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강 탈중화주의와 새로운 세계관의 정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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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성의 답장 ==== 홍대용은 항주의 선비 중 엄성과 가장 가까웠음. 엄성이 홍대용의 편지를 받은 것은 1767년 가을이었고, 답장을 써서 홍대용에게 보냄. 홍대용은 이 답장을 엄성이 말라리아로 죽은 뒤 1768년 부친상 중에 받게 됨. 엄성의 편지 역시 매우 긴데, 이 편지는 홍대용의 사상적 모색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음, 그러나 엄성의 편지만으로 홍대용이 이전과 전혀 다른 사상을 전개하게 되었다는 ‘외인설’은 타당하지 못함. 사상 주체의 내적 요구와 궁리, 그에 따른 결단이라는 측면을 무시하거나 배제할 수 있기 때문임. 홍대용의 사상에서 ‘외인설’을 제기한 것은 일본학자가 처음. 국내 학자 중에도 이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음. 엄성은 이 편지에서 ‘당신은 너무 성인의 도에 구애된 것이 병폐다. 그래서 구애된 생각을 조금 깨뜨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함. 엄성이 말한 ‘성인의 도’는 좁게 보면 주자학을, 넓게 보면 유교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음. 엄성은 구체적으로 홍대용에게 ‘당신은 사장(詞章, 시문을 짓는 일)이라든지 훈고(訓告, 경전에 주석을 붙이는 것)라든지 기송(記誦, 경전의 자구를 외는 일)이라든지 이런 것은 모두 도에 해롭다고 여긴다’고 말함. 당시 편지에서 홍대용은 사장과 훈고와 기송의 학문은 모두 해롭다고 말했음. -> 경전의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는 행위가 학문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며 의리의 학문을 강조한 것. 유학의 유파 중에서도 주자학이 특히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강조함, 주자학에서는 경전의 특정 구절의 올바른 의미만을 ‘의리’라고 하지 않고, 정학과 이단을 엄격하게 강조하는 태도 역시 ‘의리’로 칭하는데, 정학은 주자학, 이단은 이외의 학문을 가리킴. 즉, 주자학의 ‘의리’는 편벽되고 배타적인 면모가 있음. 그러나 홍대용이 말하는 ‘의리’는 주자학적 맥락이 아니라 주자학을 벗어난 맥락에서도 유효할 수 있다는 점이 주목됨. 홍대용의 <의산문답>의 기저에는 주자학을 벗어난,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정신의 ‘의리’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저술에서 사장이나 훈고, 기송에 힘쓴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물과 세계의 의미를 창조적 사유 행위로 새롭게 해석해 나가고 있기 때문. -> 즉, 주자학적 맥락의 ‘의리’는 아니지만 또 다른 맥락의 의리를 중시하는 학문관의 소산이라 할 수 있음. 엄성은 학문은 ‘의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홍대용의 생각에 반박하며 ‘사장, 훈고, 기송이 꼭 도에 해롭다고만 할 수 있느냐’며 훈고를 적극적으로 옹호함. -> 이는 한학(漢學)에 대한 옹호라고 할 수 있음. 한학은 고증학과 통하고, 당시 청 학계는 고증학이 지배적인 추세였음. 또 엄성은 항주의 선비였는데, 이 곳은 양명학의 자장이 강한 곳이었음. 따라서 엄성은 양명학도이면서 고증학에 침윤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음. 고증학은 ‘박학’을 중시하지만, 주자학은 고증학만큼의 박학을 추구하지는 않음. 엄성은 편지에서 주자학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음. 홍대용이 지나치게 성인의 도에 구애된다고 한 엄성의 말은 노장, 불교 등의 이단에 너무 교조적인 생각을 취하지 말고 열린 생각으로 바라보라는 의미, 그러나 양명학에도 적용되는 말이었음. 엄성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의 학자들은 불교, 노장, 양명학 등의 여러 사상을 희통하는 경향이 있었고, 엄성은 그래서 홍대용에게 ‘열린 관점에서 학문을 바라보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할 수 있었던 것. 엄성이 이러한 충고를 한 것은 홍대용이 학문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 ‘발난’이 있었기에 답변이 있는 것. -> 주체의 내적 요구에 주목해야 함. 홍대용은 이 편지를 통해 내적 계기와 외적 계기를 결합시켰다고 여겨짐. 이후 홍대용의 생각이 변하게 됨. 다만 편지를 받고 바로 그의 생각이 변화한 것은 아니고, 편지를 받은 뒤 이를 계기로 홍대용의 사상적 모색이 있었을 것으로 보임. 이후 홍대용이 ‘공관병수(公觀併受, 공정하게 여러 사상을 살펴 그 장점을 두루 받아들인다.)’라는 자신의 학문 방법론은 정립한 것은 1770년대에 와서 임. 편지 이외에 또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김종후와의 논쟁. 홍대용이 사상주체의 입장에서 엄성의 견해 중 무엇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는 중요함. 엄성은 한학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지만, 홍대용은 훈고 위주의 고증학은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음. 또, 엄성의 편지에는 중화주의나 화이론에 대한 문제의식은 보이지 않지만(홍대용이 묻지 않았기 때문에), 홍대용의 만년(晩年) 사상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의산문답>에는 ‘인물균(人物均)’이라는 세계관이 구축되어 있고, 화이론에 대한 문제 의식이 담겨 있음. -> 이는 홍대용 스스로의 주체적 사고에 따른 전개라 할 수 있음. 또 엄성은 ‘공관병수’와 같은 개념은 말한 바 없지만, 홍대용은 주체 사유의 결과로 이러한 개념을 만들어 냈음. -> 엄성이 홍대용에게 ‘아단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가질 것’을 충고하였지만, 이를 새로운 자극을 넘어 홍대용의 사유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됨. 엄성이 사유하지 못하고 있는 곳을 홍대용이 사유하고 있기 때문. -> Ex) 엄성은 묵자(墨子, 겸애설)나 서학(西學), 양주(楊朱, 爲我說: 나를 위주로 한 사상)는 말하지 않았는데, 홍대용은 공관병수에 의거해 이들을 자신의 사유 속에 포섭하였음. (유학자들은 이단 가운데 묵자와 양주를 가장 혹독하게 비난하였음. ) 홍대용은 엄성과의 지적 교류를 통해 정통과 이단에 대한 엄격한 구분을 해체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 것. 그러나 엄성의 영향으로 홍대용의 후기 사상이 결정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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