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강 김려와 이옥, 근대의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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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려의 생애 === 김려는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호는 담정. 원래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김려 당대에는 벌열층은 아니었음. 18세기 후반에 들어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나뉘어 크게 대립했는데, 김려의 집안은 노론 시파에 속했음. 김려는 정조 4년 성균관에 입학했고, 그 때 같은 성균관 학생이던 이옥과 교제하게 됨. 정조 16년 27살 때 진사시에 합격했고, 이해에 김조순과 더불어 <우초속지>라는 패사소품서를 저술함. -> <우초속지>에는 김려와 김조순이 쓴 패사소품적 전 50여편이 실려있었다고 전해짐. 현전하지 않음. 김려의 글 일부가 김려의 문집인 <담정유고>에 단량패사라는 이름으로 수습되어 있음. 김려는 정조 21년 32살 때 강이천의 비어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가게되었고, 유배 중이던 1799년에 아버지를 여의게 됨. 1801년에는 신유옥사가 일어나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고 진해로 유배를 가게됨. 김려는 진해에서 <사유악부>, <우해이어보>, <방주를 위한 시> 등을 지었음. -> <유해이어보>는 진해의 특이한 물고기들에 대해 기록한 책이라는 뜻으로, 진해에 서식하는 72종의 어패류에 대한 자세한 기록. 김려는 41살 때인 순조 6년 유배에서 풀려나게 됨. 당시 순조의 장인이었던 친구 김조순의 도움이 있었음. 유배에서 풀려난 뒤 김려는 부친의 묘가 있는 공주로 가 3년동안 상복을 입었고, 46살 때인 1811년 서울 삼청동으로 이거하였고, 47~52살까지 말단 내직을 지내다가 1817년 연산 현감에 제수되어 지방관으로 나가게 됨. 이곳에서 1819년까지 재직하다가, 몸의 병을 이유로 사직함. 1820년 함양 군수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임지에서 사망하였음. 김려의 생애에서는 성균관 시절 / 강이천 비어 사건 / 유배기 라는 세 국면이 특히 문제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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