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강 조선의 문호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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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원의 생애 === ==== -수학기: 이양천과 단호그룹의 영향 ==== 박지원의 본관은 ‘반남(전라도 나주의 옛 지명)’, 호는 연암. 할아버지인 박필균은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지냈고, 탕평에 비판적인 ‘노론’으로서의 당파성이 강한 인물이었음. 아버지는 박사유이고, 평생 벼슬을 하지 못함. 조부의 사망 이후 박지원의 집안이 곤궁해짐. 박지원은 서울 출생이고, 조부의 사망 이후 곤궁해지기는 하였지만 노론 명문가 출신이었음. 16살 때 노론 청류(淸流)에 속하는 이보천의 딸과 결혼하였음. 이보천 역시 탕평 정국에 몹시 비판적인 입장. 청년기의 박지원이 노론 청류의 입장을 갖게 된 것은 조부와 처가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임. 박지원은 장인에게 <맹자>를 배웠고, 처숙인 이양천에게 <사기>를 배움. 딱히 스승이 없던 자유로운 수학 방식이 훗날 박지원의 자유로운 글쓰기, 사상 모색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임. 박지원은 특히 처숙에게 큰 영향을 받았는데, 이를 박지원이 한 평생 사마천의 <사기>에 영향을 받은 글을 썼음에서 알 수 있음. 이양천은 사마천의 문장을 최고로 여겼기 때문. 또, 이양천의 혜안과 고식(高識), 세상을 바로잡고 교정하려는 뜻에 영향을 받아 박지원의 비평가로서의 자질, 세상을 교정하고자 하는 열망이 키워질 수 있었음. 이양천은 <사기>를 중시하여 진한고문(秦漢古文)을 문학의 전범으로 삼았음. * 고문: 진한고문(秦漢古文: 진, 한 때의 문장을 존숭하는 입장.) / 당송고문(唐宋古文: 당, 송 때의 문장을 존숭.) 이러한 이양천의 태도는 박지원의 초년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됨. (박지원이 10대 후반~20대에 주로 쓴 9傳이 진한고문에 속함.) 박지원의 붕우론은 오륜의 붕우는 오행의 토와 같다는 논리인데, 홍낙순이 이양천에게 보낸 편지에 비슷한 말이 있음. “오륜에서 붕우는 오행의 토와 같소, 오행은 토가 없으면 한 해의 순서를 이루지 못하고, 오륜의 붕우가 없으면 인도를 다하지 못한다오,” -> 박지원이 이양천 사망(혼인 3년 후) 이후 글을 수습해 문집을 엮는 과정에서 홍낙순의 편지를 보았을 가능성이 높음. 따라서 박지원 초년의 우정론은 홍낙순의 붕우론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있다고 할 수 있음. 또, 단호그룹의 멤버였던 이양천을 통해 전해 들은 단호그룹의 ‘友道’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측 가능. 연구자 중에는 박지원의 우정론이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음. <교우론>에서 ’벗은 제2의 나’라고 하며 벗의 중요성을 강조함. 조선 학자들은 이 책을 많이 보았는데(17세기 초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벗은 제2의 나”라는 대목이 소개되어 있기도 함.), 박지원 역시 중국인의 문집에 쓴 발문인 <회성원집> 발(跋)에서 “옛날에 벗에 대해 말한 사람은 벗을 ‘제 2의 나’라고 일컫기도 했다.”라는 말을 함. -> 이 대목이 마테로 리치의 교우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대목. 그러나 이 주장은 외적 계기에 과다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음. -> 박지원은 이미 노론계 선배들의 ‘우도’에 힘입어 우정론을 전개할 수 있었고, 마테오 리치의 말을 언급한 것은 자신의 우정론에 대한 부연과 윤색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임. ==== -범불안장애를 앓다. ==== 박지원은 17살 때인 1753년 이후 수년간 마음의 병을 앓게 됨. 동아시아에서는 마음의 병을 ‘유우지질(幽憂:깊은 근심之疾)’이라고 불렀는데, 지나친 근심 걱정 때문에 발생하는 정신 질환을 가리키는 말. 박지원은 일어나지 않은 어떤 일을 가정하며 굉장히 불안해하는 증상을 보였는데(ex) 아이가 엄마 젖을 빨다가 숨이 막히면 어떡하는가?), 이 때문에 박지원의 정신질환증세는 범불안장애에 가까운 것으로 보임. 박지원의 범불안장애의 기원은 처숙 이양천이 귀양 간 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임. 이양천은 영조 28년 10월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임금의 덕에 대해 간함(임금은 신하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임금은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 -> 영조의 군주로서의 면모를 비판한 것. 이후 이양천은 영조의 분노를 사서 11월 흑산도에 위리안치 되었고, 이듬해 6월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이때 얻은 병으로 고생하다가 1755년에 사망함. 박지원은 이양천이 유배 가기 전에 장가를 왔고, 자신의 19살에 이양천이 사망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이 일을 겪게 된 것. 박지원은 이양천을 몹시 따랐고, 이양천 역시 박지원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해 주었음. 또한 박지원은 어릴 때 몹시 소심하고 겁이 많았던 성격이었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번민과 환멸이 더해져 불안장애가 생긴 것으로 보임. ==== -백탑청연 시절 ==== 박지원은 32살(1768년) 때 백탑(白塔, 종로 탑골공원의 원각사탑) 부근으로 이사하는데, 이 부근에는 이덕무, 유득공, 유금, 이서구, 서상수 등이 거주하였음. 또 박지원은 이 부근에 사는 사람이 아니지만 박제가, 이희경과도 교유하였음. 이들 중 이서구를 제외하고 모두 서얼. 이들의 교유를 ‘백탑시사(白塔詩社)’라고 일컬음. 이후 이희경이 동인들의 시문과 편지들을 모아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 백탑의 맑은 인연을 담은 책)>이라는 책을 엮음. 백탑시사는 1768년부터 몇 년간 지속되었음. 박지원은 이 무렵 초년의 진한고문 추승에서 탈피하고 자신의 고유한 문학론인 ‘법고창신론’을 정립함. 또, 이 무렵 박지원은 홍대용과도 교유하면서 이전의 노론 청류의 정치적 입장(대명의리론, 북벌론)에서 벗어나 북학론, 실학에 관심을 가지게 됨. -> 사상의 전환이 일어남. ==== -연암협으로의 이주와 연행 ==== 41세(1777년), 장인인 이보천이 사망하고, 이듬해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주함. 연암의 호는 여기서 유래. 44세(1780년)에는 부연사 정사에 임명된 삼종형 박명원의 자제군관으로 연행을 하게 됨. 다음 해에는 <북학의(北學議)> 서(序)를 짓고, 1783년 <열하일기>의 초고를 탈고함. 이후에도 계속 수정, 보완작업을 함. 홍대용은 <열하일기>의 초고가 탈고된 해 사망해서 <열하일기>를 보지 못함. ==== -벼슬살이 ==== 박지원은 1786년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이라는 말단 벼슬에 제수됨. 박지원의 첫 벼슬. 음직: 고려시대 공신(功臣)과 5품 이상의 고급관료 자제들에게 부조(父祖)의 문음(門蔭)으로 주어진 관직. 6년 뒤 56세에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제수됨. 안의 현감에 부임한 지 1년 뒤 자신을 따르던 남공철에게 편지를 받게 되는데, 편지에는 정조의 분부가 언급되어 있었음. 정조는 문풍이 이와 같이 된 것이 박지원의 죄라고 하면서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인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다고 지적함. 이런 불순하고 잡된 글을 쓰지 말고 순수하고 바른 고문으로 글을 지어서 바치면 용서하고 문임의 벼슬을 줄 수도 있다고 하였음. -> ‘문임(文任)’은 임금의 교령이나 외교문서의 작성을 담당하는 직책. 문과 급제자만이 할 수 있는 벼슬. 문과 급제자가 아닌 박지원에게 이 직책을 내리겠다고 한 것은 이례적인 발언이라 할 수 있음. 정조는 이 무렵 문체반정(文體反正, 문체를 도로 바로 잡는다.)을 표방하였음. 정조는 조선 사대부들이 명말청초 패사소품의 영향을 받아 경박하고 방정하지 못한 글을 쓰는데, 이러한 경향을 주자학의 이념에 충실한 글인 고문(古文)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고 믿음. -> 이는 ‘주자학’으로 조선의 질서와 사대부의 정신을 바로 잡으려는 목표. 따라서 문체반정은 일종의 사상 통제 성격을 가짐. 정조가 박지원을 대상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음. 당시 천주교가 정치적 문제로 대두되었는데, 남인 가운데 천주교 신자가 많았음. 노론은 이를 이용해 남인을 공격했음. 노론의 세력이 커지자 정조는 노론, 남인, 소론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남인을 보호하기 위해) 문체반정을 활용한 것. -> 정조는 문체반정을 통해 주로 노론 인사를 공격함. 정조는 문체반정 때 박지원을 문책하기는 했으나, 직접 <열하일기>를 읽고 그의 문재(文才)를 좋게 생각한 것으로 보임. 그래서 박지원은 물론이고 그의 문객들도 정조의 속내를 알아차려서 분부에 매우 기뻐했다고 함. -> 정조와 박지원의 관계는 죽을 때까지 매우 좋았음. 박지원은 61세(1797년)때 충청도 면천 군수에 제수 됨. 그리고 1800년 정조 승하 후 두달 뒤인 8월에 강원도 양양 부사에 제수되나 이듬해 봄에 노병(老病)을 칭탁해 사직함. 이후 1805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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