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강 김려와 이옥, 근대의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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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이천 비어 사건 === 강이천 비어 사건은 김려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임. 강이천 비어 사건은 강이천이 퍼뜨린 유언비어 사건이라는 뜻. 강이천은 탈놀이에 관한 시 <남성관희자>를 쓰기도 하였고, 표암 강세황의 손자임. 강세황은 정조로부터 융성한 대접을 받았었음. 이 집안의 당색은 소북. 강이천의 문집인 <중암고>가 현전하는데, 참신한 글들이 더러 보임. 이를 통해 강이천이 사고가 참신하고 문학적 역량이 있는 문인이었음을 알 수 있음. 강이천은 정조 10년 20살 때 진사가 되었고, 11년 후인 정조 21년 강이천 비어 사건이 터지게 됨. 강이천은 김건순 및 김건순의 친적인 김이백, 김려 등과 어울려 천주교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서해의 어떤 섬에 진인이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죄목으로 형조에서 심문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됨. 이때 김이백은 흑산도로, 김려는 부령으로 유배를 갔음. 김건순은 대단한 벌열가의 종손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책없이 방면됨. (이것은 후일 문제가 된다.) 강이천은 서해의 어떤 섬에 진인이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이는 <정감록>과 관련이 있음. 즉, 강이천 비어 사건은 천주교와 <정감록>이 결합된 사건. 그런데 사건의 심각성에 비해 경미하게 처벌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벽파쪽에서는 계속해서 재조사를 요구하였음. 정조는 천주교 문제를 크게 확대시키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를 계속 묵살함. (남인세력에 천주교와 연관된 사람이 많아서 남인과 노론의 균형을 위해서는 문제 삼기 어려웠음. -> 따라서 정조는 천주교 탄압보다는 주자학의 강조로 천주교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함.) 하지만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벽파가 권력을 잡고 신유옥사를 일으켰고, 강이천 비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다시 붙잡혀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게 됨. 이때 김건순은 참수형을 당했고, 강이천과 김이백도 처형되게 됨. 김건순은 정약종과 함께 사대부 가운데 쌍벽을 이루던 천주교 지도자이자 이론가였음. 또 노론쪽 인물이었고 박지원이 인정할 만큼 비상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음. 노론의 비상한 인물이 천주교를 믿은 것은 이례적인 일. 이 사건에 이옥은 연루되지 않았으나 강이천과 소북으로 당색이 같았기 때문에 교유가 있었음. 김려는 이 때 진해로 유배가게 됨. 1797년 강이천 비어 사건이 논의 중일 때 정조가 했던 말을 보면, “저 이른바 김려 형제는 또한 본디 소품을 하는 사람들로 일컬어진다.” – 승정원일기 1797년 11월 11일 기사 —>소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나타남. “강가의 문체를 보면 초쇄부경하니 전적으로 소품이다.” ->강가는 강이천, 초쇄나 부화경박은 소품을 비난할 때 쓰이던 말. 이를 통해 강이천도 소품에 경도되었음을 알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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