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강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문학적 대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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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습의 작품들 === ==== <금오신화> ==== 원나라 말 구우가 <전등신화>를 썼고, 성종 때 성임이 <태평통재>를 엮을 때 <전등신화>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성종 연간 이전부터 조선에서 <전등신화>가 읽혔음을 알 수 있음. 김시습도 <전등신화>를 읽고 그에 자극받아 <금오신화>를 썼음. 현존하는 <금오신화>에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다섯 편의 작품이 실려있음. -> 주목해야 할 점은 <금오신화>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문학적 대응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 만복사저포기는 ‘만복사에서 저포로 내기를 한 이야기’라는 뜻. 이생규장전은 ‘이생이 담장을 엿본 이야기’라는 뜻 (내용은 본책 74~75쪽) 이 두 소설은 외관상으로는 남녀의 사랑이야기. 그러나 주목할 점은 남녀주인공 모두가 절의를 지킨다는 사실. 특히 여자주인공은 감당할 수 없는 폭력에 맞서 정절을 지킴. 이것은 열녀 이데올로기를 부추기기 위한 것이 아님. 남자 주인공 역시 지조를 보여주는 것에서 인간 일반에게 요청되는 지조라는 덕목을 부각하기 위 함임을 알 수 있음. 즉, 이 두 소설은 사랑이야기는 단지 외피일 뿐이고, 인간의 삶에서 ‘절의란 무엇인가?’를 묻고 탐색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소설. 작가는 ‘절의’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고 종요로운 것이며,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보고 있음. ->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절의, 지조라는 것은 단순한 유교적 덕목이 아니라 존재의 내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행위로까지 나아감. -> 이 점에서 생에 대한 작가의 지향과 가치 의식을 느낄 수 있음. 그러나 두 여성주인공은 세계의 폭력에 희생되게 됨. 남성주인공 역시 그 연장선상에 서있음. 이들은 세계에 패배했음에도 폭력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음. 이러한 주인공들의 태도는 ‘절의’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함. 즉, 작가에게 절의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 인간 주체성의 문제인 것. 그리고 이 점에서 김시습에게 절의가 단순한 윤리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미학적인 것으로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윤리학과 존재론과 미학의 통일을 이뤄내고 있는 것.) -> 이러한 메시지는 작가가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겪은 삶, 고뇌와 사유, 깨달음이 반영된 것이라는 것이 주목됨. ->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김시습의 감정을 사랑의 외피를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낸 이야기. ‘술에 취해 부벽정에서 노닌 이야기’라는 뜻인 취유부벽정기는 고사를 인용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있음. (줄거리 77쪽) 이 작품 역시 절의를 부각하고 있으며, 준왕(準王)에 대한 위만의 왕위 찬탈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됨. 이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기 위한 것. 이와 관련해 작가는 홍생이 준왕의 딸을 만난 시점을 세조 당대의 일로 서술해 과거와 현재의 왕위 찬탈을 오버랩 시키고 있음. 남염부주지는 ‘남쪽 염부주 이야기’라는 뜻이며, 취유부벽정기보다 더 직접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있음. * 남염부주: 불교에서 수미산 남쪽에 있는 대륙 취유부벽정기와 마찬가지로 세조 당대가 작품의 배경임. 또, 주인공이 거주하는 공간이 경주라는 점에서 작가의 실존이 투사되어 있다고 여겨짐. 주목할 점은 작품에 김시습의 정치사상이 피력되어 있다는 것임. 1. 전제군주에 대한 반대 <nowiki>:</nowiki> “'''나라를 소유한 자는 폭력으로 인민을 겁박해서는 안 되오'''. 인민이 비록 두려워하며 따르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반역할 마음을 품어 시간이 흐르면 큰 재앙이 일어날 것이오” -> 염라대왕이 박생에게 한 말. 2. 국가는 인민의 것이라는 생각 <nowiki>:</nowiki> “덕 있는 자는 힘으로 군주의 자리에 나아가서는 안 되오 (…) 대개 나라란 인민의 나라요, 명이리란 하늘의 명이라오. 천명이 이미 떠나고 민심이 이미 떠나면, 비록 몸을 보전하고자 한들 어찌하겠소?” -> 염라가 박생에게 한 말. <금오신화>에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고, 이러한 상황에서 선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답하고 있음. 이를 통해 국가.인민.군주의 관계에 대한 정치사상적 인식의 진전을 보여주고 있으며, 선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절의임을 확인하고 있음. <금오신화>에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김시습의 입장이 드러나는 것은 맞지만, 정론(政論)의 개진이 아닌, 허구를 통한 문학적 형상화라는 ‘미학적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함. -> 이로써 한국 문학은 정치적 현실과의 대결에서 새로운 높이를 확보하게 됨. -> <금오신화> 속의 높은 예술적 긴장감, 폭력적 세계에 맞서는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옹호, 국가와 민에 대한 깊은 통찰 등이 이를 뒷받침. 이러한 점에서 <금오신화>는 미증유의 문학사적 성취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음. 그리고 이러한 성취는 김시습의 비극적 삶에서 시작된 것. * 미증유(未曾有): 전례가 없는 혁신적인 사건이나 변화. <금오신화>가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지만, 모방한 것은 아님. 이 두 작품은 전기소설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서로 다른 주제 의식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 <금오신화>가 왕위 찬탈이라는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음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전등신화>는 전란이 인간의 운명에 어떤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는가를 탐구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음. 16세기 전기, 베트남에서 완서(阮嶼)가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은 <전기만록(傳奇漫錄)>이라는 소설을 창작했는데, 이는 이민족 중국에 맞서는 베트남 인민에 주목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면모가 확인됨. 동아시아 문학사로 본다면 14세기 후반, 원나라 말기에 <전등신화>가 창작되고, 그 영향으로 15세기 후반에 조선에서 <금오신화>가, 16세기 전반에 베트남에서 <전기만록>이 창작된 것. 이 작품들은 모두 전기소설이지만, 주제 의식이 모두 다름. (이는 작가의 시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실존이 달라졌기 때문) ==== <애민의(愛民義)>, <방본잠(邦本箴)> ==== 김시습은 <애민의>, <방본잠> 같은 글을 통해서도 정치사상을 펼쳤음. 정치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을 ‘정론 산문(政論散文)’이라 하는데, 이 글들은 정론 산문임. 김시습은 정론 산문을 통해 자신의 민본적 사고를 정극적으로 개진하였음. <애민의>는 ‘인민에 대한 사랑을 논함’이라는 뜻임 “창고와 곳 같은 인민의 몸이요, 옷과 모자와 신발은 인민의 살갗이요, 술과 음식은 인민의 기름이요, 궁궐과 거마는 인민의 힘이요, 세금과 기물은 인민의 피다.” -> 임금이 사용하는 모든 것, 국가의 모든 것은 인민에게서 나온 것이니 인민을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피력됨. -> 애민론은 <맹자>에도 나타나지만, 무엇이 인민의 몸이고~ 이러한 인민의 ‘육체성’에 근거한 사고는 이전 중국, 한국의 어떤 책에도 나오지 않은 말임. 군주와 국가의 모든 재용은 인민의 몸의 일부이며, 그래서 인민의 몸과 노동의 산물은 동일시됨. -> 이러한 사고는 김시습이 인민적 관점에 투철함을 알려주고, 이러한 투철함은 김시습의 실존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음.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체제 안과 밖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 지점에서 체제를 비판적으로 조명했음. 그러한 사고의 결과가 인민과 군주와 국가에 대한 이러한 통찰을 낳게 된 것. <방본잠>은 ‘국가의 근본에 대한 잠언’이라는 뜻 “조금이라도 인민의 원망이 있게 되면 임금 당신의 잘못이니 하늘이 죄를 내리시어 당신의 나라를 빼앗아 훌륭하고 어진 이에게 주리니 당신이 필부로 떨어져 하루아침에 권력을 잃는다면 뉘우친들 소용없네. 그래서 인민을 나라의 근본이라 하니 근본이 굳건해야 당신이 편안하지. 당신이 먹는 건 백성의 곡식이고 당신이 입는 건 백성의 비단이며 궁실과 거마는 백성의 노동이네.” -> 국가의 근본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이라는 생각이 제시되어 있으며, 혁명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이 보인다는 점이 주목됨. -> 천명이 인민에게서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나쁜 군주를 교체하는 것은 결국 인민인 것. <애민의>나 <방본잠>에서 확인되는 김시습의 ‘인민이 나라의 실질적인 주인이며 군주는 인민을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민본주의적 사유는 근대의 민주주의 사상과는 아직 거리가 멀지만, 주목할 만함. 그래서 김시습의 사유 속에서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이 긍정되고 있음. 김시습의 이러한 민본주의 사상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을 계기로 심화되었다 할 수 있음. 권력의 폭력에 대한 사유, 국가의 근거에 대한 사유, 군주의 통치권에 대한 사유, 인민의 사회정치적 위상에 대한 사유, 혁명에 대한 사유로 정치철학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갔다고 보임. 이러한 김시습의 정치사상은 15세기 후반 한중일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의 사유를 보이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음. (중국의 지식인들은 김시습보다 200년쯤 뒤 왕조 교체를 겪으며 대담한 사유를 감행하게 됨.) ==== <청한잡저 2> ==== 김시습의 문집인 <매월당집(梅月堂集)>에는 잡저(雜著)라는 제목의 저술이 둘 실려 있음. 1. 도교를 논한 것. (청한잡저 1) 2. 불교를 논한 것 (청한잡저 2) -> 모두 10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고, 객과 청한자(淸寒子)의 문답형식을 취하고 있음. 청한자는 김시습의 또다른 호임. 문답 형식으로 저자의 사상을 펼치고 있음. (18세기 홍대용이 쓴 <의산문답>을 떠올리게 함.) 형식적 세련도로 볼 때 도교를 논한 글이 먼저 쓰였고, 이후 불교를 논한 글을 쓴 것으로 보임. 둘 모두 금오산 시절 쓰인 듯함. 김시습은 유학자이면서 불교학자이기도 하였음. <청한잡저 2>에서는 유교를 의식해 불교를 논하면서도, 불교의 의의를 적극 긍정하고 있음. 또한 일목요연한 체계를 갖추고 있는 책임. “부처의 법은 청정과 과욕에 있으므로 만물과 다투지 않으니, 산속에 있으면 그 도가 높고, 인간 세상에 행해지면 그 법이 엄합니다.” (3, 삼청) “이른바 부처의 도란 (…) 그 광대한 이로움이 무궁합니다. (…)” (6. 양무제) -> 불교의 가르침이 비단 출세간만 아니라 세간에도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음. 한편,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를 유교의 ‘인애(仁愛)’로 가져와 그 사회적 정치적 효용을 부각시키기도 하였음. “석가의 근본 뜻은 자애를 우선으로 삼으니, 임금 된 자로 하여금 백성을 사랑할 바를 알게 하고, 아비 된 자로 하여금 자식을 사랑할 바를 알게 하며, (…) 위로는 그릇되고 어긋난 정치가 없게 하고, 아래로는 시해하고 반역하는 생각을 끊게 함으로써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평온하게 살면서 (…) 그러므로 비록 인이니 의니 하는 말은 없으나 (…) 깨우침이 이미 인의의 자취를 드러내고 있다 할 것이니, (…)” (5. 송계) (본책 87쪽) -> 불교와 유교를 적극적으로 회통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음. 불교를 통해 유교에 대한 성찰을 심화시키고 있기도 하고, 유교를 통해 불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꾀하고 있음. 따라서 김시습의 회통은 ‘상호적’임. 김시습은 특히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서 불교의 가치를 논하고 있는데, 석가로 인해 “억세고 용맹한 자가 전쟁을 그치고, 패역한 자가 찬탈을 그치며, 꾀 많은 자가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고, 어진 자가 상도를 지켜” 인도가 성인의 땅이 되었으니, 석가는 은의 탕왕이나 주의 무왕과 대등하다고 하였음. 또, <남염부주지>에서도 석가의 말은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라고 하기도 하였음. 김시습이 불교의 사회적, 정치적 의의를 크게 긍정하고 있는 점은 매우 독특하다 할 수 있음. 김시습의 독특한 불교에 대한 해석 역시 수양대군에게서 기인함. 세조는 호불(好佛)의 군주였음. 왕이 되자 많은 불사를 일으켰고, 많은 불경을 국문으로 발행해 간행했고, 도성 한 가운데 원각사를 짓기도 했음. 김시습은 불교를 긍정했지만, 세조의 이러한 불교 숭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을 가짐. <청한잡저2>에서 중국 남조 양나라 무제의 호불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그는 왕위를 찬탈했다는 점에서도 세조와 유사함. 김시습은 양무제의 부처 숭배가 부처의 가르침과는 어긋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음. 객과 청한자가 주고 받은 문답을 보면(89쪽), 큰 돈을 들여 화려한 절을 짓는 등 불사를 일삼는 것은 부처가 바라는 바가 아니며, 임금이 복을 닦아서 좋은 나라를 만들려면 백성 사랑하기를 어린 자식처럼 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애민의>, <방본잠>등의 유교적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애민적, 반전제적 입장과 동일한 기초 위에 있으며, 세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 역시 개재되었다고 볼 수 있음. -> 즉, 세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인해 사회적, 정치적, 인민적 맥락에서 불교를 새롭게 해석해 낼 수 있게 됨. <청한잡저 2>는 불교적 텍스트지만, 유교적 텍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애민적’ 입장이 보임. '''김시습의 애민적 입장이 그가 유교와 불교를 회통시키고, 유교와 불교 상호에 대한 심화된 이해와 성찰을 가능하게 한 근본'''이었음. ==== <자사진찬> ==== 충청도 홍산현 무량사에 거처할 때 작성한 글로, 자화상에 찬(贊)을 붙인 것. 김시습 스스로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세상에 남기는 말로 볼 수 있음. * 찬(贊): 인물을 찬양하는 운문체의 글. 문인들 중에는 자찬의 글을 남긴 사람들이 많음. 김시습의 이 글은 자찬(스스로를 찬미하다)한 글로만 보기는 어렵고, 김시습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대해 남긴 평가라고 보임. 따라서 이 자찬은 김시습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글이라 여겨짐. 이하(李賀)를 내려봤고 해동에서 뛰어났네 -> 이하는 당나라의 뛰어난 시인으로 7살에 지를 지은 것으로 유명, 자신은 5살에 지를 지었기 때문에 내려보았다 한 것. 자신의 시재(時才)에 대한 자부. 높은 명성과 부질없는 칭찬 높은 명성과 부질없는 칭찬 네게 어이 해당하리, 네 몸은 지극히 작고 네 말은 크게 어리석다. -> 자신에 대한 냉철한 직시이며, 약간의 자괴감이 느껴지기도 함. ‘어리석다’는 말은 타인의 시선이며, 이를 통해 김시습이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객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김시습은 세상과 어긋나는 삶을 살았고, 이는 타인의 시선에서 ‘어리석은’ 것,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뜻을 견지하고자 하였음. (구렁이라네) 너를 내버려야 할 곳은 구렁이라네. -> ‘구렁’의 원문은 구학(溝壑), 땅이 움푹 팬 곳을 말함. 기근이 들면 백성들의 시체가 나뒹굴곤 했음. 이는 맹자의 “지사불망재구학(志士不忘在溝壑: 지사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뜻을 지킴.)”에 근거를 두고 있는 말, 즉, '''김시습은 죽을 때까지 절의에 대한 태도를 견지하였음을 알 수 있음'''. 이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의 여성 주인공들이 죽음 앞에서 보여준 태도와 동일. <자사진찬>에 묘사된 김시습의 모습은 유교적 의미의 충신뿐만 아니라, 불의한 세계와 맞서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저항적 지식인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할 만함. * <자사진찬>은 <매월당집>의 표기와 무덤에 세워진 표석, 율곡 이이의 <김시습전>의 표기가 다른데, <매월당집>에는 ‘구학’이 丘(언덕 구)壑, 나머지에는 溝壑으로 표기됨. 丘壑으로 해석한다면 언덕과 골짜기라는 뜻이 되어, 그윽한 산수를 의미하게 됨. 이러한 글자 변경은 김시습의 불온성을 완화하거나 없애기 위해서라고 생각됨. * 또한, 김시습의 자화상 역시 왜곡이 가해졌는데, 목의 염주 목걸이가 사라진 것임.이는 김시습의 승려로서의 정체성을 지우고, 유자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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