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강 탈중화주의와 새로운 세계관의 정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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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후와의 논쟁 ==== 홍대용은 37세(1767년)에 부친상을 당해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와 3년상을 지내면서 부친의 묘막을 지킴. 이해 부친상을 당하기 전에 김종후와 논쟁이 벌어짐. 김종후는 예학을 전공하였고, 춘추 의리를 굳게 지킨 고루한 학자. 홍대용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공격하였음. ‘당신이 중국에 가서 오랑캐 선비들과 희희낙락하며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는데, 조선 선비가 그래도 되는가? 더러운 오랑캐와 사귀고, 그 사람둘과 주고받은 말을 책으로 엮어 그것이 유포되어 읽히고 있다는데, 말이 되는가?’ 하며 홍대용을 비난하였음. 홍대용은 이에 반박했지만, 다시금 장문의 비난 편지가 왔고, 홍대용은 김종후의 편지를 재반박하는 장문의 편지를 씀. 이는 <담헌서>에 실려 있는데, 보내려고 썼다가 마음이 진정되자 간단히 쓴 편지를 보냈음. (김종후가 홍대용을 사문난적으로 몰아가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홍대용은 자신의 입장을 우려해 이를 미봉한 것.) 김종후와의 편지 왕래는 1769년까지 이어지는데, 이때의 편지는 논쟁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은 것으로 여겨짐. Ex) 1769년에 홍대용이 김종후에게 보낸 편지: ‘당신은 예학에 골몰하는데, 그런 것은 학문의 본령이라고 보기 어렵다. (..,) 실학이야 말로 힘써야 할 학문인데 왜 별로 시급하지 않은 예학을 학문의 본령으로 삼는가?’라는 내용. -> 이 편지를 통해 두 사람의 생각 차이가 드러나고, 당시 홍대용이 실학에 골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음. 홍대용은 김종후와의 논쟁기인 1760년대 말에 주자학에 대한 깊은 회의와 이단 사상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보여줌. 그리고 청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하는 관점을 보여줌. 그러나 중화주의와 화이론에 대해서는 뚜렷한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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