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강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의 형성과 그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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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의 성립 ===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에 의해 시조라는 장르가 처음 생겨났음. ‘시조’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확인되기로는 18세기 영조때의 문인인 석북 신광수가 지은 <관서악부>에 ‘시절 가조’(당시 유행한 노래)라는 명칭으로 처음 보임. 이를 통해 시조가 원래 음악 곡조의 명칭임을 알 수 있음. 고려 말에 ‘시조’라는 명칭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고, 이러한 노래를 어떻게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신흥사대부들에게는 ‘단가’라는 형식적 자각이 뚜렷하게 존재했던 것으로 보임. 이색은 <백설이 잦아진 골에~>라는 단가를 지어 고려에 대한 충절을 보여줌. 역사 앞에 선 이색의 실존을 드러내고 있음.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를 통해 자신의 절개를 읊음 길재는 고려가 망한 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를 지어 회고의 정을 읊었음. ->발생기의 시조는 경기체가가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심회를 극히 절제된 형식으로 읊고 있음. <한림별곡>이 사대부의 풍류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에 반해 시조는 사대부의 단아하고 절제된 미감을 보여줌. {| class="wikitable" |경기체가 |시조 |- |미의식이 산문적이고 한문적, 즉물적임 |보다 시적이고 국어적이고, 즉정적 |- |바깥을 향한 흥취 발산 |절제된 방식을 통해 자아의 내면 정시 |} è 미적 지향이 크게 다름. 신흥사대부들은 내면의 절실한 감정을 담아내는 노래 형식이 필요해 시조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임. 또한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는 ‘절제미‘를 표현하기에도 시조가 더욱 적합했음. 시조의 성립은 여말선초라는 역사 전환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 발생기의 시조들은 ‘역사 앞‘에 선 인간의 내면은 진지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음. 짧은 형식에 이러한 내면성을 구현한 문학의 출현은 우리 문학사 초유의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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