벌려 놓았음. 하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기층문화를 지켜 나갔음. 상층문화와 기층문화의 간격이 이전보다 나말여초의 전환기에 좀 더 커졌고, 육두품 문인들이 이를 주도 하였음. 이 때문에 상층은 외부(중국)에서 받아들인 문화를 향유하고, 하층은 상층의 문화와는 다른, 고유한 것(기층문화)를 담지하게 됨. -> 이러한 괴리는 고려 시대로 이어져 문화적 틀로 고착되어 감. 이러한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문학사에 새로운 과제로 남았고, 나말여초의 한문학은 이러한 난제를 한국문학사에 남기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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