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강 조선의 문호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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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원 산문의 새 국면 === 박지원의 산문은 생애에 따라 크게 세 국면으로 나눌 수 있음. {| class="wikitable" |10대 후반~20대 |30대~44세 전(열하에 가기 전) |연행 이후 |- |대표작: 9전 |법고창신론에 따른 문학 창작이 이루어진 시기 대표작: <큰 누님 박씨 묘지명>, <취답운종교기>, <수소완정하야방우기>, <발승암기>, <관재기>, <초정집> 서, <양환집> 서 |대표작: <열하일기> |} ->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자부심을 느낌. 그래서 스스로 앞선 글들을 평가절하하고 <열하일기>만 후세에 전해져도 족하다고 생각함. 그러나 1, 2 시기의 글 역시 박지원의 젊은 시절 진취성과 패기, 고도로 정제된 언어의식과 미의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님. ==== -첫 번째 국면 ==== 박지원의 9전 중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과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은 현전하지 않음. <역학대도전>은 학문을 팔아먹는 큰 도둑놈 이야기라는 뜻으로 당시 선비인 체하며 권세와 이익을 구하는 자를 풍자하기 위한 작품이고, <봉산학자전>은 봉산의 학자 이야기라는 뜻으로 황해도 봉산에 사는 농민이 글은 모르지만 행실이 훌륭하므로 ‘학자’라고 높인 것. 역학대도 같은 위선자를 경계하기 위해 지은 작품. 학계에서는 박지원의 현전 7전을 모두 소설로 보았지만, 7전 중 <마장전>, <예덕선생전>, <양반전>은 허구적 요소가 많은 소설이지만 이를 제외한 작품들은 ‘전’계이거나 전형적인 ‘전’에 해당. * <민옹전>, <김신선전>, <광문자전>은 소설적 요소가 있긴 하더라도 ‘전’의 요소가 훨씬 강함. (창의적 성격의 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 * <우상전>: 소설적 요소가 전혀 없는 전형적인 ‘전’ -> 박지원의 9전에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전에 해당하는 것도 있음. (9전이 모두 소설에 해당하는 작품은 아니다.) <마장전>은 당대 양반 사대부의 위선적인 벗 사귐을 풍자하고 있는 작품이고, <예덕선생전>은 엄항수라는 똥을 져 날라 생활하는 비천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그 사람됨이 고결함을 칭찬하고 있음. 이를 통해 고결한 척하지만 사실은 비천한 양반 사대부의 삶을 풍자하고 있음. -> 성동격서(聲東擊西) 하층민인 엄항수에 대한 도덕적 미화가 과장되어 나타나는데, 이는 민중의 입장이 아닌 사대부의 입장에서 엄향수를 그렸기 때문. 따라서 엄향수를 통해 실제 하층민 삶의 곤고함 등은 그려지지 못함. <김신선전>, <광문자전>, <우상전>, <민옹전>도 비슷한 한계를 지님. (비렁뱅이인 광문 삶의 곤공함, 김신선, 우상이 겪은 신분차별로 인한 불우감, 소외감 역시 그려내지 못함.) -> 박지원의 초기 전은 여항의 인물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 표현됐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나, 하층민의 현실을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보지는 못함. <양반전>은 양반 계급을 부정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음. 그러나 <양반전>에 등장하는 ‘돈으로 양반 신분을 사려는 서민부자’를 작자가 긍정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음. <양반전>을 통해 박지원이 풍자하고자 하는 것은 ‘사고팔 대상(양반 신분)’이 아닌 가난한 처지를 견디지 못해 ‘신분을 사고 파는 주인공 양반’임. 물론 작품 내에서 양반의 횡포가 풍자되고 있다는 점은 의의로 둘 수 있지만, 그 점으로 <양반전> 전체가 양반 신분을 부정하거나 풍자하고 있다고 확대해석 해서는 안됨. 있다 할 양반이란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고단한 삶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은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신분인데, 이를 넘보며 사고자 했던 부자 서민의 태도 역시 잘못된 것으로 풍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 즉, <양반전>에서는 양반 신분을 팔고자 하는 양반과 이를 사고자 하는 서민 부자를 모두 풍자하고 있는 것. “명분과 절개를 힘써 닦지 않고, 문벌과 지체를 밑천 삼아 조상의 덕을 판다면 장시치와 뭐가 다를까?” <양반전>의 서문, 이를 통해 박지원이 ‘양반과 장사치는 다른 존재다.’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박지원의 초기 전들은 그가 벗 사귐의 대상을 하층 신분의 인물로까지 확대하고자 했음을 보여줌. 학계에서는 이를 박지원의 우정론이 갖는 진보적 면모로 해석하는 관점이 있음. 그러나 박지원은 여항의 인물에게 친근감과 관심을 보였으나, 이를 넘어서서 진정한 ‘벗’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음. -> 박지원은 평생 신분제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벗어나려는 사유를 하지는 못했음. 초기 9전에서 박지원이 주로 말하고자 한 바는 ‘양반의 위선과 허위에 대한 비판과 풍자’라고 할 수 있음. 이를 풍자한 이유는 양반 사대부 계급의 맹성(猛省: 깊은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서. -> 즉, 박지원의 작업은 그 정도가 신랄하다고 해도 양반 사대부로서의 자기 비판과 성찰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음. 이 과정에서 여항의 인물에 대한 긍정이 이루어진 점은 소득이지만, 여항인이나 하층민에 대한 대상화에서 탈피하지는 못했음. -> 이 점에서 초기 9전에 담긴 비판적, 개혁적 사고는 한계를 가짐. 박지원이 초기 9전에서 한 작업은 기존 질서의 해체, 파괴가 아닌 ‘기존 질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음. (신분제의 해체가 아닌 제 기능을 하는 신분제의 재구축) 실제로 박지원이 사귄 벗은 양반, 서얼이었고, 중인이나 서민은 없었음.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박지원의 ‘우정론’은 ‘썩은 선비’가 만연한 현실에 대한 환멸과 염증을 느껴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음. 노론 청류 집단은 당시 탕평책으로 인해 선비들이 올곧은 지조를 잃어버리고 권력에 아첨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였음. 박지원 초기 전에 보이는 ‘우도’의 강조는 노론 청류 집단의 문제의식과 유관하다 할 수 있음. ==== -두 번째 국면 ==== 박지원은 30대에 들어서면서 가난과 불우함에 시달렸고, 이 시기 작품에는 박지원의 존재 여건이 깊이 투사되어 있음. 진한고문에 대한 추승을 탈피하여 당송고문, 명말청초의 소품문(ex) 원굉도, 김성탄 등)까지 섭렵하였음. 그리고 이 셋을 받아들이고, 넘어서며 나름대로의 문학 노선을 정립하게 됨. -> ‘법고창신론’ 법고창신론은 <초정집> 서(1772년 작)에 테제화 되어 있는데, 사고가 논리 정연함. 박지원은 20대 중, 후반부터 진한고문을 넘어 당송고문, 명말청초의 소품문으로 독서를 확장해나감. -> 법고창신론은 이러한 과정에서 고안된 문학론. 1768년 박지원이 쓴 <정유문집> 서 라는 글과 <초정집> 서의 내용이 거의 똑같음. 즉, 박지원의 법고창신론이 30대초에 확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음. ‘법고창신론’에는 법고와 장신이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있지만, 박지원은 이론상으로나마 ‘법고’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음. -> <초정집> 서에서 서얼이었던 박제가가 법고의 구심력에서 벗어나 창신으로 더 나아가는 것을 경계하고 있음. 의식적으로 법고를 더 강조한 것으로 보임. 법고창신론에서 ‘'''창신’은 반드시 법고의 기초 위에서 성립될 수 있고, 법고의 견인을 받아야함'''. 따라서 법고를 벗어나는 행위는 긍정되지 않음. 박지원은 중국에 갈 때 <큰누님 박씨 묘지명>을 필사해 가 중국 문인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 글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임. 이러한 면모를 통해서 박지원은 이전의 문인들에게서 보기 힘들었던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큰누님 박씨 묘지명>은 짧은 묘지명이지만 기존의 묘지명과 달리 박지원과 누나들만 알고 있는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를 서술함. / 박지원의 누이는 생전에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고, 박지원도 당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았음. -> 이 두 삶을 오버랩하며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서술방식을 사용하였고, 이를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큰 울림을 낳고 있음. -> ‘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자유롭고 솔직함. 예교에서 벗어난 서술 방식이 기존의 산문과 다른 면모. <취답운종교기(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글)>은 박지원이 37살 때인 1773년 경 창작된 것으로 보임. 운종교는 당시 청계천 위에 있던 서울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다리. 서울의 밤거리를 술에 취해 배회하다 새벽을 맞는 박지원, 이덕무, 이희경, 이희명, 원유진 등의 모습을 그리고 있음. -> 이들은 모두 서얼로, 불우하고 낙척한 삶을 산 인물들. 박지원 역시 백수였기 때문에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았음. 당시 점잖은 사대부들은 박지원을 파락호(행세하는 집의 자손으로 난봉을 피워 결딴난 사람)으로 여겼는데, 이러한 존재여건으로 인해 <취답운종교기>와 같은 창의적인 글을 쓸 수 있었음. <수소완정하야방우기(소완정이 쓴 <여름날 벗을 방문하고 와>에 답한 글)>은 이서구가 박지원의 집에 방문하고, 박지원의 모습을 보고서 쓴 글에 대한 화답임. 이서구는 어릴 때 박지원에게 글을 배운 문생이었음. * 문생: 문생은 수학하고 글을 배우는 것, 문객과는 다름. (박제가, 이덕무는 박지원과 뜻과 취향이 맞고 처지가 비슷해 박지원을 추종한 것. 따라서 문생이나 제자가 아닌 문객. 종유자가 맞는 표현) 이 글은 36살 무렵 썼는데, 박지원 내면의 풍경을 잘 그려놓은 자화상 같은 글이라고 할 수 있음.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힘겹게 버티고, 버티면서도 자신이 낙담하고 있음을 응시하는 내면을 그려냄. 산문 중 가장 페이소스가 드러나는 작품. <발승암기>는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비참한 처지가 된 협객 김홍연을 그린 작품. 박지원은 협객이나 왈짜같은 여항인에 큰 관심을 보였었는데, 이는 <사기> 열전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임. 김홍연은 말년에 신체 장애를 가지고, 재산을 다 탕진한 채 절집에 부쳐지내고 있었음. 이러한 존재는 어떻게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인간학적 탐구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 인간의 운명에 대한 박지원의 통찰력과 깊은 눈을 잘 보여줌. ==== -세 번째 국면 ==== <열하일기>는 연행록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 이전에도 다양한 연행록이 존재했는데, 그중에서도 홍대용의 <연기>,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등이 주목됨. 박지원도 중국에 가기 전에 <노가재연행일기>는 읽은 것으로 보임. (<열하일기>에서 몇차례 언급된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큰 자부심을 보였는데, 박제가, 이덕무 같은 자신의 추종자들 앞에서 <열하일기>를 읽기도 하였음. 당시 문인이 자신의 글을 벗이나 동인 앞에서 읽는 일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음. -> 박지원의 자부심을 알 수 있는 대목. 이덕무가 성대중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이런 말이 있음. “<열하일기>의 (…) 전체 평점은 모두 본인이 한 것이고 제가 한 것은 이따금 있을 뿐입니다.” ‘본인’은 박지원을 가리킴. 즉,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스스로 평점을 붙였음을 알 수 있음. -> 박지원의 강한 자의식. * 평점: 전 근대시기 비평방식의 하나. 잘 썼다고 생각되는 글귀 옆에 동그라미를 치거나 평어를 붙이는 것. 흔히 청색이나 홍색의 먹으로 표기함. 보통은 남이 붙여줌. 이러한 예를 통해 박지원이 “<열하일기> 하나만 세상에 전해지면 족하다.“하고 한 말의 진실성을 알 수 있음. 박지원은 <열하일기>가 불후의 문학 작품을 남긴다는 마음으로 창작한 것으로, 이를 위해 책의 서술방식과 체제 등에 있어서 많은 노력을 가한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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