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강 추방된 자의 글쓰기-정약용과 이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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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속시(紀俗詩) === 이학규는 풍속이나 민속과 관련된 시를 많이 남김. <금관기속시>는 유배에서 풀리기 전인 1819년에 창작되었는데, 전부 59편 77수임. ‘금관’은 김해. 이 기속시들에서 서정 자아는 배제되고 대상의 충실한 묘사만이 나타남. -> 이학규는 기속시의 창작을 통해 사물에 눈을 돌리며 ‘배민(排悶)’, 즉 번민하는 자아를 잊고자 하였음. 김해는 문화적 변방으로써, 이학규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풍속이었음. 또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김해에는 전등신화나 삼국지연의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책이 존재하지 않았고, 학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음. -> 정약용이 지내던 강진(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의 수천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음.)과는 다른 존재여건. 따라서 학문을 하거나 체계적 저술을 하기는 어려웠음. 또한 이학규가 느끼기에 김해는 사대부들의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시료가 될 만한 것이 없었음. 따라서 일상에서 목도하는 김해의 풍속을 시로 창작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그러나 이학규가 자신의 배제한 채 김해라는 공간의 민속지를 낱낱이 기록한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주목되는 부분. -> 이학규가 어떠한 의식을 가진 채 기속시를 쓴 것은 아니고, 단지 무료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눈 앞에 벌어지는 풍경을 자아를 배제한 채 시로 읊은 것임. 기속시 중 <저자를 구경하다>라는 시가 있음. 이 시는 5언고시 160구의 장편인데, 세모의 김해 장시 풍경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음. -> 꾸밈이나 작위 없이, 도덕적 판단이나 가치 개입 없이 시골 장터라는 민중적 세계를 역동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문학적 성취가 돋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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