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강 생사를 건 인정투쟁―이언진의 등장과 『호동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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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투쟁 === 이언진은 강한 자의식, 높은 자존감을 가졌으며 <호동거실>에는 시인의 주체성이 강하게 강조되어 있음. 이언진의 높은 전투적 주체성과 저항의식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 -> 이언진에게 저항은 높은 주체성(我慢)에 의해 가능하며 아만이 저항의 원동력이기 때문임. 이러한 전투적 주체성은 ‘인정투쟁’과 긴밀한 연관을 맺음. * 인정투쟁: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역설이 존재함을 헤겔이 발견했다. 주인은 자신의 자아상을 확립하고자 타인(노예) 위에 군림하지만, 주인과 노예의 역동적인 관계에서 진정으로 자의식을 가진 것은 노예가 된다. 주인의 자아상은 노예가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이 주인의 자아상을 가지는 것은 노예가 그를 주인으로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주인은 노예를 자기와 동등하게 자의식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주인은 진정한 자아상에 도달하기 못하기 때문이다. 노예는 주인을 인정하는데, 주인이 노예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주인과 노예는 진정한 자아상에 도달할 수가 없게 된다. 헤겔이 볼 때 진정으로 자의식을 성취한 사람은 노예이다. 노예는 복종과 훈련을 통하여 자신의 주인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 의식의 미덕이다. “콧구멍 쳐들고 주인 뒤를 졸졸 따르니 / 종이라 불리고 하인이라 불리지 / 천한 이름 뒤집어쓰고도 고치려 않으니 / 정말 노예군 정말 노예야.“ => 노예는 사회적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노예가 아니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질서를 부정하고, 주인(사회 체제)과의 투쟁을 해야만 한다는 이언진의 사유가 담긴 시. “추한 종놈 온다! 추한 종놈 온다! / 아이들 짱돌 줍고 흙을 던지네 / 내 들으니 참 괴이한 일도 있지 / 길에 떨어진 칼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다니.” => 이 시에서 ‘칼’은 중요한 메타포. ‘주인’의 입장에서는 지배의 도구, 노예의 입장에서는 반역과 항거의 도구가 됨. 즉, 지배와 피지배 간의 첨예한 양상을 드러내는 상징. 이언진은 이 시에서 노예가 칼을 들고 주인에게 반역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음. “이따거가 쌍도끼를 / 장난삼아 놀린 건 큰 잘못 / 손에 따로 박도(무기용 칼)를 들고 / 강호의 쾌남들과 결교하였지.” => ‘이따거’는 흑선풍 이규(수호지 등장인물)를 가리킴. 양산박 108도적 중 가장 잔인한 인물임. 시인은 이규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표하고 있는데, 그가 <수호지>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지배권력에 저항적인 인물이었기 때문. 즉, 이언진의 저항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 이언진이 보여주는 전투적 주체성은 인정투쟁을 위해 불가피하게 요청될 수 밖에 없던 것으로 보임. 그리고 이 점에서 <호동거실>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보여주게 됨. 그리고 이 ‘새로운 주체’는 기존 체계에 대한 부정, 새로운 진리 체계의 구성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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