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무신란 이후의 문학과 신진사류의 의식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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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림고회의 일곱 문인 === 죽림고회는 죽림의 고상한 모임이라는 뜻. 무신 정권 때의 이인로, 임춘, 오세재,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일곱 문인이 늘 서로 만나 술 마시고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는데 이 모임을 이르는 말. 이들은 중국의 ‘죽림칠현’, ‘강좌칠현’에 견주어 해좌칠현이라고 불렸음. (해좌는 바다 왼쪽으로, 우리나라를 가리킴) * 죽림칠현: 중국 위진시대에 죽림에 은거하여 청담을 일삼은 일곱 명의 은자.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진(晉) 초에 노장(老莊)의 사상을 숭배하여 속세를 떠나 죽림에서 혜강(嵇康)과 함께 놀던 완적(阮籍),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을 말한다. 이들은 정치권력을 멀리하고 세상의 압박으로부터 도피하여 술 마시고 시 짓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도덕과 관습을 벗어나 노장 사상을 숭배하고 무위자연을 노래하였다. 이들 중 혜강은 귀공자 종회(鍾會)가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을 때 예를 갖추지 않아, 뒤에 종회의 참소를 받아 사형을 당하였다. 완적은 조정에서 자주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으며 거침없는 행동 때문에 원한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이들 해좌칠현은 무신정권에서 득의하지 못했던 사인(士人)이나 벼슬을 못한 소외된 사인들에 해당함. 그래서 이들은 무리를 이루어 술과 시로 즐기며 지내면서도 자부심과 세상에 대한 불만이 높았기 때문에 방약무인한 태도를 보였음. -> 이들은 자신이 불우하다는 의식이 몹시 강했음. 우리 문학사에서 불우하고 소외된 문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문학 활동을 한 것은 죽림고회가 처음. (조선 후기에는 취향이나 지체가 비슷한 사람이 모여 시회를 갖는 일이 빈번해짐. 죽림고회는 이런 일의 원류라 할 수 있음.) 이인로는 증조부가 평상사를 지낸 귀족 집안 출신. 무신란 때 산으로 피신해 승려 행세를 하다가 세상이 잠잠해진 뒤 속세로 돌아와 명종 때 장원급제를 하고 고종 초에 우간의대부에 올랐음. 정4품 벼슬로, 당세에는 크게 쓰이지 못했으나 죽림고회의 구성원 중에 가장 높은 벼슬을 지냈음. 이인로는 임춘과 더불어 죽림고회의 중심인물이었음. 이인로는 특히 시로 이름이 높았는데, <파한집>이라는 시 비평서를 남기기도 함. 이는 우리 문학사 최초의 시화집. (후대에 이를 본받아 고려 때 최차의 <보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의 시화집이 나옴.) 또한 <은대집>이라는 문집을 남겼으나 현전하지 않음. 임춘은 할아버지가 평장사, 아버지가 상서를 지낸 귀족 집안 출신. 20세 전후에 무신란을 만나 피신해서 겨우 목숨을 건짐. 개경에 5년여 숨어지내다 가족을 이끌고 영남으로 피신해 7년 남짓 떠돌다가 다시 개경으로 올라옴. 평생 벼슬을 하지 못해 불우한 삶을 살다 마흔 무렵 생을 마감함. 임춘은 여기저기 많이 떠돌았고, 이 중에 강원도 강릉 일대의 산수를 유람하고 <동행기>라는 글을 짓기도 함. 이 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산수유기(산수를 유람하고 쓴 글)이라는 점에서 주목됨. 조선 후기에는 유기가 많이 창작되었는데, 임춘의 <동행기>는 그 원류가 되는 글. 임춘의 문집 <서하집>(임춘이 죽은 뒤 이인로가 엮음.)은 현전하고 있는데, 이 문집에는 빈궁이나 현실에 대한 비분, 불만 등을 읊은 시가 여럿 실려있음. ex) <손에 검을 잡다>(명종 4년,1174. 남쪽을 떠돌 때 쓴 시): ‘갑중의 서늘한 3척 검’을 노래함. 갑중의 검은 뜻을 펴지 못한 불우한 선비를 은유하는 말. 후대의 여러 시인들이 구사하기도 함. 문학사상 ‘시인적 자의식의 뚜렷한 표출’은 신라 말 최치원에 의해 처음 목도됨. 임춘과 최치원의 시는 불우감을 읊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나, 임춘의 시는 ‘궁수(곤궁에 대한 근심과 현실에 대한 비분의 감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최치원과 달라짐. 임춘이 <공방전>이라는 가전을 지은 것도 그가 극도의 곤궁을 겪으며 돈의 폐혜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임. 임춘은 최치원과 달리 지식인으로서, 문인으로서 극도의 생활고를 겪었고, 현실로부터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가 더욱 어둡고 비관적인 색채를 띄게 됨. -> 임춘의 문학은 이 점에서 극도로 소외된 지식인의 내면 풍경을 보여주게 됨. 우리 문학사의 새로운 지평이라 할 수 있음. 오세재는 문신집안 출신으로, 무신정권 때 과거 급제를 했으나 벼슬은 하지 못했음. 이인로가 세 번이나 벼슬에 추천했지만 결국 벼슬을 하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리며 삶. 오세재는 성격이 소탈하고 구속을 싫어하여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였음. 무신정권에서 벼슬을 하지 못했던 것은 이러한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 오세재는 이규보보다 35살이 많았지만 망년우(나이를 초월한 벗)를 맺었음. 이규보는 오세재가 죽자 <오선생 덕전 애사>라는 그를 추모하는 글을 지음. 이 글에서 이규보는 오세재를 ‘복양 선생’이라고 칭하는데, 선생이라는 칭호는 당시 존경하는 사람에게만 붙였던 칭호. 황보항 역시 귀족 집안 출신, 미관 말직만을 했을 뿐 변변한 벼슬을 하지 못함. 함순도 귀족 집안 이었으나 최충헌 집권 당시 말단 관직을 지냈음. 이담지도 귀족 집안. 문헌공도(하급 관직)을 지냈음. 조통도 귀족 집안의 자제로 추정되는데, 운이 좋아 좌간의대부(정4품 관직)까지 지냄. 해좌칠현 중 이인로와 조통만이 어느정도의 벼슬을 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벼슬을 아예 못하거나 미관말직만을 지냈음. -> 해좌칠현은 대체로 귀족 문신 집안 출신이며, 이 때문에 무신정권에서 벼슬을 지낸 사람이라 해도 불평스러운 마음이 전연 없었다고 하기 어려움. 이들은 무신란 이후 문학장의 한 국면을 잘 보여주는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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