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강 야담의 성행과 『청구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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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담사와 <청구야담> === ==== 최초의 야담집 <어우야담> ==== <nowiki>:</nowiki> 야담만이 아니라 작자의 신변사나 논설따위로 실림 -> 따라서 본격적인 야담집이라고 하기는 어려움. <어우야담>의 이러한 면모는 야담이 필기류로부터 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하고, <어우야담>이 필기의 특징이 남아 있는 과도기적 작품임을 보여줌. * 필기: 사대부 문인이 자신의 관심사, 자기 신변의 일들, 견문한 내용이나 독후감, 단상, 학문적 논변 등을 자유로운 필치로 기록해 놓은 글. -> 사대부의 생활상의 요구와 밀착된 글쓰기. 즉, 18~19세기의 야담집은 필기류에 포함되어 있던 전설, 일화, 소설 등의 서사 장르를 독립시킨 것임. <어우야담>에 실린 서사물 대부분은 일화와 전설이고, 소설은 많지 않음. 작자가 견문한 사실의 골격만 짧막하게 전달하여 길이가 짧고 풍부한 서사를 보여주지는 못함. 그에 반해 <청구야담>에 실린 전설이나 일화는 비교적 풍부한 서사를 펼쳐 편폭이 보다 길어짐. ==== 임방의 <천예록> ==== <nowiki>:</nowiki> 18세기 초 저술됨. ‘천예’는 <장자>에 나오는 언어로, ‘신비한 일’을 나타냄. 즉, 천예록은 신비한 일에 대한 기록. <천예록>은 <어우야담>과 달리 필기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문학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야담집에 해당함. 이름에 걸맞게 도가적 지향을 갖는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있어 황당무계하고 환상적인 성격의 이야기들이 많이 보임. ==== 18세기의 야담들 ==== 18세기의 야담 작가로는 임방, 임매, 안석경, 노명흠, 신돈복 등이 있는데, 이들은 벼슬을 하지 못했거나 했더라도 말직의 벼슬을 했을 뿐임. 임매는 임방의 손자로, <잡기고담>이라는 야담집을 저술하기도 함. ‘옛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는 뜻. 노명흠은 <동패낙송>(동국의 패설을 줄줄외다)를 저술함. 형편이 공궁해 홍봉한의 집 숙사 노릇을 했는데, 이때 저술한 것으로 보임. 100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제목은 붙어 있지 않음. <동패낙송>의 이야기 중 <치산업허중자성부>는 <청구야담>에도 실려 있음. (문장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음.) 안석경은 1770년대 초반에 <삽교만록>이라는 필기서를 저술하고, 신돈복은 18세기 후반, 자신의 만년에 <학산한언>이라는 필기서를 저술함. -> 이 두 필기서에도 여러 편의 야담이 실려있는데, 제목은 없음. <청구야담>에 <학산한언>의 야담 30편이 전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주목될만함. Ex) <청구야담> 속 이절도궁도우가인, 거강포규중정렬 등 또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의 후재 김간이 저술한 필기서 <후재수록>의 이야기 중 4편이 <청구야담>에 전재되었음. <후재수록>에 수록된 이야기에는 작품 말미 작자의 논평이 첨부되어 있기도 한데, <청구야담>에서는 모두 삭제됨. -><청구야담>의 작자는 이야기를 수록할 때 군더더기는 모두 삭제하고 서사만 가져와 완정한 야담이 되도록함. ==== 19세기의 야담들 ==== 19세기 경기도 광주!!에 살던 만오 정현동은 <만오만필>이라는 필기, 야담집을 저술함. 야담집의 작자는 주로 노론계 인사인데, 정현동(남인)과 이현기(소론)는 노론이 아님. <만오만필>의 상권에는 야담이 실려있고, 하권에는 사대부 일화를 중심으로 한 짤막한 고사가 실려 있는데, 제목은 붙어 있지 않음. 편폭이 제법 긴 이야기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짧음. 정현동은 이야기에 관심은 있었으나 야담 작가로서의 필치는 부족해보임. Ex) 46화 호랑이를 감동시킨 효부의 이야기가 <청구야담>의 수정절최효부감과 비슷하지만 서사의 묘미가 부족함. 계서 이희평은 1828년 필기서 <계서잡록>을 저술함. 거창 부사로 있을 당시 완성했고, 이희평은 벌열층에 속한 인물. 여러 흥미로운 야담이 실려있고, 제목은 붙어있지 않음. <동패낙송>의 이야기들이 더러 있어 <동패낙송>을 읽었던 것으로 보임. 이현기의 <기리총화>는 19세기 전반 저술되었고, 이야기에 대게 4자의 이름이 붙어 있음. Ex) 포주이문(포주의 이상한 이야기), 채생기우(채생의 기이한 만남), 심가귀괴(심씨집 귀신이야기), 천비식인(천한 여종이 사람을 알아본다) 등 이중 채생기우, 심가귀괴, 천비식인은 <청구야담>에 전재되면서 결방연이팔낭자(열여섯낭자와 꽃다운 인연을 맺다), 궤반탁견곤귀매(밥상을 차려 줬다가 귀신에게 곤욕을 치르다), 택부서혜비식인(지혜로운 여종이 사람을 알아봐 남편을 택하다)7자 제목으로 바뀌어짐. -> <청구야담>의 제목이 독자의 흥미를 훨씬 자아냄. 이현기는 야담작가로서 뛰어난 역량을 보임. -> 작품에 인물의 개성이 뚜렷하고, 정황에 대한 묘사가 정채있음. 또한 사회적 문제의식, 정치의식이 작품 속에 들어있기도 함. (ex) 포주이문: 북벌론의 허상과 인재 등용의 문제점 지적, 채생기우: 조선 후기의 신분제적 모순을 인물들 간의 갈등과 내면 심리 묘사를 통해 포착해냄. -> 조선 후기 야담 문학의 최고 성취라고 할 수 있음.) 이러한 작품들이 <청구야담>에 수록되면서 <청구야담>은 더욱 정채를 가지게 됨. 19세기에는 <청구야담>, <계서야담>, <동야휘집> ‘3대 야담집‘이 편찬됨. -> 18세기에는 없던 현상. 이를 통해 19세기가 야담이 집대성되는 단계였음을 알 수 있음. <계서야담>은 계서 이희평이 죽은 뒤 <계서잡록>에 실린 야담을 토대로 엮은 책으로 보임. 3대 야담집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야기에 제목이 있지는 않음. <동야휘집>은 1869년 이원명이 편찬한 야담집. ‘동국의 야담을 모아 놓은 책‘이라는 뜻. <어우야담>이나 <기문총화>와 같은 전대 야담집에 실린 야담을 윤색해서 싣기도 하고, 편찬자가 들은 민간의 이야기도 기록해 놓았음. 다만 <동야휘집>은 편찬자가 수식을 지나치게 많이 가하여 이야기의 생동감이 사라지고 사대부적 미의식이 강화되어 야담 특유의 정취가 잘 느껴지지 않음. * <기문총화>: 19세기 중반 이후 <계서잡록>을 토대로 엮어진 편자 미상의 야담집 <금계필담>은 1872년 고종 10년에 서유영이 저술함. 서유영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금계에서 살 때 저술됨. 철종 14년(1863) <육미당기>라는 한문장편소설을 창작하기도 함. ‘좌해일사(우리나라 야사)‘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부제에서 보이듯 야담보다는 야사에 가까운 작품들이 많이 실림. 간간히 야담도 발견되지만 그 필치가 뛰어나지는 않고, 심각한 주제의식을 지닌 작품도 없음. 19세기 말 차산 배전이 <차산필담>이라는 야담집을 저술했음. 배전은 중인층이기 때문에 중인층의 야담집이라는 점에서 주목됨. 16편의 야담이 실려 있고, 작품마다 제목이 있음. 대원군 집정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도 있어 시대의 변화를 느낄 수 있지만, <청구야담>만큼의 생기발랄한 면모는 찾을 수 없음. 이러한 점에서 <차산필담>, <동야휘집>은 야담 쇠락기의 산물로 여겨짐. 야담은 시정인층과 문인층의 합작품으로써의 성격을 지님. 시정인이나 여성의 경우 국문으로 된 야담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임. (전근대 시기 <천예록>, <동패낙송>, <청구야담>이 국문으로 번역된 것은 이러한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보임.) 그러나 번역이 아닌 국문으로 창작된 야담은 나타나지 않았음. 19세기 후반 야담의 정체는 이러한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 (과거의 전통(한문창작)을 따를 뿐 새로운 돌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 -19세기 중엽 이후 야담의 행방 ==== 19세기 중엽 이후 야담의 양상은 <동야휘집>과 <차산필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음. <동야휘집>의 야담에서는 19세기 전반까지의 야담이 보여주는 생기발랄함이나 현실적 연관성을 찾을 수 없음. -> 매너리즘화 된 것. 따라서 19세기 후반에 야담은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음. (<차산필담>도 마찬가지) ->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야담은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음. 1. 19세기 후반 경 도시 시정 공간의 문화적 활기가 떨어짐. 2. 문인들이 시정의 구전 서사에 관심을 덜 가지게 됨. -> 시정공간의 문화적 활기가 떨어지며 이러한 이유로 야담이 현실 반영의 면모를 잃고쇠퇴하게 된 것으로 보임. 그러나 20세기 초 애국계몽기 <신단공안> (작자가 이해조라는 설이 있음)에서 야담의 근대적 변용 양상을 확인할 수 있음. * <신단공안>: 1906년 5월~12월까지 <황성신문>에 연재된 7편의 한문현토체 소설. 7편 중 <김봉 본전>, <어복손전>이 야담과의 연결점을 보여줌. <김봉 본전>은 봉이 김선달이 주인공으로, 익살스러운 방식으로 조선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있음. <어복손전>은 19세기 중엽 철종 때를 배경으로 노비와 상전의 갈등을 그림. 야담에서 주로 발견되는 서사이나, <어복손전>은 조선의 신분제에 대한 작자의 적개심이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애국계몽기적 문제의식을 보여줌. ->이 두 작품은 야담의 문체나 서사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야담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그러나 조선 사회를 대상으로 모순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주제의식이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음. <신단공안>은 한문현토체 소설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한문소설보다 진일보했다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한문소설에 가까운 형태. 따라서 언어적으로 한계가 있다 할 수 있음. 이러한 한계를 깬 것이 <대한매일신보>에 1905년 연재된 작자미상_소경과 앉은뱅이 문답과 1906년 작자미상_거부오해. -> 두 작품은 풍자적 어투로 당시의 현실을 비판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있음. (<신단공안>과 달리 민족의식을 보여준다는 점네서 주제 의식에서 획기적인 진전을 취하고 있음.) 그러나 이 작품은 야담과 별 관련이 없고, 애국계몽기의 신흥 단형서사라는 점에서 문제가 됨. 야담은 애국계몽기 새로운 한글 단형 서사의 탄생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보임. 1910년 대한민보에 연재된 이해조의 신소설 <박정화>에 야담이 수용되어 있으나, 창작에 활용되었을 뿐이지 야담이 새로운 무엇이 되거나 만들어낸 것은 아님. 또, 같은 시기 <양은천미>라는 야담집이 성립되기도 했는데, 표기 문자는 여전히 한문. 이 책의 야담에는 흥미 위주의 통속적 필치가 두드러짐. (신분 갈등이 작위적으로 미봉되고 맘, 처첩 간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호도됨.) 저명한 사대부의 일화를 각색하거나 부연, 윤색한 이야기가 많으며, 시대적 배경이 조선 전기, 고려시대로 설정된 작품이 많음. -> 이 역시 통속적 지향과 관련이 있음. 즉, <양은천미>는 인식소가 약화되고 흥미소가 강화된 특징을 보여준다 할 수 있음. 작품의 주제의식과 현실 반영력이 전성기의 야담과 비교해 크게 빈약해졌는데, 이는 ‘기록 서사’가 ‘구전 서사’로부터 멀어진 것이 큰 이유로 보임. 구전 서사가 빈약해지며 그 자리를 통속성과 작위성이 대신한 것. <양은찬미>가 보여주는 이러한 경향성은 일제강점기의 대중화된 한글 야담과 연결됨. 일제강점기에는 윤백남이 1934년 10월 <월간야담>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이듬해 11월 김동인이 <야담>이라는 잡지를 창간하며 명맥이 이어짐. 그러나 본래적 의미의 야담과는 멀어져 전성기 때의 생동감과 현실성을 잃어버린 ‘속화’된 장르가 되고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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