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강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의 형성과 그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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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 신흥사대부층의 등장 === 고려 전기는 문벌 귀족이 주도한 사회였음. 이후 무신란이 일어나 문벌 귀족을 대체할 한문 출신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지배층의 변화가 일어남. 이들이 ‘신진사류’. 그러나 신진사류가 사대부층을 형성해 지배층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거나 기존의 지배층을 교체하지는 않았음. 구 문벌 귀족 출신 중 무신 집권기에도 살아남았던 이들과 무신란 이후 흥기한 무인 가문, 과거를 통해 진출한 지방 출신의 관인 중 흥기한 집안 -> 대몽항쟁 이후 충렬왕 대에 이르면 이들 집안 출신들이 하나의 정치 세력을 자리잡게 됨. / 한편 원 복속기에 원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급속도로 성장한 ‘부원배’가 있었음. 이들은 대개 왕의 측근으로 권력을 좌지우지하였음. =>13세기 후반 이래 권력을 갖게 된 이러한 정치세력을 총칭해 ‘권문세족’이라고 칭함. (권문=권세가 있는 집안, 세족=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 권문세족이 행세하던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초 사이의 정치지형에는 유의미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함. 안향과 백이정이 그 선두에 있음. 안향 1290년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주자의 책을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서 갖고 옴. 1303년 대성전이 완성되자 이 곳에 공자와 선성들의 화상을 모시게 했으며, 만년에 주자를 숭상하여 주자의 호인 회암을 본떠 회헌이라 자호함. l 대성전: 문묘의 시설 가운데 공자의 위판을 봉안한 유교건축물. 백이정 안향의 문인, 14세기 초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성리학 서적과 <주자가례>를 들고 옴. 백이정에 의해 주자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사서집주>가 고려에서 처음 간행되게 됨. -> <사서집주>의 간행은 주자학의 수용과정에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할 수 있음. 백이정 때에 들어서서 주자학은 본격적인 연구가 되기 시작했으며, 백이정의 문학에서 권부, 이곡, 백문보 같은 주자학도가 배출되기 시작함. 14세기 중후반이 되면 성리학 이념을 가지고 있는 문인 지식인들이 역사, 문학사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됨. (권부, 이곡, 백문보, 최해, 이제현, 이색, 이수미, 정몽주, 정도전, 김구용, 이숭인, 박상충, 권근, 길재 등) -> 14세기에 신유학(성리학 이념)을 수용한 이들은 사대부에 속하고, 따라서 ‘신흥사대부‘라고 불림. {| class="wikitable" |신흥사대부 |신진사류 |- |성리학 이념을 내면화함. - 불교를 배척 - 권문사족에 대항 | |- |이념적, 정치적 결속력이 있었음. (집단적 자기의식을 가짐) =>사대부‘층’이라는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음. |이념적, 정치적 결속력이 없었음. =>같은 계층 의식을 가지지 못해 사대부‘층’으로 이해할 수 없음. |} === 이제현 === 1287년에 출생하여 1376년 사망함.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 문인 중 가장 먼저 거론해야 하는 인물임. 안향과 함께 성리학을 처음 고려에 도입한 백이정의 문생이었던 권부의 사위임. 이제현은 고려에서 벼슬하다가 원나라로 가서 충선왕의 만권당에서 조맹부, 우집, 요수등 당시 중국의 명사들과 사귀었으며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음. l 만권당: 고려의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燕京)에 세운 독서당(讀書堂). 충선왕은 정치개혁에 뜻을 두어, 이를 실천하려다 실패하자 본래부터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성품에 따라, 왕위를 아들에게 선양(禪讓)하고, 1314년(고려 충숙왕 1) 만권당을 마련하였다. 그는 상왕(上王)으로서 입장이 자유롭고 재정이 넉넉했으므로, 만권당에 고금의 진서(珍書)를 많이 수집한 후, 고려에서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등을 부르고,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인 조맹부(趙孟頫) ·염복(閻復) ·우집(虞集) ·요봉(姚烽) 등과 교유하면서 중국의 고전 및 당시 북중국에서 유행한 성리학(性理學)도 연구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백이정(白頤正)은 충선왕을 섬기면서 만권당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여 그보다 늦게 만권당에 출입하게 된 이제현 ·박충좌 등에게 이 학문을 전수(傳授)하였다. 이것은 다시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등 여말(麗末)의 삼은(三隱)에게 전수되었다. 만권당에 모여든 학자들은 학술뿐만 아니라 예술 ·골동(骨董) 등에 걸쳐 광범위한 활동을 함으로써 고려와 원나라와의 문화교류의 중심적인 구실을 하였다. 당시 원나라의 주류 사상은 성리학이었고, 이제현은 원나라에 머물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해 갔을 것으로 보임. 이제현은 충목왕이 왕위를 계승하자 도당에 이런 글을 올림. l 도당: 고려 후기의 최고 정무기관. “지금 우리 국왕 전하께서는 (…) 다시 현명한 유학자 두 명을 택하여 전숙몽과 함께 <효경>과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강의하게 하여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의 도를 익히시고, 양반 가문의 자제들 가운데 정직하고 신중하며 중후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예를 아끼는 사람 열 명을 뽑아 시학으로 삼아 측근에서 보좌하고 이끌게 하십시오.“ - <고려사> 열전 <이제현전> ->이제현은 국왕이 사서를 공부해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의 도를 익혀야 함을 강조하고 있음. 이 둘은 성리학의 핵심 명제. 성리학 이전의 유학과 달리 성리학은 ‘사서’를 중시함. 성리학이 국가의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 문학사에서 이제현은 다음 세 가지가 특히 주목됨. 1. 백이정과 권부의 성리학을 계승, 제자인 이색에게 전승했다는 점. <nowiki>:</nowiki> 이제현의 제자였던 이색의 문하에는 정도전, 하륜, 권급, 이숭인 등이 배출됨. 길재도 이색의 문하에 출입하였었음. 이색 본인은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사망하였지만, 이색의 문하는 급진파 / 온건파로 나뉘게됨. 급진파였던 정도전은 조선 왕조 창업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였고, 하륜과 권근도 창업된 조선에서 큰 역할을 하였음. 그러나 이숭인은 혁명 세력에 의해 살해됨. 길재는 향리인 경상도 선산에서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고, 김숙자 등의 제자를 길렀음. 김숙자의 아들 김종직은 성종조 사림파 영수로서 김굉필, 정여창 같은 문생을 배출하게 됨. 정여창은 조광조를 제자로 둠. è 이처럼 이제현은 ‘사승관계’로 볼 때 고려 말의 온건파/급진파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의 사림파와도 연결됨. 2. <역옹패설>을 저술함. <nowiki>:</nowiki> 이제현 56세 때인 1342년 장마기간 중에 집필한 책임. -> 당시 이제현은 정치적인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난 상태였음. <역옹패설>은 필기에 속하는 작품임. 이인로의 <파한집>이 필기의 효시를 담당하고 있는데, <역옹패설>은 시화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파한집>보다 기술한 영역이 좀 더 넓어 필기의 본격적인 면보를 좀 더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음. 조선시대에 이르면 필기류에 해당하는 책이 많이 집필되는데, 문학사적으로 볼 때 <역옹패설>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음. l 필기: 사대부 특유의 글쓰기, 작자 주변의 신변잡기나 독서와 관련된 내용, 경전에 관한 내용, 사대부들의 일화, 미간에 전하는 이야기, 시문에 관련된 내용, 풍속이나 제도, 역사에 대한 내용 … 을 자유로운 필치로 기록한 것. 3. 소악부를 처음 창작하였음. <nowiki>:</nowiki> 악부는 원래 중국 한나라 때의 관서 이름으로, 지방의 노래를 채집해 음악을 제작하는 일을 맡았음. -> 이는 ‘관시찰속’을 통해 정치의 득실을 알고자 해서. 그러다 후대에 와서 악부가 민가풍의 한시를 지칭하는 용어로 바뀌었음. 그래서 ‘악부시 ‘라고 부르기도 함. 악부시는 백성의 노래를 옮긴 한시나 미간의 풍속이나 백성의 질고를 읊은 한시를 가리킴. 동아시아에 보편적으로 통용된 문학 장르였으며, 몇 가지 하위 장르가 있는데, 소악부는 악부시의 하위 장르 가운데 하나임. 칠언절구의 형식을 취함. 소악부는 짧은 형식의 악부라는 뜻임. 이제현은 민간가요를 한시화한 중국 악부시의 전통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소악부 11수를 지었음. <사리화> - 민요를 7언 4행의 한시에 담음. 백성의 힘든 삶을 읊은 시. <제주도 민요를 옮긴 시> - 시에 달린 주를 통해 이제현이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게 함. 이제현 뿐만 아니라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들에게서는 종종 애민의식이 표출됨. 이는 상층의 권문세족에 대한 비판 의식과 연결되어 있음.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정을 읊은 작품> - <고려사> 악지에 따르면 노래 제목은 <거사련>이고 역에 동원되어 멀리 떠난 사람의 아내가 까치와 거미에 가탁하여 남편이 어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한 작품. 민요로 보여짐. <연애감정을 읊은 시> - <고려사> 악지에 따르면 노래의 제목은 <제위보>이고, 어떤 부인이 죄를 짓고 제위보(빈민의 구호와 질병 치료를 맡은 기관)에서 일을 하는데 그곳 남자에게 손을 잡혀 이를 설욕할 길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겨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하였음. 그러나 이제현이 지은 소악부는 손을 잡은 남자를 잊지 못한 여인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내용 상 차이가 있음. ->이는 <고려사>가 조선 초에 편찬된 것으로, 편찬자가 유교적 이념에 따라 원래의 노래를 왜곡하여 여성의 절의를 강조한 것으로 보임. 이제현의 소악부에서는 여성이 연애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자유분방한 면모가 나타남. <제위보>는 시정의 노래가 여성에 의해 지어지는 한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됨. <승려의 음행을 읊은 시> - 시에 달아 놓은 주를 통해 이제현이 미간의 노래에서 백성의 풍속을 살피고 민심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임. 이 외에도 <처용가>와 <정석가>를 소악부로 옮김. ->이제현의 소악부는 고려속요에 대한 이해를 확충할 수 있게 해줌. 이제현이 당시 민간에 불렸던 노래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 시기 신흥사대부의 토풍에 대한 관심으로 보임. === 민사평의 소악부 === 이제현은 벗인 민사평에게 자신이 지은 소악부를 보여주고 화답을 청함. 이에 민사평은 6편의 소악부를 짓게됨. <삼장>- <쌍화점>의 2연과 내용이 동일하나,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데같이 덤거츠니 없다”라는 2행이 없음. 원래에는 없던 것이 궁중속악으로 편입되며 덧붙여진 것이라는 사실이 민사평의 소악부를 통해 확인됨. <부녀의 정을 읊은 시> - 시정의 노래를 한역한 것으로 보임. 자신을 배신하고 딴 여자에게 가 버린 남자에게 가 버린 남자에 대한 여인의 저주 섞인 원망이 토로되어 있음. 이는 현전하는 고려속요에는 발견되지 않는 내용임. 이 소악부를 통해 14세기 전반 미간에 지금 우리가 아는 고려속요와는 다른 젠더적 양상을 보여주는 노래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음. === 최해 === 14세기 전반에 활동한 신흥사대부인 최해는 최치원의 후예인데, 아주 문제적인 인물임. 이제현, 민사평과도 친했지만 성격이 강직하여 벼슬 길이 순탄하지 못했고, 높은 벼슬도 하지 못했음. 성리학적 이념을 고수해 전투적인 자세를 취했고, 특히 불교 비판에 적극적이었음. 고려 때의 불교 사원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권문세족(역시 대토지 소유)과 연결되어 있었음. 이 때문에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로 전락하여 국가에서 세금을 걷을 수 없게 됨. -> 최해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비판한 이유,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인식했기 때문임. 이제현은 최해처럼 불교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온건적인 입장을 취했음. 최해는 선봉에서 불교를 거침없이 비판함. 이러한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음. 최해는 말년에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져 자신이 비판하던 불교 사찰이 소유한 전답의 소작인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다가 생을 마감하게 됨. 이러한 만년의 삶을 <예산은자전>이라는 자전에 담아 스스로의 삶을 조롱하였음. 원래 자서전은 대개 자신을 미화하는 글이라 사실을 확인하는 입장에서는 의심쩍은 글쓰기에 속함. 그러나 최해의 자전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 상황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됨. 냉철한 자기 성찰과 자신에 대한 철저한 객관적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규보 대와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유자가 문학사 속에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함. 최해는 <동인지문> 25권을 편찬하였음. <동인지문>이란 최치원 부터 고려 충렬왕 때까지의 우리나라 명현의 시문을 엮어 놓은 책. 시에 해당하는 ‘동인지문 오칠’, 문에 해당하는 ‘동인지문 천백’, 사륙변려문에 해당하는 ‘동인지문 사륙’ 셋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천백은 현전하지 않으나 오칠은 일부가 전하고 사륙은 전부가 현전하고 있음. 우리나라 최초의 시문 선집. 자국 한문학에 대한 주체적 인식의 결과물. 최해는 <졸고천백>이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일부만이 전해지고 있음. 말년에 너무 가난해 죽었을 때 집안에 장례 치를 돈이 없어 친구들이 부조금을 걷어 장례를 치러줬다는 대목이 고려사 열전 <최해전>에 나옴. === 이색 === 14세기 후반에는 뛰어난 문인들이 여럿 배출되었지만, 그 중 최고는 목은 이색이라 할 수 있음. 이색은 이제현의 문생이며, 이곡의 아들임. 이곡의 이름에서 ‘곡’은 곡식이고, 이색의 ‘색’은 곡식을 거둔다는 뜻. 부자의 이름이 농사와 관련있음. -> 이는 신흥사대부의 대다수가 지방의 향리 출신이기 때문. 향촌과의 관련성이 나타남. <고려사> 열전 이색전에 “이색이 성균대사성이 됨에 성균관에 비로소 정주 성리학이 일어났다.“라는 말이 보임. ->이색이 성균대사성으로 있을 때 성균관의 학생들에게 정자와 주자의 성리학을 배우게 했다는 말. 현전하는 이색의 문집인 <목은집>에는 많은 시문이 실려있는데, 이색의 시에는 고려의 풍습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짙게 나타남. 이러한 시는 ‘기속시’이고 최치원의 <향악잡영>이 효시. 이색은 이러한 기속시를 여러 수 남겼음. <그네>, <찹쌀밥> 등 (385쪽 확인) 이색은 인물전을 여러 편 지었다는 점에서도 주목됨. 이색이 쓴 대부분의 인물전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인물을 대상으로 쓰였는데, 이들은 재능은 있으나 운이 좋지 않아 불우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한 인물인 ‘일사’였음. 이색이 쓴 전은 대부분 일사전에 해당함. 조선시대가 되면 인물전이 많이 창작되는데, 가장 많은 비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사전임. 이색의 전은 이러한 일사전의 효시라고 할 수 있음. 선비를 대상으로 한 인물전은 이규보가 노극청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집필한 <노극청전>이 효시임. 그러나 이는 ‘일사’를 다룬 전이 아님. 따라서 일사전은 이색이 효시라 할 수 있으며, 당시 신흥사대부의 연대 의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됨. === 기속악부 === 신흥사대부층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권문세족과 대립하며 권력투쟁을 벌였음. {| class="wikitable" |신흥사대부 |권문세족 |- |반원친명적 |친원적 |- |중소 지주 출신 - 토지겸병 반대 |대지주 - 토지 겸병 |- |향촌이 근거지 - 향촌 사회에 관심 많음 - 농민의 처지에 관심 많음 |수도가 근거지 |- | 진보적 입장 |보수적 입장 |} 신흥사대부들은 지배층의 일원이지만 농민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서 권문세족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에 서있었고, 이들을 비판할 도덕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음. 고려 말 신흥사대부의 농민에 대한 관심은 주로 애민시를 통해 표출되었음. 이들이 지은 애민시는 장르적으로 풍속을 기록한 ‘기속악부’에 해당됨. 악부시의 하위장르. l 악부시의 하위장르: 기속악부(민간의 풍속을 기록) / 의고악부(중국의 옛 악부시를 모방한 악부시) / 소악부(짧은 악부시) / 영사악부(고려 시대에 출현하지 않았음. 조선 대에 창작되기 시작) 고려 말 기속악부의 창작 양상 <관동별곡>, <죽계별곡> 등의 경기체가를 지은 안축은 <삼탄>, <염호>라는 기속악부를 지었음. <삼탄>은 조정의 산삼 공납 독촉에 몰려 농사일을 내팽겨친 채 산골을 헤매는 강원도 농미들의 참상을 노래한 것, <염호>는 동해안에서 소금을 구워 나라에 바치는 백성들의 힘든 삶을 노래함 è 이 두 작품을 통해 백성을 대변함. 이색은 일반적인 기속시 외에도 백성의 삶을 읊은 기속악부를 여럿 창작하였음. <잠부사>: 농촌의 누에 치는 여인은 홑 옷도 없이 떨고 지내는데, 지배층은 좋은 옷을 입고 술에 취해 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냄을 고발하고 있음. <산중요>: 왜구의 노략질로 백성이 어육이 되는 현실을 그려냄. <초동>, <농부>, <어자>와 같은 시는 농어촌 백성의 생활 단면을 풍속화적 수법으로 묘사하고 있음. 이달충도 기속악부를 지음 <전부탄>: 2수 연작으로 남편은 홍건적에 죽고, 자식은 변방에 수자리 서러 나가 홀로 농사를 지으며 힘겹게 살아가는 전부의 처지를 읊었음. 전부가 한탄하며 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당사자성을 보여줌. 신흥사대부가 창작한 기속악부의 최대 성과는 윤여형의 <상률가>라 할 수 있음. ‘상률’은 도토리를 말하기 때문에 <상률가>는 도토리 노래라고 할 수 있음. <상률가>: 먹을 게 없어 도토리를 주워 그것으로 연명하는 백성을 그리고 있음. 늙은 농부의 입을 통해 그 상황을 핍진하게 제시하고 있음.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이라는 사회구조적 모순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초래되고 있음이 시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함. 시의 끝 부분에는 시인의 현실에 대한 분노가 나타남. ->늙은 농부의 말을 통해 제시된 현실의 모순과 이에 대한 시니의 분노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 신흥사대부의 현실 인식과 애민 의식을 잘 보여 주는 시라고 평가할 수 있음. === 시조의 성립 ===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에 의해 시조라는 장르가 처음 생겨났음. ‘시조’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확인되기로는 18세기 영조때의 문인인 석북 신광수가 지은 <관서악부>에 ‘시절 가조’(당시 유행한 노래)라는 명칭으로 처음 보임. 이를 통해 시조가 원래 음악 곡조의 명칭임을 알 수 있음. 고려 말에 ‘시조’라는 명칭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고, 이러한 노래를 어떻게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신흥사대부들에게는 ‘단가’라는 형식적 자각이 뚜렷하게 존재했던 것으로 보임. 이색은 <백설이 잦아진 골에~>라는 단가를 지어 고려에 대한 충절을 보여줌. 역사 앞에 선 이색의 실존을 드러내고 있음.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를 통해 자신의 절개를 읊음 길재는 고려가 망한 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를 지어 회고의 정을 읊었음. ->발생기의 시조는 경기체가가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심회를 극히 절제된 형식으로 읊고 있음. <한림별곡>이 사대부의 풍류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에 반해 시조는 사대부의 단아하고 절제된 미감을 보여줌. {| class="wikitable" |경기체가 |시조 |- |미의식이 산문적이고 한문적, 즉물적임 |보다 시적이고 국어적이고, 즉정적 |- |바깥을 향한 흥취 발산 |절제된 방식을 통해 자아의 내면 정시 |} è 미적 지향이 크게 다름. 신흥사대부들은 내면의 절실한 감정을 담아내는 노래 형식이 필요해 시조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임. 또한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는 ‘절제미‘를 표현하기에도 시조가 더욱 적합했음. 시조의 성립은 여말선초라는 역사 전환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 발생기의 시조들은 ‘역사 앞‘에 선 인간의 내면은 진지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음. 짧은 형식에 이러한 내면성을 구현한 문학의 출현은 우리 문학사 초유의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 신흥사대부층의 문명 의식과 주체성 === 이승휴는 13세기 후반에 활동한 인물로, 충렬왕 13년인 1287년에 <제왕운기>라는 책을 썼음. <제왕운기>는 우리나라 역사가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기자조선으로 이어지며, 삼국시댜를 거쳐 통일 신라시대와 고려 시대로 이어진다는 인식을 보여줌. -> 자국 역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 고려가 지리적, 문화적, 종족적으로 중국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음. 이제현은 <연경에서 중서 도당에 올리는 글>을 통해 충숙왕 10년 일어난 부원배들의 ‘입성책동‘을 반대하였음. 입성책동은 고려가 원나라의 지방 행정 기구인 성으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운동임. 이제현은 고려가 개국한지 400년이 지났꼬, 언어와 풍속이 중국과는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입성이 옳지 않음을 강조함. 이 글은 입성 저지에 기여하였음. 이색도 이승휴와 같이 우리나라가 단군조선부터 시작해 유구하게 이어져왔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 <잡흥>, <정관음>이라는 시에서 확인할 수 있음. (396~398쪽 시 확인) 이처럼 자국 문명에 대한 긍지와 자국 역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이 여말의 사대부들에게서 확인되고 있음은 중요하나, 두 가지 문제점도 함께 발견할 수 있음. 1. 이들의 문명의식이 기본적으로 중화의 문명을 전범으로 삼고 있다는 점. <nowiki>:</nowiki> ex) 소악부: 백성에 대한 관심, 자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나, 향찰 표기처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 아닌 한문으로 번역, 번안했다는 것에서 이러한 인식을 알 수 있음. 2. 기자조선의 강조 <nowiki>:</nowiki> 이승휴와 이색은 요와 단국의 병립설을 제시하였음. 이는 주체성에서 큰 의미를 가지지만, 단군의 계승에 ‘기자‘를 강조한 것은 중국 문명이 전범이며 따라야할 보편이라는 인식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음.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문명의식은 주체성과 종속성의 모순적 통일이라 할 수 있음. 이러한 인식은 이들을 통해 조선시대 사대부 문학에까지 이어지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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