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고려 전기의 토풍과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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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화사비 음기 – 향가와 한시의 창작 양상] === 성종 다음 왕인 현종 대에는 다시 팔관회가 개최됨. 현종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현화사비(玄化寺碑)’라는 비석임. 현종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화사를 짓고, 이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음. 절이 완공된 것은 1021년인데, 이 비석에 음기(陰記)를 새긴 것은 1022년임. * 음기: 비석 뒷면의 글, 현화사비 음기는 채충순이 짓고 씀. 현화사비 음기를 보면 현종은 신하들을 현화사로 데리고 가 자신이 먼저 한시 한 수를 짓고 신하들도 각각 한시를 한 수씩 지으라고 하였음. 그리고 지은 한시들을 판자에 새겨 절에 걸었음, 이후에 “방언과 풍속은 비록 중국과 같지 않지만, (…) 그래서 <시경>에서 “차탄하는 것으로 부족하므로 노래를 부르며, 노래하는 것으로 부족하므로 춤을 춘다.”고 한 것이다. 향풍체에 의거한 노래를 짓고, 신하들에게 절의 개창을 경축하는 시뇌가를 지어 바치라고 했는데, (…) 판자에 그것을 써서 법당의 밖에 걸어, 이 절에 놀러 온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 익힌 바에 따라 그 맑은 정취의 뜻을 알게 했다.”라는 진술이 등장한다. ‘방언’은 우리 말을 가리키고, ‘차탄한다’는 것은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시경>의 이 어구를 가져온 것은 향가 창작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임. 현종과 신하들이 한 수씩 한시를 지었으나 흥취를 제대로 풀 수 없었기 때문에 ‘향가’를 지었던 것. 마지막의 “판자에 그것을 써서 법당의 밖에 걸어, 이 절에 놀러 온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 익힌 바에 따라 그 맑은 정취의 뜻을 알게 했다”라는 말은 한시와 향가를 판자에 적어 절에 거니, 향가를 익힌 사람은 향가를 감상하고, 한시를 익힌 사람은 한시를 감상하라는 뜻임. 이를 통해 11세기 초엽에도 여전히 향가를 짓거나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알려줌. -> '''현화사비 음기는 11세기 초 현종조 때의 문학에서 화풍이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지 않았으며, 토풍과 화풍이 병존하고 있었음을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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