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강 탈놀이와 민족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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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탈놀이의 발생과 성행 배경 === 본산대놀이와 그 계통의 탈놀이는 모두 도시 탈놀이라고 할 수 있음. 본산대놀이는 대체로 18세기 중엽 전후에 성립되었고, 별산대놀이는 19세기 초중엽에 성립된 것으로 보임. <봉산탈춤> 등의 해서탈춤, <동래야류>등의 야류, <통영오광대> 등의 오광대는 정확한 발생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19세기에 성립되었을 것. 본산대놀이의 명칭에 존재하는 ‘산대’는 연회하기 위하여 목재로 산 모양으로 만든 대를 말함. ‘오산’이라고도 함. (오산: 신선이 사는 산. 봉래산) 산대는 봉래산처럼 꾸몄고, 여러 잡상과 인물상이 설치되었음. 산대 아래에서 가무잡희를 벌였는데 이를 산대희라고 함. 산대희에는 땅재주, 솟대타기, 무동, 접시돌리기, 불 토해내기 등 다양한 놀이가 있었고 인형극과 탈춤도 포함되어 있었음. 산대희는 나례희(잡귀를 쫓는 의식. <처용무>, 방울 받기, 줄타기, 솟대 타기등이 연행됨.)와 연결되어 ‘산대나례’로 불렸음. 조선에는 나례도감이라는 기구를 두고 ‘산대나례’를 관장하였음. 중국에서 산대는 중국 한나라 때 처음 제작되었으며 청나라 때까지 전통이 이어졌음. 우리나라에서 산대라는 명칭이 쓰인 것은 고려때부터. ‘산대색‘이라는 산대 일을 관장하는 관서가 있었음. 조선 시대에는 중국 사신이 올 때 ’산대도감‘이라는 기구를 임시로 두어 산대의 제작과 놀이를 준비하게 함. 산대도감은 의금부와 군기시가 분담해서 관장함. 광해군 때의 기사를 보면 의금부가 전란 후 나라 형편이 어려우니 산대를 실행하지 말자고 함. -> 산대희를 벌이는 것에 국가의 재정 지출이 많았음을 알 수 있음. 이후 인조는 나례도감을 혁파하고 중국 사신이 올 때만 작은 규모로 설치하도록 함. 인조 이후로 국가적 행사로서의 나례희는 쇠퇴하였고, 영.정조 때는 폐지됨. 조선 때는 왕실이나 국가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서울에 일정한 수의 창우를 거주시킴. 창우는 천민신분이었고 서울에 거주하는 창우는 경중우인이라고 부름. 도성에서 산대희를 벌일 때면 경중우인으로는 부족하여 외방재인(지방에 거주하는 창우)를 불러야 했음. 산대희가 끝나면 외방재인은 다시 지방으로 돌아감. =>즉, 산대는 원래 왕실과 국가의 필요에 따라 설치된 공연 무대였음. 그러나 산대나례의 침체 이후 경중우인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음. 경중우인을 구성하는 집단 중 하나인 반인(泮人: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들이 본산대놀이를 창조함. 구파발(녹번리)는 나례도감에 예속되었던 우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곳인데, 18세기 영조 때 산대희가 폐지되자 서울의 하층 주민을 대상으로 새로운 놀이를 창조한 것으로 보임. (최초로 본산대놀이가 연회된 곳이 구파발로 추정됨.) <구파발본산대놀이>. 이후 구파발의 일부 우인들이 애오개로 옮겨갔고, <애오개본산대놀이>가 연행됨. 본산대놀이는 서울의 이곳저곳으로 확산되어 <노량진본산대놀이>, <사직골본산대놀이>, <만리재본산대놀이>가 생겨남. (강이찬이 1779년 구경한 것은 <만리재본산대놀이>였을 것으로 추정됨) 본산대놀이가 성행하며 서울 밖 양주와 송파에 별산대놀이가 생김. 황해도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봉산탈춤>, <강령탈춤>과 같은 해서탈춤을 성행시킴. 해서탈춤은 20세기 초까지 봉산, 서흥, 은율, 해주, 강령 등 각지에 전승됨. 경남 지방에서는 야류와 오광대를 성립시키기도 함. 야류(들놀이)는 동래, 수영, 부산진 등에 전래되었고 오광대(다섯 광대 놀이)는 서부경남에 전승됨. 야류와 오광대에는 본산대 놀이에 없는 과장이 있고, 본산대놀이에 있는 과장도 변이가 많은 것으로 보아 19세기 중후반 늦은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보임. 본산대놀이는 상업이 발달한 곳에서 연행되었음. 가장 유명한 <애오개본산대놀이>가 연행된 애오개 주변에는 당시 서울 3대 시장 중 하나인 칠패가 있었음. 본산대놀이 계통의 탈놀이들도 역시 장시가 번성하고 상업이 발달한 곳에서 연행됨. =>이를 통해 본산대놀이가 18세기 서울의 상업적 번성을 배경으로 성립되었고 계통의 탈놀이 역시 상업을 배경으로 성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음. 박제가의 <성시전도>에는 “홀연 천천히 큰 길을 지나면 (…) 사고팔기 끝나 연희 벌이기를 청하니 / 창우의 복장 놀랍고도 괴이하네.” 라는 구절이 있음. 한양의 시장 풍경을 묘사한 것인데, 장이 파하자 연희를 벌였다는 것이 주목됨. 탈놀이가 공연되면 시장에 사람을 불러들일 수 있어 상인들이 연희를 지원하였음. 본산대놀이는 18세기 산대나례희의 폐지로 인해 경중우인(반인)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과정에서 성립되었고, 서울 시정 상업의 발달이 이를 뒷받침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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