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강 추방된 자의 글쓰기-정약용과 이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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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의 생애 === 정약용은 영조 38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에서 태어나 헌종 2년 75세에 사망함. 호는 다산, 혹은 여유당. 부친은 음직으로 진주 목사를 했지만 조부와 증조부는 벼슬을 하지 못함. ->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음. 정약용 대에 와서 집안이 흥함. 정약용은 28살(정조 13년)에 문과에 급제함.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아 예문관 검열,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 동부승지, 곡산 부사, 형조 참의 등을 지냄. 정약용은 문과에 급제하기 전 1784년 큰형수의 동생인 이벽과 자형인 이승훈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함. * 이승훈: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가서 1784년 초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음. 정약용 24살(1785년)에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발생함. * 을사추조적발: 1784년,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한 뒤 귀국한 이승훈은 천주교회를 설립한 후 전교에 힘썼다. 그는 이벽, 권일신 등과 서울 명례동(현 명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미사를 집전하고 교리를 공부했다. 다음해 3월,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 권일신 부자 등 10여명이 이벽의 교설을 듣고 있던 중에 주위의 고발로 도박 단속을 위하여 순라를 돌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형조로 끌려갔다. 이들의 종교 활동을 처음 접한 형조판서 김화진은 중인 출신 역관 김범우만 투옥하고 그를 제외한 양반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사건 직후 양반 출신들은 모두 배교한 영향도 있는듯하다. (다만 이후 몇몇은 다시 복교하기도 한다.) 그런데 석방된 권일신, 이윤하, 이총억, 이정섭 등 다섯 사람이 함께 형조에 들어가 성화상의 반환과 김범우의 석방을 요청하자 사건이 시끄러워지면서 외부로 알려지게 된다. 이에 소식을 접한 일부 유생들이 천주교 교리가 국가의 지도 이념인 성리학적 윤리 체계를 파괴한다고 반발하면서 이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자 "서학(천주교)은 한 때의 유행일 뿐이니 정학(성리학)을 바로 세우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라던 정조는 김범우를 경상도 밀양의 단장으로 유배시키고 사태를 마무리짓는다. -> 이벽, 이승훈,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정약용의 형들) 등 10명이 참석했음. 그러나 당시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 양반집 자제들은 훈방되고 증인인 김범우만 처벌을 받음. 정약용 30살 때인 1791년 ‘진산 사건(신해박해)’이 벌어짐. *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년(신해년, 정조 15년) 조선 최초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 사건이다. 신해교난(辛亥敎難) 또는 신해사옥(辛亥邪獄), 진산 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부른다.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이 종교적 가르침을 지키고자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후 제사를 폐함으로 인해 사회적 파장이 일고 당쟁으로까지 비화됨에 따라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한다는 죄명하에 그의 행위에 동조한 외사촌 권상연과 함께 참수당하였다. 정조는 관대한 처결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윤지충이 남인에 속했던 탓에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서인 조차 신서파와 공서파로 분열되었다. 많은 양반계층 교인들은 천주교가 박해의 대상이 되자 배교하였다. 그 공백은 중인들이 메우며 교세는 성장했으나 제사거부라는 교리는 천주교 탄압의 좋은 명분이 되었고 천주교는 정치세력간에 정적 숙청의 희생양으로 악용되기 시작했다. 신해박해를 필두로 하여 시작된 탄압은 신유박해, 을해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가 자행되어 수많은 천주교 성직자와 천주교도들이 '천주학 죄인' 또는 '천주학 쟁이'라고 비난받으며 순교의 피를 흘리는 불행사로 이어졌다. ->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종형. 제사는 유교의 근본 이념인 효와 직결되는 행위. 따라서 진산 사건은 유교와 천주교 신앙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 이후 정약용은 천주교를 등지는 쪽을 택했고, 평생 이러한 입장을 고수했지만 이후로도 노론으로 부터 천주교 신자라는 공격을 받게 됨. 33살 때는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폈고, 다음해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 밀입국 사건(형인 정약전이 연루됨.)으로 인해 충청도 금정 찰방으로 좌천되게 됨. -> 정조는 당시 남인들을 보호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정약용을 잠시 외직으로 내보낸 것. 정약용은 1796년 규영부 교서가 되어 박제가 등과 <사기영선>을 교열함. 이듬해 6월 좌부승지에 제수되지만 바로 사직하고, <자명소>를 올려 자신이 천주교에서 빠져나왔음을 분명히 함. 같은 해 윤6월 정조는 정약용을 곡산 부사로 내보냄. -> 정약용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 1799년 4월 다시 내직으로 발령받아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직책을 제수 받으나 반대파의 무고로 사직하게 됨.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등극함. 이듬해 2월 신유옥사(신유박해)가 일어남. 신유옥사로 이승훈과 정약종은 참수되고, 이가환은 고문 끝에 옥중에서 사망함. 정약용과 정약전은 배교한 것이 참작되어 경상도 포항과 전라도 신지도에 각각 유배됨. 정약용의 형제 중 맏형인 정약현만 천주교를 믿지 않아 탈이 없었던 것. -> 정약용은 장기로 유배 가는 도중에 <수오재기>라는 글을 써 자신들이 큰형처럼 언행을 삼가며 세상을 살지 않아 이런 화를 당하게 되었음을 성찰함. 신유옥사가 일어난 지 8개월 뒤인 1801년 10월 황사영백서 사건이 일어남. *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조선에서,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信者) 황사영이 중국 로마 가톨릭교회 북경 교구의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적은 밀서(密書)이다. 신유박해에 대한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다. 황사영은 정약현의 사위, 정약용과 정약전은 이 사건으로 인해 서울로 압송되어 다시 국문을 받게 됨. 정약용은 이때 전라도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됨. 정약용과 정약전은 처음에 천주교를 믿었지만, 나중에 배교하였음. 정약용 본인이 그 사실을 여러차례 이야기 했음. 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신유옥사 때 억울하게 죽거나 귀양을 간 다섯 사람(이가환, 이기양, 권철신, 오석충, 정약전)을 신원하는 묘지명을 씀. -> 억울하게 천주교도로 몰려서 정치적 탄압을 받은 사람들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쓴 것, 진짜 천주교도 였던 정약종이나 황사영의 묘지명은 쓰지 않았음. 정약용이 쓴 <돌아가신 둘째 형님 묘지명>이나 <자찬묘지명>에 의하면 정약용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귀국한지 한 달 뒤인 1784년 4월 15일 이벽에게서 <천주실의>와 <칠극>등 천주교 서적을 빌려 읽었고, 이 때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이 시작되었고 이로부터 7년 뒤인 진산사건까지 신앙이 이어짐. 그러나 진산사건 이후로는 천주교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됨.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정약용이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거짓으로 배교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음. 하지만 정약용은 학자로서, 그리고 사상가로서 정직성과 양심이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인간이므로 이러한 주장은 정약용이라는 인간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 정약용은 유배간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에서 동문 밖에 있는 주막집 노파의 집을 거처로 정함. -> 다들 정약용을 기피해서 이 집을 거처로 삼은 것임. 정약용은 자신의 유배 거처지에 ‘사의재(네 가지 마땅한 집)‘이라는 이름을 붙임. 사의는 생각은 담박할 것, 외모는 엄정할 것, 말은 과묵할 것, 행동은 진중할 것. -> 사의를 실천하며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방 이름에 붙인 것. 정약용은 1802년 봄 이후 다시 마음을 추슬러 공부를 시작함. <사의재기>에 이러한 대목이 나옴. -> “생각건대 나이는 자꾸 들어가는데 학업이 황폐해진 게 슬프다.“ 사의재에 거주할 때인 1803년 정약용은 <소경에게 시집간 여자>라는 서사시를 지음. 정약용이 직접 목격한 일을 쓴 것인데, 이 작품에서는 참혹한 처지에 있는 여성에 대한 정약용의 연민을 느낄 수 있음. 이는 약자에 대한 정약용의 인도주의적 관심, 혹은 유교적 가부장제하에 있는 여성에 대한 관심이 보이는 시. 정약용은 사의재에서 만 4년을 지냈고, 이후 보은산방(고성사)에서 2년간 지냄. 47살 때인 1808년 다산 아래에 있는 운단의 산정으로 거처를 옮김. 이 산정이 ‘다산초당’이고, 유배에서 풀려서 돌아올 때까지 이 집에서 저술에 전념함. 이때가 다산초당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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