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경제사적 배경: 독자층 형성의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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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후반의 사회 경제 상황''' === 17세기에 유통된 국내외 장편소설의 주된 독자는 서울에 거주하는 상층 사대부와 사대부가의 여성이었음. 김만중의 언급에 따르면 <삼국지연의>는 사대부 청년층 사이에서 역사서 대용으로 읽혔음. 17세기 소설 향유에 관한 기록이 부족하지만 상층 사대부의 문집 속에 들어가 전해진 것은 대부분 상층 사대부들의 모친이 소설의 애독자였기 때문임; 김만중, 조성기, 조태억, 권섭의 모친. 장편소설의 독자층이 모든 연령층의 사대부와 중년층 이상의 사대부가 여성으로 넓어졌으나 이는 서울 중심의 현상이었음. 최남선이 <매일신보>에 남긴 기록에 의하면 세책가가 본래 서울에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장편소설이 극성기에 도달했던 18세기 후반 이후에도 상업적인 세책가가 서울에만 존재했다면, 17세기 후반에 서울 외의 지역에서 장편소설이 읽히기는 어려움. 따라서 장편소설 향유의 사회적 토대에 대한 접근은 서울의 상층 사대부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마땅함. 서울의 인구 변화를 보면,17세기 중반까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여파로 인구가 줄고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임을 알 수 있음. 그러나 1669년 약 10년 사이에 인구가 2배 이상 증가함. 인구 증가의 원인으로는 서울 인근 지역이 서울로 편입된 점과 전란 후의 복구 사업이 마무리되며 출생 증가 혹은 대규모 인구 유입이 있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음. <구운몽>은 초기 장편소설 중 창작 연대가 뚜렷한 작품으로, 1687년에서 1688년 사이에 창작되었음. 명말청초에 유행한 통속염정소설과 재자가인소설을 의식하고 지어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서울에서 소설이 1669년부터 1688년 사이에 대중적 독서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음; 인선왕후 장씨와 숙명공주가 <수호전>을 돌려읽은 시기, 조성기가 모친을 위해 소설을 창작한 시기, 조태억의 모친 남원 윤씨가 <서주연의>를 필사한 시기가 겹침. 앞서 1669년 비약적인 인구 성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당대의 궁핍한 민생에 관한 기록이 많음. 기근과 역병으로 전국 인구의 1/5 가량이 목숨을 잃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상황이 처참했음을 알 수 있음. 그러나 당대의 실록에서 궁가와 벌열가를 중심으로 한 상층의 사치 풍조에 관한 기록 역시 많음. 서울로 논의의 범위를 한정지어보면 상층이 누렸던 부의 규모가 작지 않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부분임. 즉, 17세기 후반 조선의 전반적인 경제 상황은 대다수의 하층민은 전란 이후 정체 혹은 심화되는 반면 소수 상층의 부는 늘어나는, 대비된 모습을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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