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강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의 형성과 그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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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현 === 1287년에 출생하여 1376년 사망함.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 문인 중 가장 먼저 거론해야 하는 인물임. 안향과 함께 성리학을 처음 고려에 도입한 백이정의 문생이었던 권부의 사위임. 이제현은 고려에서 벼슬하다가 원나라로 가서 충선왕의 만권당에서 조맹부, 우집, 요수등 당시 중국의 명사들과 사귀었으며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음. l 만권당: 고려의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燕京)에 세운 독서당(讀書堂). 충선왕은 정치개혁에 뜻을 두어, 이를 실천하려다 실패하자 본래부터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성품에 따라, 왕위를 아들에게 선양(禪讓)하고, 1314년(고려 충숙왕 1) 만권당을 마련하였다. 그는 상왕(上王)으로서 입장이 자유롭고 재정이 넉넉했으므로, 만권당에 고금의 진서(珍書)를 많이 수집한 후, 고려에서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등을 부르고,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인 조맹부(趙孟頫) ·염복(閻復) ·우집(虞集) ·요봉(姚烽) 등과 교유하면서 중국의 고전 및 당시 북중국에서 유행한 성리학(性理學)도 연구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백이정(白頤正)은 충선왕을 섬기면서 만권당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여 그보다 늦게 만권당에 출입하게 된 이제현 ·박충좌 등에게 이 학문을 전수(傳授)하였다. 이것은 다시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등 여말(麗末)의 삼은(三隱)에게 전수되었다. 만권당에 모여든 학자들은 학술뿐만 아니라 예술 ·골동(骨董) 등에 걸쳐 광범위한 활동을 함으로써 고려와 원나라와의 문화교류의 중심적인 구실을 하였다. 당시 원나라의 주류 사상은 성리학이었고, 이제현은 원나라에 머물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해 갔을 것으로 보임. 이제현은 충목왕이 왕위를 계승하자 도당에 이런 글을 올림. l 도당: 고려 후기의 최고 정무기관. “지금 우리 국왕 전하께서는 (…) 다시 현명한 유학자 두 명을 택하여 전숙몽과 함께 <효경>과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강의하게 하여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의 도를 익히시고, 양반 가문의 자제들 가운데 정직하고 신중하며 중후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예를 아끼는 사람 열 명을 뽑아 시학으로 삼아 측근에서 보좌하고 이끌게 하십시오.“ - <고려사> 열전 <이제현전> ->이제현은 국왕이 사서를 공부해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의 도를 익혀야 함을 강조하고 있음. 이 둘은 성리학의 핵심 명제. 성리학 이전의 유학과 달리 성리학은 ‘사서’를 중시함. 성리학이 국가의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 문학사에서 이제현은 다음 세 가지가 특히 주목됨. 1. 백이정과 권부의 성리학을 계승, 제자인 이색에게 전승했다는 점. <nowiki>:</nowiki> 이제현의 제자였던 이색의 문하에는 정도전, 하륜, 권급, 이숭인 등이 배출됨. 길재도 이색의 문하에 출입하였었음. 이색 본인은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사망하였지만, 이색의 문하는 급진파 / 온건파로 나뉘게됨. 급진파였던 정도전은 조선 왕조 창업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였고, 하륜과 권근도 창업된 조선에서 큰 역할을 하였음. 그러나 이숭인은 혁명 세력에 의해 살해됨. 길재는 향리인 경상도 선산에서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고, 김숙자 등의 제자를 길렀음. 김숙자의 아들 김종직은 성종조 사림파 영수로서 김굉필, 정여창 같은 문생을 배출하게 됨. 정여창은 조광조를 제자로 둠. è 이처럼 이제현은 ‘사승관계’로 볼 때 고려 말의 온건파/급진파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의 사림파와도 연결됨. 2. <역옹패설>을 저술함. <nowiki>:</nowiki> 이제현 56세 때인 1342년 장마기간 중에 집필한 책임. -> 당시 이제현은 정치적인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난 상태였음. <역옹패설>은 필기에 속하는 작품임. 이인로의 <파한집>이 필기의 효시를 담당하고 있는데, <역옹패설>은 시화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파한집>보다 기술한 영역이 좀 더 넓어 필기의 본격적인 면보를 좀 더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음. 조선시대에 이르면 필기류에 해당하는 책이 많이 집필되는데, 문학사적으로 볼 때 <역옹패설>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음. l 필기: 사대부 특유의 글쓰기, 작자 주변의 신변잡기나 독서와 관련된 내용, 경전에 관한 내용, 사대부들의 일화, 미간에 전하는 이야기, 시문에 관련된 내용, 풍속이나 제도, 역사에 대한 내용 … 을 자유로운 필치로 기록한 것. 3. 소악부를 처음 창작하였음. <nowiki>:</nowiki> 악부는 원래 중국 한나라 때의 관서 이름으로, 지방의 노래를 채집해 음악을 제작하는 일을 맡았음. -> 이는 ‘관시찰속’을 통해 정치의 득실을 알고자 해서. 그러다 후대에 와서 악부가 민가풍의 한시를 지칭하는 용어로 바뀌었음. 그래서 ‘악부시 ‘라고 부르기도 함. 악부시는 백성의 노래를 옮긴 한시나 미간의 풍속이나 백성의 질고를 읊은 한시를 가리킴. 동아시아에 보편적으로 통용된 문학 장르였으며, 몇 가지 하위 장르가 있는데, 소악부는 악부시의 하위 장르 가운데 하나임. 칠언절구의 형식을 취함. 소악부는 짧은 형식의 악부라는 뜻임. 이제현은 민간가요를 한시화한 중국 악부시의 전통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소악부 11수를 지었음. <사리화> - 민요를 7언 4행의 한시에 담음. 백성의 힘든 삶을 읊은 시. <제주도 민요를 옮긴 시> - 시에 달린 주를 통해 이제현이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게 함. 이제현 뿐만 아니라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들에게서는 종종 애민의식이 표출됨. 이는 상층의 권문세족에 대한 비판 의식과 연결되어 있음.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정을 읊은 작품> - <고려사> 악지에 따르면 노래 제목은 <거사련>이고 역에 동원되어 멀리 떠난 사람의 아내가 까치와 거미에 가탁하여 남편이 어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한 작품. 민요로 보여짐. <연애감정을 읊은 시> - <고려사> 악지에 따르면 노래의 제목은 <제위보>이고, 어떤 부인이 죄를 짓고 제위보(빈민의 구호와 질병 치료를 맡은 기관)에서 일을 하는데 그곳 남자에게 손을 잡혀 이를 설욕할 길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겨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하였음. 그러나 이제현이 지은 소악부는 손을 잡은 남자를 잊지 못한 여인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내용 상 차이가 있음. ->이는 <고려사>가 조선 초에 편찬된 것으로, 편찬자가 유교적 이념에 따라 원래의 노래를 왜곡하여 여성의 절의를 강조한 것으로 보임. 이제현의 소악부에서는 여성이 연애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자유분방한 면모가 나타남. <제위보>는 시정의 노래가 여성에 의해 지어지는 한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됨. <승려의 음행을 읊은 시> - 시에 달아 놓은 주를 통해 이제현이 미간의 노래에서 백성의 풍속을 살피고 민심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임. 이 외에도 <처용가>와 <정석가>를 소악부로 옮김. ->이제현의 소악부는 고려속요에 대한 이해를 확충할 수 있게 해줌. 이제현이 당시 민간에 불렸던 노래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 시기 신흥사대부의 토풍에 대한 관심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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