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신라의 문호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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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문 사산비명 === <진감선사비명>, <낭혜화상비명>, <지중대사비명>, <대승복사비명> 넷을 합해 ‘사산비명(四山碑铭) ‘이라고 부름. - 네 군데의 산에 세워진 비명이라는 뜻. <nowiki>*</nowiki>비명(碑铭): 碑文과 铭文을 말함. 비문은 碑主의 사적을 기록한 글이고, 명문은 비문의 끝에 붙인 비주를 칭송한 글을 말함. 명문은 비문과 달리 운문으로 되어 있음. 대승복사라는 절을 창건한 연유, 절과 왕실의 연관에 대한 전말을 기록한 <대승복사비명>을 제외한 세 글은 모두 고승을 위해 쓴 글임. 사산비명은 모두 왕명에 따라 지어졌음. 네 개의 비문은 그 형식이 일률적이지 않고, 각자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음. 이는 최치원이 각각의 비문을 다르게 쓰기 위해 고심한 흔적으로 보임. <진감선사비명>에는 서론이 앞부분에 길게 나오는데, 비주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유교와 불교의 도가 서로 다르지 않으며, 한곳에 귀착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음. <낭혜화상비명>에는 비문의 끝에 긴 논평이 첨부되어 있음. <지증대사비명>에는 비문의 끝에 최치원이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비명을 쓰게 된 경위를 자세히 밝히고 있음. ㅡ> 일반적으로 비문은 비주의 사적을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최치원은 이러한 관행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비문을 쓰기 위해 노력하였음. 사산비명은 모두 사륙변려문으로 지어졌고 장편인데, 변려문으로 쓰여진 것은 당시의 문풍에 따랐기 때문임. 변려문은 대구를 맞춰야하고, 고사를 많이 구사해서 글을 읽기가 쉽지 않음, (고려시대에 이르면 변려문 대신 고문이 일반화 됨, 고문은 글쓰기에 제약이 없어 변려문 보다 쓰고 읽기가 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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