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고려 전기의 토풍과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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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 때의 상황 – 혁련정, 최충, 박인량] === 문종 때 혁련정이라는 선비가 <균여전>을 지음. <균여전>속에 향가인 <보현십원가> 11수가 실려 있음. <균여전>에 따르면 당시 <보원십원가>는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올라 전파되었다고 함. 이 향가를 통해 당시 토풍의 한 존재 양상이 확인 됨. 문종 때의 인물로는 최충과 박인량이 주목됨. 최충: “최충이 후진들을 모아 부지런히 가르치니, (…) 그래서 낙성재, 대중재, 성명재 등 9재로 나누어 가르쳤으며, (…) 교도로 삼아 9경, 3사를 가르치게 하였다. (…)” (201P) è 9경은 중국의 경전을, 3사는 중국의 고대 역사서인 사기, 한서, 후한서를 의미함. 9재에서는 9경과 3사를 가르쳤고, 한시문 짓는 법을 가르쳤으며, 유교의 예법을 익히게 했다고 함. 과거제에 따른 교육인 것임. 당시 고려에는 최충의 9재 같은 것이 11개나 더 있었다고 함. 자연스럽게 토풍은 약화되거나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한문학은 점점 더 발전하게 됨. 이러한 경향은 고전문학이 끝나는 19세기까지 계속됨. 박인량: 문종 때 과거 급제, 김근과 함께 사신으로 송나라에 간 적이 있음. 중국인들에게 시문을 인정받아 중국에서 <소화집(小華集)>이라는 책이 간행됨. 이를 통해 이맘때의 고려 문인들의 시문 짓는 실력이 중국에 방불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음. 당시 남송과 요에 보내는 외교문서는 모두 박인량이 작성했을 정도로 한문에 몹시 능했음. 박인량은 두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모두 전하지 않음. 1. <고금록> 10권: 역사서일 것으로 추정. 2. <증보 수이전>: 한문으로 작성되었지만 토풍에 귀속된다 할 수 있음. -> 이처럼 한 작가 내부에도 화풍과 토풍이 병존할 수 있음. 한문학을 이야기할 때, 한문학이라고 해서 모두 화풍이라고 말할 수는 없음. 표기 문자상의 한계가 있기는 하나, 한문학 내에도 화풍의 지향이 있는가 하면, 토풍의 지향도 존재함. 또 토풍에 가까운 지향이 있는가 하면 화풍에 좀 더 가까운 지향이 있을 수도 있다. 시대나 작가나 작품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텍스트에 담지된 의식이나 정서를 잘 파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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