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강 생사를 건 인정투쟁―이언진의 등장과 『호동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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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진의 생애 === 이언진은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음. 자는 우상이고, 호는 송목관, 호동(골목길). 20살(영조 35년) 때 역과에 합격하여 사역원 한학 주부(중국어 통역관)가 됨. 이언진은 일본에 가기 전 중국 연경에 두 번 다녀왔음. 24살(영조 39년)에 통신사를 따라 한학압물통사의 직임을 띄고 일본에 가게 됨. * 압물: 사신을 수행해 일본에 선물할 물품을 맡아 관리하는 일 * 통사: 통역관 이 해(1763년)가 계미년이었기 때문에 ‘계미통신사’라고 불렸음. 계미통신사는 10월에 서울을 출발해 이듬해 6월에 귀국하였음. <nowiki>*</nowiki>통신사의 구성 {| class="wikitable" | rowspan="3" |계미통신사의 구성 |정사(正使)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 |- |서기(성대중) |서기(원중거) |서기(김인겸) |- | colspan="3" |제술관(남옥) -> 문장짓는 일을 총괄 |} 3서기도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 중에 선발하지만 제술관은 특히 문재가 있는 사람 중에 선발되었음. -> 제술관과 3서기를 합쳐 4문사라 불렀는데, 이들은 일본 문인들을 상대해 시를 지어 국위를 선양하는 것이 임무였음. 4문사는 관례상 서얼이 맡았음. (양반들은 일본에 가는 일이 위험하다고 꺼렸기 때문) 이언진은 계미통신단에 속하였지만 역관으로 동행한 것이기 때문에 4문사와 원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음. 통신사절단이 탄 배는 1763년 10월 부산을 출발해 11월 후쿠오카 앞바다의 이키섬에 도착했음. 이언진은 이키섬에 머물며 장편 고시 <해람편(바다를 구경하다.)>을 짓는데, 운자(韻字)를 쓰고 있고, 96구나 되는 장시였기 때문에 4문사가 이 시를 보고 감탄하였음. * 압운법 : 한자는 초·중·종성의 세 가지 소리로 갈라 초성을 '자모(字母)'라 하고, 중·종성을 합해서 운모(韻母)라 한다. 이 운모를 같은 계통의 글자로 맞추는 것을 '압운(押韻)'이라 하고 한 수의 시 안에서 압운된 글자를 '운자(韻字)'라 한다. 그런데 이 운자는 옛 운서에 따라 고음(古音)대로 쓰므로 현대음과 다른 것도 있다. <해람편> 인용 본책 163~164. => 나함, 도홍경, 이마두 등의 언급을 통해 이언진이 중국의 고전은 물론 서학서까지 섭렵했음을 알 수 있음. 남옥은 <남관록>의 1763년 12월 1일 일기 중 “이언진이 <해람편> 및 고체시 몇 편을 보여 주었다. 학식이 해박하고 문체가 찬란하니 진실로 당세의 기이한 재주이다. (…)” 라고 서술하며 이언진의 재주를 칭찬했고, 원중거도 <승사록>에서 “이러한 재주를 가지고도 역관에 종사하다니 애석하다.”라고 평하며 이언진의 재능을 칭찬하였음. 이 이후로 4문사는 이언진을 일개 역관이 아닌 문인으로 보게 되었음. 4문사가 일로 바쁘거나 너무 많은 요청이 쇄도해 일본인의 시 요청을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이언진에게 일본인을 상대하게 하였음. -> 이때문에 일본에서 명성을 얻게 됨. 이후 귀국해서도 한양에서 이름이 회자되었음. 이언진은 귀국 후 <해람편>을 퇴고해 스승인 이용휴에게 보여주고 비평을 받음. 또 일본에 가기 전부터 쓰기 시작한 <호동거실>을 귀국 후 병중에도 계속 써 죽기 얼마 전에 퇴고하게 됨. 26살 때인 1765년에는 박지원에게 몇 차례 <해람편>과 <호동거실>의 일부 시를 보내 평가를 받았는데, 박지원은 이 시들을 몹시 혹평하였음. -> 이언진은 이 일로 매우 분노하고 낙담함. 죽기 1, 2년 전부터 팔에 마비가 오는 등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시를 지어 읊곤 하였음. 그러면서도 자신이 평생에 걸쳐 쓴 글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는데, 이는 신분 차별이 심한 조선에서 자신의 글을 남겨봤자 누가 알아주겠는가 하는 절망감 때문이었음. 이언진이 마당에서 원고를 태우고 있을 때 아내 유씨가 타다 남은 원고를 수습한 덕분에 <호동거실>을 비롯한 약간의 글이 후세에 남을 수 있게 됨. 이언진의 집은 필동의 남산 자락, 골목길이 구불구불한 곳에 있었는데 자인 ‘호동’이 이 공간을 의미함. 죽기 얼마 전 서울 근교의 바다로 이주했고, 1766년 잠시 서울에 돌아왔다가 삼청동 어떤 사람의 집에서 사망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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