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강 건국신화와 광개토왕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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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신화> === 단군신화는 <삼국유사> 기이편의 고조선 조에 실려있는 내용. 다만 <삼국유사>가 단군 신화의 최초의 문헌적 정착은 아님. 이 전의 문헌적 정착이 있었으나 이는 현존하지 않음.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에는 4명의 주요한 인물이 등장함. (천제 환인, 환인의 아들 환웅, 환웅의 아들 단군, 웅녀) 인물면에서는 아주 단순한 신화이며, 문학적으로 보았을 때도 인물의 개성과 서사가 부족하다 할 수 있음. 다만 한국의 다른 신화에 비해서 스케일이 몹시 크다는 점이 주목됨. (ex) 환웅이 하늘에서 자기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옴.) ==== [신시(神市)] ==== 단군 신화에서 환웅이 내려온 곳을 신시라고 불렀다고 되어 있음. 신시는 태백산정, 꼭대기에 마련되었음. ‘신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함. 신시를 삼한(三韓)의 ‘소도(蘇塗)’와 성격이 같은 신읍으로 보는 견해 신시의 ‘시’를 새로 건설된 나라의 도읍지 혹은 도시로 보아 신의 도시라고 보는 견해 (그러나 근대 이전의 ‘시’라는 글자는 저자를 의미했으므로 도시로 해석되기는 어려움.) 신시의 ‘시’가 市가 아닌 불(巿)이라는 주장. 불은 ‘숲이 우거지다’라는 뜻이 있으므로 신불을 신단수와 관련지어 신의 숲이라고 해석함. 위의 견해에서 나아가 신불은 신벌이다. ‘벌판’의 ‘벌’ (그러나 신시가 태백산 꼭대기에 있다고 했으므로 벌판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음,) 중요한 것은 신시를 ‘신화적 공간’으로 보는 것. 실제 공간이 아니라 신화적으로 상상된 공간이라는 것. 그리고 신화적으로 상상된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시(市)’라고 표현되었으니 도시가 아닌 ‘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당함. 시 앞에 신(神)을 붙인 것은 신화적 공간이기에 ‘신령스럽다’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 ==== [환웅과 홍익인간] ==== ‘단군’이라는 칭호는 신단수에 유래함. 신단수는 ‘신령스런 박달나무’를 뜻하는데, 샤머니즘에서 말하는 세계수와 통함. 따라서 ‘단군’이라는 칭호는 사제(司祭)로서의 권능을 가리킴. 왕검은 군장(君長)으로서의 권능을 가리키는 말. 따라서 ‘단군왕검’은 사제이면서 동시에 군장인 존재를 가리킨다. 단군신화는 단군에 관한 서사가 거의 없고, 환웅에 대한 서사가 비중이 높은 편. 환인이 인간 세상에 관심이 많았던 환웅을 ‘태백산(삼위태백)’에 인간 세상을 크게 돕게(홍익인간)할 수 있을 것 같아 천부인 세 개를 들려 내려 보내면서 시작됨. ‘천부인’에 관해서도 논란이 있음. 환웅은 환인에게 천부인 세 개를 받아 ‘풍백(바람의 신), 우사(비의 신), 운사(구름의 신)’를 거느리고 지상으로 내려왔는데, 이 셋은 모두 ‘농사’와 관련된 신임. 천부인 셋은 이 세 신을 거느리는 것을 의미하는 인수(印綬)라고 보는 견해가 있음. 또, 천부인이 과거 굿을 할 때 무당들이 중시한 방울, 칼, 거울 셋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음. 단군 이야기가 ‘굿’과 관련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천부인(天符印)의 ‘부인’은 부절(符節)이나 인신(印信)과 같은 증빙으로 삼는 물건을 의미하기 때문에 <삼국유사> 속 단군 신화를 하나의 내적 의미 관련을 갖는 서사 텍스트로 간주한다면 천부인 셋과 풍사.우사.운사 셋이 서로 호응하는 첫번째 해석이 좀 더 맥락있다고 해석할 수 있음. 이와 같이 단군 신화는 단군이 아닌 환웅 쪽에 더 비중이 있고, 그쪽에 서사가 치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음. 그래서 일반적으로 단군신화가 ‘환웅’으로 대표되는 천신계 집단과 웅녀로 대표되는 지신계 집단의 결합을 보여주는 신화로 해석되고 있음. ==== <단군 전승과 고려시대 문헌> ==== 단군 전승을 수록한 고려 시대의 중요한 문헌은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있다. 두 문헌에는 내용 차이가 있으나(삼국유사의 서사가 조금 더 자세함), 단군이라는 인물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함. ‘단군’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고, 짤막한 언급에 그치고 있기는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 21년조에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거주지다.”라는 대목이 나옴. 이를 통해 김부식의 시대에도 ‘단군’ 전승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음. <삼국사기>: 12세기 중반 (1145) 편찬 <삼국유사>: 13세기 중반 (1281) 편찬 <제왕운기>: 13세기 중반 (1287) 편찬 일연은 단군이 고조선의 시조이며 자국 역사가 고조선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음. 일연은 무신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원간섭기에 활동한 인물임. <삼국유사>의 편찬에는 고려의 국가적 위기가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음, 따라서 일연은 단군 신화를 적극 긍정함으로써 민족적 긍지를 선양하고자 한 것으로 보임. 이승휴 역시 단군이 동국(東國)에서 최초로 나라를 세워 세상을 연 군왕이라고 언급함. 이승휴는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층에 속하는 인물인데, 이 시기 신흥사대부층은 민족의식이 강한 편, 우리나라와 중국은 독자적인 나라라는 의식과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주적인 의식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음. 이승휴는 단군을 통해 공동체의 통합을 꾀할 수 있으며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각적으로 단군을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측. 이승휴가 일연보다 좀 더 명시적으로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내세우고 있음. ==== [단군 기록의 고기(古記)들] ==== 고려 시대에는 고려 이전의 기록물들이 상당히 존재했다고 생각됨. 또, 고려 초에 전승을 토대로 상고사에 대한 저술이 이루어지기도 함 -> 조선시대에 와서 사라짐. <삼국유사>에는 ‘고기(古記)에 이르기를’이라는 식으로 ‘고기’가 많이 언급됨. 여기서의 ‘고기’는 특정한 책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옛 문헌이나 기록을 범칭하는 말. 그래서 <(구)삼국사>를 ‘고기’로 부르고 있기도 함. (구)<삼국사>: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앞서 고려 초에 편찬된 책으로 추정 <삼국유사>에는 ‘고려고기’, <삼국사기>에는 ‘해동고기’, ‘삼한고기’ 등의 명칭이 보이는데, 이런 문헌들 가운데 단군 전승의 기록이 있었을 수도 있음. 또한 <삼국유사> 속 <단군기>라는 언급을 통해 고려시대에 이러한 책이 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제왕운기>에는 <단군본기>라는 이름이 나옴. (두 책은 같은 책으로 추정됨.) ==== [<삼국유사>/<제왕운기>의 차이점 - 웅녀의 존재] ==== 특이한 것은 <삼국유사>와 달리 <제왕운기> 속 단군 신화에 ‘웅녀’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대신 환웅의 손녀가 약을 먹어 사람이 된 뒤 단수신과 혼인하게 됨. ‘단수신(檀樹神)’은 박달나무의 신으로 <삼국유사>에는 등장하지 않음. <제왕운기> 속 단군의 부친은 ‘단수신’이며 모친은 환웅의 손녀임. ==== [단군/해모수/부루/주몽] ==== <삼국유사>에는 단군에 대한 언급이 세 군데 나옴, ‘기이’ 편의 <고조선 조> <nowiki>:</nowiki>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 신화. ‘왕력’ 편 <고구려>조의 동명왕 부분 <nowiki>:</nowiki> “이름은 주몽이며, (…) 단군의 아들이다. ” ->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함. ‘기이’ 편의 <고구려> 조 <nowiki>:</nowiki>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주몽이 태어났다고 한 뒤, “<단군기>에서는 단군이 하백의 딸과 관계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부루라고 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사통해 주몽을 낳았다고 했으니 부루와 주몽은 배가 다른 형제이다.”라고 설명함. ‘기이’ 편의 <북부여> 조 <nowiki>:</nowiki> 천제가 오룡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와 북부여라는 나라를 세우고 자신을 ‘해모수’라고 했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부루이다.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이고 아들은 주몽이나, 북부여 건국신화에서 해모수는 천제이고 그 아들이 부루임. ) <삼국유사>의 세 군데 단군 관련 언급들 간에는 모순이 발견됨.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 일연의 착각이 아니라면, 이러한 모순은 단군 신화, 해모수 신화(북부여 건국신화), 주몽 신화가 전승되는 과정에서 착종이 생긴 때문일 것. ==== [단군의 고조선 건국시기] ==== <삼국유사>에서는 중국의 시조인 요임금이 즉위한지 50년째 되는 해에 단군이 평양성에 도읍했다고 설명, 그러나 <제왕운기>에서는 요와 단군이 동시에 나라를 건국했다고 하고 있음. 이승휴는 이전에 전해오는 문헌의 내용을 함부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기록한 것이 <제왕운기>라고 설명함, 이를 따른다면 이승휴는 당대 전승되던 어떤 단군 문헌을 보고서 이를 기록했다고 생각됨. 이승휴와 일연이 접한 자료가 차이가 있었던 것. 중요한 것은 중국 최초의 군주이자 성인으로 간주되는 요임금과 단군이 같은 때에 나라를 세웠다고 함으로써 고려의 위상을 한껏 올려놓았다는 것임. 중국과 우리나라는 똑같은 시기에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적어도 이 점에서는 대등하다. ==== [조선 초의 단군기록] ==== 고려 말의 단군 신화는 조선 초로 이어진다. 조선 조에 들어와 국가에서 단군의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이를 통해 단군은 명실공히 우리 역사의 출발점이 되고, 민족을 통합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됨. 또한 조선 전기에 편찬된 관찬 역사서인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모두 단군에서부터 역사 서술이 시작됨. 조선 초 단군 기록으로 주목되는 것은 ‘권근’의 응제시(應製時)이다. 응제시(應製時): 황제의 명에 응해서 지은 시, 권근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전후 세 차례 도합 24수의 시를 지어 황제에게 바침. 권근의 귀국 이후 간행됨. 응제시 중 <태고에 개벽한 동이의 임금>이 단군을 주제로 한 시임. 시의 내용(p.47)을 살펴보면 단군이 요와 함께 즉위했다는 것은 <제왕운기>를 따랐다 할 수 있으나, 신인(神人) 단군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내용이 바뀌었음. 또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는 없는 인민이 추대해 임금이 되었다는 말이 추가되었음.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인민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오른 것은 ‘유교적 방향으로의 수정’임. 고려와 달리 조선은 유교를 이념적 기반으로 건국된 나라이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를 초래한 것. 신화는 이처럼 이념적, 역사적 요구에 따라 수정되거나 재창조된다. 단군은 원래 고조선의 창업왕이었으나,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와 우리 민족의 시조신으로 재창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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