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강 생사를 건 인정투쟁―이언진의 등장과 『호동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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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동거실>의 세계 === <호동거실>의 내용적 특징 1. 호동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 <nowiki>:</nowiki> 호동은 사회적 약자들이 모여사는 공간. 시인은 서민들의 삶을 냉철히 직시하면서도 동시에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음. -> 이러한 점에서 <호동거실>은 호동 거주 서민들의 ‘열전’으로서의 기능을 함. 2. 지배층 양반 사대부에 대한 비판과 야유 <nowiki>:</nowiki> 이언진은 비주류, 주변의 인간으로서 사대부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인물. 사대부는 무능해도 부귀하지만, 하층 신분은 유능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차단되는 조선의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를 가지고 있었음. 3. 시인 자신의 초상을 다양하게 그려냄. <nowiki>:</nowiki> <호동거실>에서 나타나는 자신의 초상은 슬프고 어두우며 고통스럽기도 함. 시인은 자기 서사를 통해 스스로를 응시하거나 위로함. 4.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 및 신분제에 대한 전면적 부정 <nowiki>:</nowiki> 이언진은 사회적 차별과 억압이 주자학에서 기인한다고 보았음. 그래서 주자학 대신 이단으로 취급되던 ‘양명학’을 긍정하였음. 양명학 중에서도 민중적 지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이탁오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에 <호동거실>에서는 여항의 모든 사람들을 ‘성현’이라고 함. “길에 가득한 사람들 그 모두 성현 / 배고파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도 / 양지와 양능을 지니고 있음을 / 맹자가 말했고 나 또한 말하네.” => ‘양지‘, ’양능‘은 인간이 본래 타고나는 도덕적 감정. 양명학에서는 이를 누구든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 성현이 될 수 있다고 여김. => 이언진은 주자학을 양명학으로 대체함으로써 신분제가 철폐된 평등한 세계를 꿈꾼 것이라고 할 수 있음. 5. 유불도 삼교를 인정함으로써 다원적 사고를 모색함. <nowiki>:</nowiki> <호동거실>에서는 양명학(유교), 불교, 도교가 나란히 긍정되고 있음. -> 삼교의 공존과 회통을 통해 진리가 추구될 수 있다고 보았고, 삼교를 모두 진리로 인정함으로써 차별적 사회가 아닌 평등하고 다원적인 사회를 모색함. -> 주자학 만이 배타적인 진리라는 사고를 부정하고 진리를 새롭게 구성한 것. 이러한 사고는 홍대용의 공관병수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어진은 ‘신분제의 철폐‘를 주장하기 위해 진리의 다원성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 할 수 있음. (이어진의 진리의 다원성은 ’신분제‘의 이데올로기적 근거인 주자학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 <호동거실>은 밝은 정조와 어두운 정조가 공존하여 나타남. 밝은 정조는 골목길의 사람들을 읊을 때 주로 나타나고, 자신의 불우한 삶과 병고를 읊을 때는 어두운 정조가 나타남. -> 이언진은 호동의 서민들에게서 활기와 희망을 발견한 것으로 보임. <호동거실> 중 노동하는 서민에 대한 부분 “기와 쌓고 토담을 쳤거늘 / 비가 와도 안 무너지겠네. / 저물어 집에 와 옷을 터나니 / 먼지 속에 하나의 도를 행했군.” => 하층민에게 ‘도를 행했다.‘라고 말한 부분이 특이함. (<호동거실>의 다른 시에서도 “도는 행상과 거간꾼에게 있다.”고 말하기도 함.) -> 이언진의 비사대부적 사고가 드러남. (사대부인 박지원은 <예덕선생전>에서 엄향수를 고결한 인간을 찬미하지만 그의 노동을 도라고 여기지는 않았음. 박지원에게 도는 사대부의 것. 노동을 도로 여기는 이언진과는 대비되는 인식) 또한 <호동거실>은 고통에 대한 높은 감수성을 보여줌. “관아에서 매 맞고 곤장 맞는 이 / 부모 형제와 같지 않은가. / 자기는 제 팔에 옴이 오르면 / 의원 불러 고약 달라 약 달라 하면서.” =>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을 일체로 여기는 감수성이 드러남. 이는 생의 고통을 겪어 본 시인의 존재 여건과 관련되는 공감의식이라 할 수 있음. 박지원은 이언진의 시에 슬픔이 많다고 평했는데, 이언진의 시에는 슬픔뿐 아니라 다양한 자태와 면모가 나타남. 1. 풍자와 비판 <nowiki>:</nowiki>“원수는 천 명, 지기는 하나 / 사람 아니라 모두 동물에 있지 / 열전 지어 물고기와 새 찬미하고 / 하늘에 제 올려 교룡과 이 저주하노라.“ -> ‘원수‘는 지배층에 속한 사람, ’지기‘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용휴)를 말함. 제2수에서 모두 동물에 있다하는 것은 방어막으로 여겨지고, 제3수에서 ’열전‘을 말하는 것은 <호동거실>의 성격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것. 시의 ‘물고기‘, ’새‘는 호동의 하층민들을 말하고, 교룡은 군주, 이는 관리를 의미함. -> 다양한 은유를 쓰고 있는 것은 조선의 지배구조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 수탈 구조를 비판하며 하층민을 옹호하고 있는 것. 즉, 이언진의 저항적 자세를 보여주는 것. 2. 해학 <nowiki>:</nowiki> <호동거실>은 유쾌하거나 장난스러운 어조가 나타남. 해학은 하나의 미학적 태도. 이언진은 시 쓰는 것을 ‘유희’로 생각했는데, <호동거실>에서 발견되는 해학성은 이러한 문학적 입장과 관련이 있음. -> 이언진에게 유희란 차별받고 소외된 자가 온갖 금기를 깨부수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 이언진은 <호동거실>에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주목되는 것은 시인이 이들과 같은 위치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 ‘나’와 사회적 약자들을 일체화. 따라서 <호동거실>은 시인과 하층민의 강한 연대를 보여주게 됨. 이러한 집단적 연대감 위에서 당대 지배층과 주류 사회가 비판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체제와 이념이 근본부터 부정되고 있는 것. -> 어떠한 경계도 인정하지 않는 혁명적이고 래디컬한 글쓰기. 조선시대 문학을 통틀어 <호동거실>에만 존재함. 이언진은 <호동거실>에서 자신을 ‘골목길 부처’라고 선언하는데, 이는 ‘골목길의 그 누구도 부처일 수 있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음. 골목길에 사는 비천한 인간도 모두 양지를 가진 똑같은 인간이므로 차별해서는 안된다. -> 즉, 인간의 평등성과 주체성을 선언한 말. ==== * 스승 이용휴 ==== 이용휴는 남인계 문인으로 성호 이익의 조카. 18세기 남인을 대표하는 거물급 문인. 정약용은 이용휴에 대해 ‘포의 신분이지만 30년 동안 조선의 문단을 좌지우지했다.’고 평하기도 함. 이언진은 자부심이 높아 남을 잘 인정하지 않았지만 스승에게는 각별한 존경의 뜻을 표했음. 두 사람은 사제로서 그 존재관련이 깊고 각별한 사이였음. 이용휴는 문학에서 독창성을 가장 중요시했으며, 양명학 좌파인 이탁오의 사상을 수용하였음. 또한 서얼이나 불우한 중인층 문인들을 각별히 여기기도 함. -> 이언진은 이러한 스승의 영향을 받아 주체성과 인간의 사회적 평등성에 대한 자각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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