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강 해동도가와 새로운 질서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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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이적> === 우리나라의 특이한 사적이라는 뜻으로 현종 7년(1666) 홍만종이 24세 때 쓴 책. 홍만종은 인조 21년(1643)에 태어나 영조 1년(1725)에 사망함. 홍만종은 젊을 적 몸이 좋지 않아 양생의 방도로 도가서를 읽다가 도가 사상에 경도되었음. 홍만종은 17세기 후반~18세기 초에 활동한 문인이지만, <해동이적>에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에 활동한 도인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음. 앞서 <해동전도록>, <청학집>을 쓴 한무외나 조여적과 달리 홍만종은 좋은 가문 출신임. 33세 때 진사시에 합격해 38세 때 부사정이 되었는데, 이 때 허견과 친했다는 이유로 허견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게 됨. 이 옥사는 노론이 조작한 사건. * 허견: 본관은 양천(陽川). 숙종대의 대신 허적(許積)의 서자이다. 교서관(校書館) 정자를 지냈다. 숙종 초년에 허적을 비롯한 남인세력이 도체부(都體府)를 복설시켜 병권을 장악하려고 하자 서인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때마침 그는 부친의 세력을 믿고 황해도에서 수천 그루의 재목을 도벌하여 집을 짓는다든가, 남의 처를 약탈하는 행위를 하여 비난을 받았는데,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인 복선군(福善君)과 내왕이 있음을 기화로 하여, 그가 역모를 꾀한다고 종척인 김석주(金錫胄) 등으로부터 고변당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4월 12일 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능지처참당하고 복선군 · 복창군(福昌君) · 복평군(福平君)과 허적을 비롯한 남인 실권자 등이 죽음을 당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후 남인이 세력을 잡자 이 사건이 무옥(誣獄)임을 주장하여 허적 등 처벌을 당한 자들이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버림.)되었으나, 허견과 복선군은 비록 목전에서 반역하지는 않았지만,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이유로 신원되지 않았다. 이 옥사로 인해 조정에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권력을 잡게 됨. 홍만종은 2년 뒤 유배에서 풀려나지만, 그 후 벼슬에 나가지 못하고 말단 벼슬만 잠시 했을 뿐, 사실상 포의로 지냈음. 그는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갈릴 때 소론의 편에 섰음. 홍만종은 17세기 전/중기에 활동한 저명한 문인인 정두경에게 수학하였음. <해동이적>의 서문은 정두경이 썼고, 발문은 송시열이 썼음. <해동이적>은 유교적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이단의 책이라 할 수 있는데, 아마 홍만종이 정두경의 제자이고, 당색이 같은 서인이라 본인이 엄격한 성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발문을 써준 것으로 보임. <해동이적>에는 우리나라의 선인 38명이 소개되고 있음. 제일 처음 나오는 것이 단군이고, 마지막에 나오는 인물이 곽재우임. <해동전도록''>, <''청학집''>''이 설화집에 가깝다면, <해동이적>은 우리나라 선인들의 전기집에 해당함. -> 우리나라 최초의 도가 전기집. 보통의 전기와 다르게, <해동이적>은 전기집임에도 모두 설화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함. 설화를 전기로 변모시킴을 통해 홍만종이 신비하고 비합리적인 도가류의 설화를 ‘역사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유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행위는 이단에 탐닉하는 일로 치부될 수 있으나, 홍만종은 유교적 관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책을 쓸 수 있었다고 여겨짐. 문학사의 긴 흐름에서 본다면 홍만종의 <해동이적>이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 1. 두 글 모두 도가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삼고 있음. 2. 도가류의 설화를 역사화하고 있음. <해동이적>의 서술을 보면, 단군 -> 혁거세 -> 동명왕 -> 사선(영랑을 위시한 술랑, 남랑, 안상 등 네 명의 국선)의 행적이 서술되어 있음. 이어서 옥보고(<청학집>에는 보덕의 분파로 서술되고 있는데, <해동이적>에는 보덕이 언급되지 않음.), 대세, 구칠, 김가기, 최치원, 권진인, 김시습, 홍우손, 정희량, 서경덕, 정렴의 행적이 서술되고 있음. 이어서 <해동전도록>과 <청학집>에는 언급되지 않은 전우치, 남궁두, 유형진, 장한웅, 장생 등이 서술되어 있음. 허균은 남궁두를 주인공으로 한 <남궁선생전> 뿐 아니라 장한웅과 장생의 전기인 <장산인전>, <장생전>을 쓰기도 했고, 유형진의 사적을 기록한 <유형진 유사>를 썼음. 홍만종은 허균의 이 글들을 토대로 남궁두, 유형진, 장한웅, 장생의 행적을 서술하였음. (주로 16세기 후반에 활동한 인물들) / 전우치는 16세기 전기에 활동한 술사로 알려져 있음. <해동이적>은 <해동전도록>과 <청학집>을 아우르면서도, 몇몇 새로운 인물을 추가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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