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강 건국신화와 광개토왕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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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 전승과 고려시대 문헌> ==== 단군 전승을 수록한 고려 시대의 중요한 문헌은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있다. 두 문헌에는 내용 차이가 있으나(삼국유사의 서사가 조금 더 자세함), 단군이라는 인물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함. ‘단군’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고, 짤막한 언급에 그치고 있기는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 21년조에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거주지다.”라는 대목이 나옴. 이를 통해 김부식의 시대에도 ‘단군’ 전승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음. <삼국사기>: 12세기 중반 (1145) 편찬 <삼국유사>: 13세기 중반 (1281) 편찬 <제왕운기>: 13세기 중반 (1287) 편찬 일연은 단군이 고조선의 시조이며 자국 역사가 고조선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음. 일연은 무신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원간섭기에 활동한 인물임. <삼국유사>의 편찬에는 고려의 국가적 위기가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음, 따라서 일연은 단군 신화를 적극 긍정함으로써 민족적 긍지를 선양하고자 한 것으로 보임. 이승휴 역시 단군이 동국(東國)에서 최초로 나라를 세워 세상을 연 군왕이라고 언급함. 이승휴는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층에 속하는 인물인데, 이 시기 신흥사대부층은 민족의식이 강한 편, 우리나라와 중국은 독자적인 나라라는 의식과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주적인 의식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음. 이승휴는 단군을 통해 공동체의 통합을 꾀할 수 있으며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각적으로 단군을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측. 이승휴가 일연보다 좀 더 명시적으로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내세우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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