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강 조선의 문호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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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슬살이 ==== 박지원은 1786년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이라는 말단 벼슬에 제수됨. 박지원의 첫 벼슬. 음직: 고려시대 공신(功臣)과 5품 이상의 고급관료 자제들에게 부조(父祖)의 문음(門蔭)으로 주어진 관직. 6년 뒤 56세에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제수됨. 안의 현감에 부임한 지 1년 뒤 자신을 따르던 남공철에게 편지를 받게 되는데, 편지에는 정조의 분부가 언급되어 있었음. 정조는 문풍이 이와 같이 된 것이 박지원의 죄라고 하면서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인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다고 지적함. 이런 불순하고 잡된 글을 쓰지 말고 순수하고 바른 고문으로 글을 지어서 바치면 용서하고 문임의 벼슬을 줄 수도 있다고 하였음. -> ‘문임(文任)’은 임금의 교령이나 외교문서의 작성을 담당하는 직책. 문과 급제자만이 할 수 있는 벼슬. 문과 급제자가 아닌 박지원에게 이 직책을 내리겠다고 한 것은 이례적인 발언이라 할 수 있음. 정조는 이 무렵 문체반정(文體反正, 문체를 도로 바로 잡는다.)을 표방하였음. 정조는 조선 사대부들이 명말청초 패사소품의 영향을 받아 경박하고 방정하지 못한 글을 쓰는데, 이러한 경향을 주자학의 이념에 충실한 글인 고문(古文)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고 믿음. -> 이는 ‘주자학’으로 조선의 질서와 사대부의 정신을 바로 잡으려는 목표. 따라서 문체반정은 일종의 사상 통제 성격을 가짐. 정조가 박지원을 대상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음. 당시 천주교가 정치적 문제로 대두되었는데, 남인 가운데 천주교 신자가 많았음. 노론은 이를 이용해 남인을 공격했음. 노론의 세력이 커지자 정조는 노론, 남인, 소론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남인을 보호하기 위해) 문체반정을 활용한 것. -> 정조는 문체반정을 통해 주로 노론 인사를 공격함. 정조는 문체반정 때 박지원을 문책하기는 했으나, 직접 <열하일기>를 읽고 그의 문재(文才)를 좋게 생각한 것으로 보임. 그래서 박지원은 물론이고 그의 문객들도 정조의 속내를 알아차려서 분부에 매우 기뻐했다고 함. -> 정조와 박지원의 관계는 죽을 때까지 매우 좋았음. 박지원은 61세(1797년)때 충청도 면천 군수에 제수 됨. 그리고 1800년 정조 승하 후 두달 뒤인 8월에 강원도 양양 부사에 제수되나 이듬해 봄에 노병(老病)을 칭탁해 사직함. 이후 1805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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