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고려 전기의 토풍과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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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종과 도이장가] === 예종은 고려 16대 왕, 문학을 애호하고, 유불도의 균형을 통해 토풍과 화풍의 균형을 취하려고 노력한 왕임. <고려사> 예종세가 예종 10년 11월 기사 팔관회를 열었다. (…) 창우들에게 호위 행차에서 노래와 춤을 벌이게 하여 밤 12시 무렵까지 계속하였다. (…) <nowiki>:</nowiki> ‘창우(倡優)’는 팔관회의 배우들을 말함. 국왕이 창우들의 춤과 노래를 즐겼다는 것은 토풍에 대한 애호라고 해석할 수 있음. <고려사> 예종세가 예종 15년 10월 기사 팔관회를 열고 왕이 잡희를 관람하였다. 국초의 공신 김락과 신숭겸의 모습을 본뜬 우상이 있었는데, 왕이 감탄하여 시를 지었다. <nowiki>:</nowiki> 여기서 ‘시’는 한시를 의미함. 그러나 예종은 이때 <도이장가(悼二將歌)>라 하는 우리말 노래도 지었음. <장절공유사>의 내용 중 예종이 하사한 ‘단가 이장’이 <도이장가>를 의미함. (<장절공유사> 내용: 본책 205쪽) 예종이 지은 노래 중 <도이장가>이외에 <벌곡조(伐谷鳥)>도 전하고 있는데, 새들의 울음소리를 사용해 신하들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을 요청하는 노래임. 예종은 통치 이념에서 유불도의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는데, 이는 토풍과 화풍의 균형잡기와도 연결됨. -> 김락과 신숭겸의 후손에게 한시와 우리말 노래를 함께 지어줬다는 것에서도 이러한 균형잡기를 확인할 수 있음. 예종은 태자일 때부터 중국의 경전을 공부했으며(김인존의 <논어신의>), 왕위에 올라서도 수시로 신하들에게 경연에서 유교 경전을 진강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도교에도 관심을 가졌음. 도가에 경도된 ‘곽여’라는 인물과 세자시절부터 친분을 다지고, 왕이 되어서는 궁궐에서 살게하고 ’선생’이라는 칭호를 붙여줌. 곽여가 궁이 답답하다고 하자 개성 근처에 산에 ‘허정재’라는 집을 지어주고, 몰래 찾아가기도 하였음. 곽여는 해동도가에 속한 인물로 보이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토풍에 속해 있다 할 수 있음. 이러한 인물을 대우하였다는 점에서 예종이 유불도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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