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강 김려와 이옥, 근대의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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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옥의 생애 – 문체 탄압을 중심으로 === 이옥은 김려보다 6살 위로, 무인계의 서얼 집안 출신임. <발해고>를 쓴 이득공의 이종사촌 동생으로, 유득공과 이옥은 모두 소북 집안. 이옥의 <백운필>에서 유득공의 <고운당필기> 조목을 인용한 것을 통해 이옥과 유득공이 서로 왕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이옥은 정조 14년 31살 때 생원이 되었음. 이옥이 문체반정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는 점에서 이 부분이 중요함. 이옥이 서른 세살 때인 1792년 9월 16일 정조가 행차해서 소과에 합격한 유생을 입시하게 함. 이때 이옥이 정조에게 나아가 자신의 성명을 아룀. 정조가 “전후 지은 표와 책이 각각 몇수나 되는 가?”하고 묻자 “표는 5백 수 이고 책은 백여 수입니다.” 대답함. 이것이 이옥과 정조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 1792년 11월 20일 <승정원일기>기사에 ‘생원 이옥이 응제문에 소설체를 끌어들여 일상 문자로 글을 쓰고 있어 사습이 몹시 해괴해질 수 있으니 정거(과거를 못보게 함)시키고 벌로 표를 50수 지어 바치게 하라’는 정조의 분부와 그에 따라 표 50수를 올렸다는 언급이 있음. 이옥이 표 50수를 지어 바친 뒤 성균관에서 이옥의 정거가 지나치다며 풀어달라는 계를 올림. 12월 27일에는 열흘 안에 백 편의 율시를 지어 바치도록 함. 이옥의 문장과 시가 소품체라고 본 것. 그리고 정조는 소품체를 얼른 고치지 않으면 경기도 수군에 충정(지방군의 군적에 편입시켜 군역을 살게 하는 것)시키겠다고 하였음. 3년 뒤 이옥은 성균관 상재생으로서 영란제(임금이 성균관에 거등할 때 보는 시험)에 응시하였는데, 이 때 답안의 문체가 괴이하다는 이유로 정거를 명령 받음. 하지만 곧 가혹한 처사라는 의견에 충군으로 명령이 바뀌었음. (선비는 충군되더라도 실제 군사 훈련을 받지 않지만, 치욕스러운 일이었음.) 이옥은 충청도 정산현으로 가서 편적(군역에 편입)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와서 9월에 과거에 응시하였음. 그러나 이때도 정조가 이옥의 글이 초쇄하다는 평을 내렸고, 이옥은 더 먼 경상도 삼가현으로 충군가게 됨. -> 이 일이 모두 1795년에 일어났음. 이후 이옥은 1796년 2월 별시의 초시에 응시해서 수석을 하였음. 그러나 정조가 답안을 보고 이옥이 지은 책문이 격식에 어긋난다며 방의 끝자리로 강등시킴. (1등->꼴찌가 된 것) <승정원일기> 1796년 2월 6일 기사 “이옥의 문체에 대해 여러 번 고치라고 명령했으나 끝내 고치지 않아 충군하게 했는데, 이 사람이 장원을 하다니! 이로 과거 시험에서 어떤 사람을 선발하는 지 알 수 있으며 합격자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 이옥의 문체는 전적으로 소품을 일삼는다.“ “이옥이 이번에 지은 글은 그리 괴악하지 않사옵니다.“ (우승지 이조원) “이옥의 답안을 보니 구습을 좀 고쳤사옵니다.” (시관 임제원) ㅡ> 이옥은 소품체가 아닌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음. 그러나 정조는 이미 이옥에 대한 심한 편견이 있었고, 이 때문에 이옥에게 과잉 반응을 보인 것으로 보임. 이옥은 이 사건 이후로 다시는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음. 이옥은 1796년 3월 고향 남원으로 돌아오고 5월에 부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름. 그런데 1797년 봄에 삼가현의 관리가 ‘삼가현 군적에 편입되어 있는데 왜 삼가현에 돌아오지 않느냐’고 물으며 자신의 군적이 삼가현에 있음을 깨달음. 3년 상을 치르는 동안 이옥은 삼가현으로 가지 않고 버텼지만, 1799년이 되자 독촉이 빈번해져 이해 10월에 삼가현으로 가게 됨. 1800넌 2월 나라에 큰 경사가 생겨 삼가현감이 서울에 가는 것을 허락하였고, 이 때 조정의 명령으로 자신이 사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됨. 1799년 10월 18일 삼가현에 도착해 1800년 2월 18일까지 118일간 삼가현에 있었고, 1800년 6월 정조가 죽으면서 이옥과 정조의 악연이 끝나게 됨. 이옥은 글쓰기에 대한 권력의 계속된 간섭과 탄압으로 인해 고향에서 낙척불우한 삶을 살다가 1813년 세상을 떠나게 됨. 정조는 문체반정을 통해 정학(주자학)을 부지하려고 하였고, 이를 통해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조선은 신유옥사로 이어지는 반동기에 들어서게 됨. ㅡ> 정조의 입장에서는 ‘문체반정’이지만, 피해자인 이옥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문체탄압’, 그중에서도 소품탄압이라 할 수 있음. 이옥의 전하는 글 중에 <북관의 기생이 한밤중 통곡하다>라는 글이 있는데, “북관의 어떤 기생이 아무에게나 몸을 허락하지 않고 자기가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허락하겠다 하다가, 자신이 찾던 귀공자를 만남. 그런데 그 공자는 고자였고 관계를 할 수 없었음. 그래서 기생이 하늘을 우러르며 통곡을 하였음.” 이옥은 이 일에 대해 긴 논평을 붙였는데, 서두에서 “여인이 정욕을 실현하지 못해 통곡한 것이 아니라, 천고의 좋은 만남을 얻기 힘들어서 통곡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음. 즉, 기대했던 만남이 어그러진 것으로 인해 실망해 눈물을 흘렸다는 것임. 이어서 군신, 남녀 등 사람 사이의 만남에 대해 긴 사설을 덧붙였음. 이옥은 성균관에서 과거를 준비하며 일신을 도모했고, 정조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결국 문체탄압으로 불우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음. 이옥은 이 글에 정조와 자신의 관계를 은근히 가탁한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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