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고려 전기의 토풍과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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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부식과 묘청] === 인종 때 들어서 동아시아의 정세가 완전히 바뀌게 됨. 인종 3년인 1125년 금(金)에 의해 요(遼)가 망하고, 1127년 금에 의해 북송(北宋)이 망하고 남송(南宋)이 들어서게 됨.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 금나라가 급성장해 동아시아의 정세를 요동치게 만든 것. 이 시기 고려 내부에서는 이자겸의 반란(1126년)이 일어나 개성의 궁궐이 불타고 왕권이 크게 훼손되게 됨. * 이자겸: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 외척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름 인종 초년에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고, 이자겸의 난까지 일어나자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이 개성의 지세가 다했으니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고, 정지상이 이를 지지하였음. 서경은 고려 초부터 중시되어왔고, 인종도 이자겸의 난 이후 실추된 왕권 회복이 필요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서경 천도 주장을 지지하였음.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을 지지하는 신하들도 적지 않았지만, 김부식을 위해 반대하는 문신들도 있었음. 서경에 대화궁(大華宮)을 짓는 등 서경 천도가 어느정도 진행되자,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으로 행차해 ‘칭제건원’하라고 상주함. 그러나 김부식 등 신하들의 반대로 인종은 서경으로 행차하지 않았다. 서경 천도가 어려워지자, 묘청은 서경 사람들을 모아 국호를 ‘대위(大爲: 大有爲, 큰 뜻을 이룸)’, 연호를 ‘천개(天開: 하늘이 열림)’라 하여 칭제건원을 함. 국호와 연호에서 주체성과 의욕, 자긍심을 느낄 수 있음. 묘청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서경천도를 반대하던 문신들은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였고, 반란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음. 이 주장이 힘을 얻어 김부식을 원수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도록 함. 김부식은 서경으로 이동하기 전에 김안, 백수한, 정지상 세 문신을 묘청과 반란을 공모했다는 죄명으로 참수함. 김안은 묘청의 근신이었고, 백수한은 묘청의 제자였지만 묘청과 거사를 공모했다고 보기는 어려움. 또한 정지상은 묘청의 하수인이나 지시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고, 단지 서경 출신 문인으로써 이념적, 세계관적 입장과 정치적 전망에 묘청과 공감대가 있었고, 연대를 꾀한 것으로 보임. <고려사> 정지상에 관한 내용 중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김부식이 평소 정지상과 더불어 문학으로 이름을 나란히 해 그새 불만이 쌓였으므로 이 때 이르러 그가 (묘청과) 내응(內應)했다고 칭탁해 살해했다.” 이 말을 통해 당시 사람들도 김부식의 정지상 처형에 의문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이후 김부식은 난을 진압하고 최고의 공신자리에 올랐으며 정지상을 필두로 한 서경파가 제거되고, 개경파 문신 귀족 세력의 독주가 시작되게 됨.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우리나라 천년의 역사 중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보았는데, 묘청의 난이 ‘낭불양가(郎佛兩家)’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고, ‘독립당’대 ‘사대당’의 싸움이라고 여겼음. 이 싸움에서 서경파가 패함으로써 유교의 사대주의가 득세하는 쪽으로 우리 역사의 방향이 잡혔다고 본 것. * 낭불양가(郎佛兩家): ‘낭불’은 낭가사상((郎家思想), 즉 화랑도의 풍류 사상과 불교를 말함. 인종 때 서경파와 개경파의 대립이 첨예해진 것은 대외정세의 변화 때문임. 그동안 사대해왔던 송나라가 망하고 오랑캐로 여겼던 금나라가 신흥강자로 등장하면서 고려 지배층 내부는 정치적 노선의 차이에 따라 1.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 우리도 칭제건원해서 금나라와 대등하게 맞서야 한다. (대표: 서경파 정지상) 2. 고래(古來)부터 대국이 소국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금나라가 대국이 되었으니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대표: 개경파 김부식) 는 입장으로 나뉨. 다만 꼭 서경 출신만 1번 입장에 동의한 것은 아님. 윤언이는 서경 출신이 아니지만 칭제건원에 적극 동조함. 중요한 것은 정치적 노선차이의 배후에 이념적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임. * 묘청: 민간신앙과 결부된 불교 사상, 민간 신앙과 결부된 도가 사상,(-> ‘낭가사상’) 풍수도참(風水圖讖) 사상, 음양비술(陰陽秘術) 등을 공부함.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의 궁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는데, 팔성의 이름이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실덕 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 등으로 '''도가의 명칭과 불교의 명칭이 결합되어 있음'''이 특징적임. ‘팔성’은 유교의 성인과 다른 동방의 성인인데, '''명칭에서 단군 신화나 산신 신앙이 감지된다는 것'''이 주목할 만함. (정지상은 ‘팔성’의 술법이 나라를 이롭게 하고 왕업을 늘린다고 보아 제문을 짓기도 하였음.) -> ‘팔성’의 상상력에는 토풍이 반영되어 있음. 팔성의 명칭이나 정지상의 제문을 통해 고려인의 주체성을 지키려는 분투를 확인할 수 있음. 자주적이고 고유한 관념형태이며, 서경파의 이념적, 세계관적 기반이라 할 수 있음. -> 즉, ‘칭제건원’이 정치적으로 현실적이었는가?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칭제건원’ 담론의 기저에 토풍이 자리하고 있음. * 김부식: 선조가 대대로 신라 사람이며, 중국의 명사에서 따온 이름에서부터 중국에 대한 강한 경사가 드러남. 묘청의 난이 진압된지 5년 뒤인 1141년에 고려는 금의 번국이 되어 금의 연호를 쓰기 시작함. 이로부터 4년 뒤인 인종 23년 김부식은 <삼국사기>을 인종에게 바침.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은 묘청의 난의 평정과 깊은 연관이 있음. 김부식은 관찬 사서를 통해 유교적 이념과 사대적 정치 노선을 정당화하고자 하였고, 고구려가 아닌 신라를 중심으로 삼는 사관을 정립하게 됨. 그러나 <삼국사기>는 문학적으로 형식이 자유로운 고문이 구사되어 있다는 점, <온달전>, <설씨전>과 같은 문예성이 높은 글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주목됨. 김부식은 인종 사후 <인종실록>을 편찬했는데, "(...) 북사를 대접하길 매우 공손히 아니, 이때문에 북인도 모두 공경하고 좋아하였다. (...)"는 찬을 붙였음. 이는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입장을 잘 보여줌. 이러한 김부식의 정치적 입장은 개경파 귀족 문신의 체질과 이해관계에 말미암은 것임.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서는 현상 유지가 필요했고, 때문에 변화를 추구한 서경파와 대립할 수 밖에 없었음. 묘청의 난 이후 서경파의 견제가 사라져 개경파가 독주하게 되고, 이는 무신란을 야기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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