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강 추방된 자의 글쓰기-정약용과 이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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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학규의 생애 === 이학규는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가는 사대문 밖 반송방에 있었음. 정약용, 이가환과 친인척 관계. 호는 낙하생(落下生)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뜻. -> 유배지 김해에서 사용한 호. 김해에 있지만 서울 사람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 이학규가 태어나기 전에 부친이 사망하여 집안이 넉넉치 못했고, 외가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게 됨. -> 이용휴가 외조부이고, 이가환이 외숙. 이가환은 정조 때 남인의 지도자격인 인물이었으며,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다가 배교하였지만,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도로 몰려 고문을 받고 사망하게 됨. 이학규는 이용휴에게 글을 배웠는데, 이용휴가 성호 이익의 조카이므로 성호 학통에 속한 학문을 배움. 정조 19년인 26살 때 포의의 신분은 규장각에서 <규장전운>의 교열 작업을 함. -> 포의 신분이지만 정조에게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교열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음. * <규장전운>: 동음(東音 : 朝鮮의 漢字音)과 화음(華音 : 中國의 本土字音)을 함께 표시한 운서로, 이덕무가 1792년(정조 16)까지 주로 편찬하고, 윤행임(尹行恁)·서영보(徐榮輔)·남공철(南公轍)·이서구(李書九)·이가환(李家煥)·성대중(成大中)·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이 교정한 다음, 1796년에 간행하였다. 그 뒤 방각본(坊刻本)으로도 많이 인행되어 이본이 많다. 그러나 정조가 급사하고 1801년에 신유옥사가 일어났고, 친인척인 이가환, 이승훈에 의해 연루되어 그해 2월에 의금부에 구금됨. 그리고 4월에 능주로 귀양을 가게 되고, 10월에 내종제인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터지자 다시 서울로 붙잡혀와 투옥되었다가 김해로 유배됨. 이때부터 1824년까지 23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됨. 이후 54살인 1824년 4월, 장남이 의금부에 소청하여 유배에서 풀려나게 됨. 서울에 올라와 정약용과 자하 신위를 방문해 서로 시를 수창하였음. 정약용은 귀양에서 돌아온 뒤 다시 강진에 돌아가지 않았지만 이학규는 유배에서 풀려난 그 해 가을 다시 김해로 돌아갔음. 이후 둘째 아들과 5, 6년 정도 김해에서 우거하다가, 1831년 경 충주 근처로 이거하였음. 그러나 이거한 뒤에도 김해에 자주 왕래함. 그리고 1833년 초가을에 정약용을 죽기 전 마지막으로 방문한 뒤 2년 후 충주 근처에서 생을 마감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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