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강 탈중화주의와 새로운 세계관의 정초
편집하기 (부분)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홍대용의 생애 === <의산문답>은 홍대용의 최만년(最晩年) 저작. 홍대용은 원래 중화주의적 세계관과 보수적인 대(對)청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생의 마지막에 중화주의와 화이론을 격파하는 <의산문답>을 저술함. ==== -수학기 ==== 홍대용은 영조 7년에 태어나 정조 7년에 사망. 홍력의 아들인데, 홍력은 단호그룹의 이인상과 절친했던 홍자의 사촌동생. 12살에 석실서원에서 수학하였음. 석실서원에서 10년 이상 주자성리학을 공부하였음. 이 기간동안 성리학 서적은 물론이고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함. 이후 영조 35년 부친이 금성 현감으로 부임하여 이곳으로 이동, 조금 떨어진 동복의 몰염정에서 과학기술자인 석당 나경적을 만나 혼천의(천문학 연구에 필요한 기기) 제작에 대해 의논함. 3년후 혼천의가 완성되어 같이 제작된 자명종과 함께 고향인 충청도 농수각에 비치하였음. -> 이를 통해 이 무렵 홍대용이 천문학 연구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으나, 아직 대명의리론과 화의 사상을 철저히 견지했으며, 학문적으로는 주자학을 고수하였음. ==== -연행 ==== 홍대용은 35세(1765년)에 연경으로 가는 사신 홍억의 자제군관(子弟軍官, 부연사가 자신의 자식이나 가까운 친적을 데려가는 것. 사적인 수행원.)으로 청나라 연경에 가게 됨. 홍대용은 이듬해 북경의 유리창(서화와 골동품을 파는 곳)에서 과거를 보러 올라온 항주의 선비 엄성, 반정균, 육비와 만나 필담을 나누며 친구가 됨. 홍대용은 북경에 머무는 동안 이들과 여러 번 만나 필담을 주고 받았고, 만나지 못할 때는 인편으로 많은 편지를 주고 받음. ==== -박지원과의 만남 ==== 1766년 홍대용은 고향 집으로 돌아옴, 이후 한달쯤 뒤인 6월 15일에 중국에서 항주의 선비들과 주고받았던 필담과 편지를 정리해 <간정동회우록>을 엮음. ‘간정동’은 북경의 유리창에서 항주의 선비들이 묵던 동네 이름, ‘회우록’은 친구와 만난 기록이라는 뜻. 1766년, 혹은 1767년경 박지원이 이 책에 서문을 써줌. 그리고 이 무렵 둘의 친교가 시작된 것으로 보임. 홍대용은 박지원과의 만남을 통해 대청 인식이 바뀌고 실학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으로 보임. ==== -엄성에게 보낸 편지 ==== 홍대용은 귀국 후 중국인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음. 그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1766년 9월 9일 중양절에 엄성에게 보낸 편지(‘발난(發難)2조’)임. 이 편지에는 학문 및 사상과 관련된 홍대용의 질문이 첨부되어 있음. 그 내용은 몇 장이 넘어가는 긴 내용임. 의문점 중 하나는 유교에서는 삼교(유, 불, 도)가운데 불, 도를 배척하지만 이 종교에 유교와 비슷한 점이 있는데 이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였음. -> 즉, 삼교가 회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의문 제기. 교조적인 유교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 중국에 다녀온 홍대용의 사상에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시사하는 질문임. 두번째 의문점은 양명학에 관한 것. 중국의 사상가 중에는 주자학자인데도 양명학을 배척하지 않는 이가 있는데, 이를 어떻게 보아야하는가?에 관한 의문. -> 주자학을 절대화하는 태도에 대하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 ‘발난(發難)’은 ‘의난(疑難, 학문적 의심)’이라고도 하는데, 홍대용의 학문법에서는 스스로 의난을 제기하고, 그 의난을 풀어가는 과정이 몹시 중요하였음. 홍대용은 중국에 다녀온 뒤 중국인 벗에게 의난을 제기했는데, 이것이 ‘주체’ 내부에서 만들어진 물음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함. ==== -엄성의 답장 ==== 홍대용은 항주의 선비 중 엄성과 가장 가까웠음. 엄성이 홍대용의 편지를 받은 것은 1767년 가을이었고, 답장을 써서 홍대용에게 보냄. 홍대용은 이 답장을 엄성이 말라리아로 죽은 뒤 1768년 부친상 중에 받게 됨. 엄성의 편지 역시 매우 긴데, 이 편지는 홍대용의 사상적 모색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음, 그러나 엄성의 편지만으로 홍대용이 이전과 전혀 다른 사상을 전개하게 되었다는 ‘외인설’은 타당하지 못함. 사상 주체의 내적 요구와 궁리, 그에 따른 결단이라는 측면을 무시하거나 배제할 수 있기 때문임. 홍대용의 사상에서 ‘외인설’을 제기한 것은 일본학자가 처음. 국내 학자 중에도 이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음. 엄성은 이 편지에서 ‘당신은 너무 성인의 도에 구애된 것이 병폐다. 그래서 구애된 생각을 조금 깨뜨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함. 엄성이 말한 ‘성인의 도’는 좁게 보면 주자학을, 넓게 보면 유교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음. 엄성은 구체적으로 홍대용에게 ‘당신은 사장(詞章, 시문을 짓는 일)이라든지 훈고(訓告, 경전에 주석을 붙이는 것)라든지 기송(記誦, 경전의 자구를 외는 일)이라든지 이런 것은 모두 도에 해롭다고 여긴다’고 말함. 당시 편지에서 홍대용은 사장과 훈고와 기송의 학문은 모두 해롭다고 말했음. -> 경전의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는 행위가 학문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며 의리의 학문을 강조한 것. 유학의 유파 중에서도 주자학이 특히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강조함, 주자학에서는 경전의 특정 구절의 올바른 의미만을 ‘의리’라고 하지 않고, 정학과 이단을 엄격하게 강조하는 태도 역시 ‘의리’로 칭하는데, 정학은 주자학, 이단은 이외의 학문을 가리킴. 즉, 주자학의 ‘의리’는 편벽되고 배타적인 면모가 있음. 그러나 홍대용이 말하는 ‘의리’는 주자학적 맥락이 아니라 주자학을 벗어난 맥락에서도 유효할 수 있다는 점이 주목됨. 홍대용의 <의산문답>의 기저에는 주자학을 벗어난,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정신의 ‘의리’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저술에서 사장이나 훈고, 기송에 힘쓴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물과 세계의 의미를 창조적 사유 행위로 새롭게 해석해 나가고 있기 때문. -> 즉, 주자학적 맥락의 ‘의리’는 아니지만 또 다른 맥락의 의리를 중시하는 학문관의 소산이라 할 수 있음. 엄성은 학문은 ‘의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홍대용의 생각에 반박하며 ‘사장, 훈고, 기송이 꼭 도에 해롭다고만 할 수 있느냐’며 훈고를 적극적으로 옹호함. -> 이는 한학(漢學)에 대한 옹호라고 할 수 있음. 한학은 고증학과 통하고, 당시 청 학계는 고증학이 지배적인 추세였음. 또 엄성은 항주의 선비였는데, 이 곳은 양명학의 자장이 강한 곳이었음. 따라서 엄성은 양명학도이면서 고증학에 침윤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음. 고증학은 ‘박학’을 중시하지만, 주자학은 고증학만큼의 박학을 추구하지는 않음. 엄성은 편지에서 주자학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음. 홍대용이 지나치게 성인의 도에 구애된다고 한 엄성의 말은 노장, 불교 등의 이단에 너무 교조적인 생각을 취하지 말고 열린 생각으로 바라보라는 의미, 그러나 양명학에도 적용되는 말이었음. 엄성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의 학자들은 불교, 노장, 양명학 등의 여러 사상을 희통하는 경향이 있었고, 엄성은 그래서 홍대용에게 ‘열린 관점에서 학문을 바라보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할 수 있었던 것. 엄성이 이러한 충고를 한 것은 홍대용이 학문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 ‘발난’이 있었기에 답변이 있는 것. -> 주체의 내적 요구에 주목해야 함. 홍대용은 이 편지를 통해 내적 계기와 외적 계기를 결합시켰다고 여겨짐. 이후 홍대용의 생각이 변하게 됨. 다만 편지를 받고 바로 그의 생각이 변화한 것은 아니고, 편지를 받은 뒤 이를 계기로 홍대용의 사상적 모색이 있었을 것으로 보임. 이후 홍대용이 ‘공관병수(公觀併受, 공정하게 여러 사상을 살펴 그 장점을 두루 받아들인다.)’라는 자신의 학문 방법론은 정립한 것은 1770년대에 와서 임. 편지 이외에 또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김종후와의 논쟁. 홍대용이 사상주체의 입장에서 엄성의 견해 중 무엇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는 중요함. 엄성은 한학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지만, 홍대용은 훈고 위주의 고증학은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음. 또, 엄성의 편지에는 중화주의나 화이론에 대한 문제의식은 보이지 않지만(홍대용이 묻지 않았기 때문에), 홍대용의 만년(晩年) 사상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의산문답>에는 ‘인물균(人物均)’이라는 세계관이 구축되어 있고, 화이론에 대한 문제 의식이 담겨 있음. -> 이는 홍대용 스스로의 주체적 사고에 따른 전개라 할 수 있음. 또 엄성은 ‘공관병수’와 같은 개념은 말한 바 없지만, 홍대용은 주체 사유의 결과로 이러한 개념을 만들어 냈음. -> 엄성이 홍대용에게 ‘아단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가질 것’을 충고하였지만, 이를 새로운 자극을 넘어 홍대용의 사유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됨. 엄성이 사유하지 못하고 있는 곳을 홍대용이 사유하고 있기 때문. -> Ex) 엄성은 묵자(墨子, 겸애설)나 서학(西學), 양주(楊朱, 爲我說: 나를 위주로 한 사상)는 말하지 않았는데, 홍대용은 공관병수에 의거해 이들을 자신의 사유 속에 포섭하였음. (유학자들은 이단 가운데 묵자와 양주를 가장 혹독하게 비난하였음. ) 홍대용은 엄성과의 지적 교류를 통해 정통과 이단에 대한 엄격한 구분을 해체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 것. 그러나 엄성의 영향으로 홍대용의 후기 사상이 결정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움. ==== -김종후와의 논쟁 ==== 홍대용은 37세(1767년)에 부친상을 당해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와 3년상을 지내면서 부친의 묘막을 지킴. 이해 부친상을 당하기 전에 김종후와 논쟁이 벌어짐. 김종후는 예학을 전공하였고, 춘추 의리를 굳게 지킨 고루한 학자. 홍대용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공격하였음. ‘당신이 중국에 가서 오랑캐 선비들과 희희낙락하며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는데, 조선 선비가 그래도 되는가? 더러운 오랑캐와 사귀고, 그 사람둘과 주고받은 말을 책으로 엮어 그것이 유포되어 읽히고 있다는데, 말이 되는가?’ 하며 홍대용을 비난하였음. 홍대용은 이에 반박했지만, 다시금 장문의 비난 편지가 왔고, 홍대용은 김종후의 편지를 재반박하는 장문의 편지를 씀. 이는 <담헌서>에 실려 있는데, 보내려고 썼다가 마음이 진정되자 간단히 쓴 편지를 보냈음. (김종후가 홍대용을 사문난적으로 몰아가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홍대용은 자신의 입장을 우려해 이를 미봉한 것.) 김종후와의 편지 왕래는 1769년까지 이어지는데, 이때의 편지는 논쟁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은 것으로 여겨짐. Ex) 1769년에 홍대용이 김종후에게 보낸 편지: ‘당신은 예학에 골몰하는데, 그런 것은 학문의 본령이라고 보기 어렵다. (..,) 실학이야 말로 힘써야 할 학문인데 왜 별로 시급하지 않은 예학을 학문의 본령으로 삼는가?’라는 내용. -> 이 편지를 통해 두 사람의 생각 차이가 드러나고, 당시 홍대용이 실학에 골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음. 홍대용은 김종후와의 논쟁기인 1760년대 말에 주자학에 대한 깊은 회의와 이단 사상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보여줌. 그리고 청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하는 관점을 보여줌. 그러나 중화주의와 화이론에 대해서는 뚜렷한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임. ==== -금강산 여행, 이송과의 만남 ==== 1770년(40세) 홍대용은 다시 서울로 올라오며 가을에 금강산을 여행했는데, 이때 서림 이송과 알게 됨. 이송은 소론이었으나 둘은 매우 친해졌고, 아마 깊은 생각을 나눈 것으로 추정됨. 홍대용이 죽은 뒤 이송이 쓴 묘표에 ‘공관병수’라는 말이 나옴. -> 홍대용 사상의 근본을 꿰뚫어 본 것. 홍대용의 묘지명은 박지원이 썼는데, 이송과는 다르게 중국의 선비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내용만 나올 뿐 ‘공관병수’같은 말은 없음. -> 박지원과 홍대용은 친했으나 말년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임. ==== -벼슬살이, 저술 ==== 홍대용은 1774년(44세) 이위사 시직(세손인 정조를 가르치는 직위)라는 벼슬에 제수되어 처음 벼슬에 나감. 이때 세손을 가르치며 기록한 것이 <계방일기>. 계방은 익위사의 별칭. 3년 후 태인 현인 현감으로 나가고, 이듬해 1778년 이덕무, 박제가가 중국에 갈 때 이들을 소개하는 편지를 중국 삼하의 손유의에게 보냄. 2년 후 50세 때 경상도 영천 군수에 제수되고, 이 해 봄에 자제군관으로 중국에 가는 박지원을 소개하는 편지를 손유의에게 보냄. 1783년 영천 군수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옴. 이후 중풍으로 사망. 저서로는 <주해수용>(수학책), <연기>(연행록), 연기의 국문 번역작 <을병연행록>, <의산문답>이 있음. 의산문답은 정확한 저술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1770년대 말에서 1780년대 초 사이에 집필되었을 것으로 보임.
요약:
DHinDS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DHinDS: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
토론
기여
계정 만들기
로그인
이름공간
문서
토론
한국어
보기
읽기
편집
원본 편집
역사 보기
더 보기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