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강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의 형성과 그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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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해 === 14세기 전반에 활동한 신흥사대부인 최해는 최치원의 후예인데, 아주 문제적인 인물임. 이제현, 민사평과도 친했지만 성격이 강직하여 벼슬 길이 순탄하지 못했고, 높은 벼슬도 하지 못했음. 성리학적 이념을 고수해 전투적인 자세를 취했고, 특히 불교 비판에 적극적이었음. 고려 때의 불교 사원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권문세족(역시 대토지 소유)과 연결되어 있었음. 이 때문에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로 전락하여 국가에서 세금을 걷을 수 없게 됨. -> 최해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비판한 이유,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인식했기 때문임. 이제현은 최해처럼 불교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온건적인 입장을 취했음. 최해는 선봉에서 불교를 거침없이 비판함. 이러한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음. 최해는 말년에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져 자신이 비판하던 불교 사찰이 소유한 전답의 소작인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다가 생을 마감하게 됨. 이러한 만년의 삶을 <예산은자전>이라는 자전에 담아 스스로의 삶을 조롱하였음. 원래 자서전은 대개 자신을 미화하는 글이라 사실을 확인하는 입장에서는 의심쩍은 글쓰기에 속함. 그러나 최해의 자전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 상황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됨. 냉철한 자기 성찰과 자신에 대한 철저한 객관적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규보 대와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유자가 문학사 속에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함. 최해는 <동인지문> 25권을 편찬하였음. <동인지문>이란 최치원 부터 고려 충렬왕 때까지의 우리나라 명현의 시문을 엮어 놓은 책. 시에 해당하는 ‘동인지문 오칠’, 문에 해당하는 ‘동인지문 천백’, 사륙변려문에 해당하는 ‘동인지문 사륙’ 셋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천백은 현전하지 않으나 오칠은 일부가 전하고 사륙은 전부가 현전하고 있음. 우리나라 최초의 시문 선집. 자국 한문학에 대한 주체적 인식의 결과물. 최해는 <졸고천백>이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일부만이 전해지고 있음. 말년에 너무 가난해 죽었을 때 집안에 장례 치를 돈이 없어 친구들이 부조금을 걷어 장례를 치러줬다는 대목이 고려사 열전 <최해전>에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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