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강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문학적 대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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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의 왕위 찬탈 === 1453년(계유년, 단종 원년) 10월,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 원로대신 수십명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음. 계유정난이라는 명칭: 정난(靖難)은 변란을 평정했다는 뜻, 수양대군은 얀평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과 모의해 왕위를 찬탈하려 했고, 이를 평정했다고 주장, 즉, 계유정난은 수양대군 측의 용어인 것. 이 사건으로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등이 공식으로 책봉되었고, 2년 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됨. 명목적으로는 왕위를 선양(禪讓) 받고,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추대하는 형식을 취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단종을 내쫓은 것. 다음해인 1456년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하고(병자사화), 이 일로 단종은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 죽임을 당함. 수양대군은 권력욕으로 살육을 일삼고, 친동생들과 어린 조카를 죽임. 유교, 특히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을 국시로 삼는 국가였던 조선에서 ‘세조의 왕위찬탈’은 조선 전기 내내 양심적인 지식인, 문인들을 짓누르는 트라우마가 되었음. -> 왕조의 도덕적 정당성이 상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양대군 측에 붙은 신하들은 공신이 되어 부귀를 누렸으나. 왕위찬탈의 부당함에 맞서거나 그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은 목숨을 잃거나 세상을 배회하다가 생을 마감함. (ex) 사육신, 생육신) -> 그리하여 세조의 왕위찬탈은 유자들에게 ‘절의’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들었으며, ‘천도(天道)’에 대한 회의를 낳게 되었음. 유학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근간은 ‘천도’에 의해서 떠받쳐짐. 유학에서 인간의 삶과 세계의 질서는 선인과 악인에게 각각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진다는 ‘천도’에 의해 지지됨.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 이어지는 현실은 천도에 대한 믿음에 심각한 균열을 낳고 회의를 야기한 것으로 보임. 이는 유교의 정치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해당함. 그리고 유교는 이때 비로소 ‘대자적’으로 인식되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일부 지식인에 의해 유교적 정치철학에 대한 재숙고, 재성찰이 이루어지게 됨. * 즉자적(卽自的) <-> 대자적(對自的): 자기 자신에 매몰되어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것을 즉자적이라 하고, 이것은 동물적 태도이다. 대자적 태도는 이와 반대로 주관인 자기 자신까지도 객관화하여 반성하고 관찰하는 태도임. -> 세조의 왕위찬탈을 겪으며 유교적 통념의 해체 작업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국가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하는 정치사상적인 근본 물음까지 제기되게 됨. -> 이때부터 ‘민(民)’에 대한 인식의 심화가 이루어짐. 이처럼 15세기 중반에 일어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은 정치사뿐만 아니라 사상사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화두가 됨. 그리고 이는 16세기~17세기 초반까지도 문제가 된다. === 김시습의 생애 ===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창작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맞섬. 김시습은 1435년(세종 17년) 서울의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태어남. 그러나 어린 나이에 시를 잘짓는다는 소문을 들은 세종이 김시습을 궐에 불렀고, 8~9세의 어린 나이에 대궐에 불려가 한시를 지어 세종의 칭찬을 받음. * 김시습이 세종을 직접 만난 것은 아님. 승정원 승지 박이창에게 김시습을 만나게 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도록 한 것. 어린시절의 이 체험은 김시습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됨. 신동이라는 말을 듣고, 세종에게 큰 칭찬을 받았지만 이로 인한 자의식 때문에 그의 삶이 꼬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임. 김시습의 자의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은 <금오신화> 1편인 용궁부연록. 김시습의 인생은 21때 완전히 바뀌게 됨.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접하게 됨. 이후 3일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다가 문득 통곡을 하고 책을 불살라 버린 뒤, 방에서 뛰쳐나와 측간의 똥통에 빠지는 ‘양광(佯狂)’을 함. * 양광: 동아시아의 지식인이 현실과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택하는 행위양식의 하나.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기를 버리는 행위로, 일종의 자해행위. 따라서 비장감과 비극성을 보여줌 -> 양광은 은둔과는 다른 행위 방식임. 은둔은 현실을 초극하는 행위이지만, 양광은 현실 속에 있으면서 현실을 거부하겠다는 행위. 따라서 은둔보다 더 복잡한 심리 구조를 내포하고 있으며, 관점에 따라 더 문제적인 행위라고 할 수도 있음. -> 세조의 왕위 찬탈에 양광이라는 행위 양식으로 저항한 인물은 김시습이 유일함. 김시습은 벼슬에 아직 오르지 않은 포의(布衣) 상태였기 때문에 단종을 위해 절의를 꼭 지킬 필요는 없었음. 그가 평생 절개를 지킨 이유는 어린시절 세종에게 받은 격려가 작용한 것으로 보임. 김시습의 행동을 양광으로 여기는 관점은 조선시대부터 있었음. 타당한 관점이라 보이지만, 그가 받은 심리적 충격을 생각하면 실제로 일시적으로 미쳤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세종의 왕위 찬탈 이후 9년 가까이 김시습은 승복을 입은 채 전국 각지를 방랑함. 번뇌를 풀 수 없고, 마음을 다잡을 수 없다 보니 오랜 시간 방황을 한 것으로 생각됨. 그만큼 왕위찬탈 사건이 김시습에게 커다란 실존의 문제이며 도덕적, 사상적 연관을 갖는 문제였다고 할 수 있음. 이 시기 김시습은 백성들의 현실과 처지를 목도할 수 있었고, 이 체험은 그가 평생 사상적으로 견결한 애민적 입장을 취하도록 만듦. 또한 이 시기 불교와 도교 공부를 하며 사상적 스케일을 확대할 수 있었음. 김시습은 9년의 방랑을 끝내고 1463년 금오산에 정착함. 이후 8년 가까이 금오산에 우거했는데, 이 때 금오신화가 저술되었음. 37세인 1471년 금오산 생활을 청산하고 상경하는데, 세조가 죽은 지 3년이 지났을 때임. 세조가 죽고 새 임금 아래서 벼슬을 할 생각이 있어 상경한 것으로 보임. 서울 인근인 수락산에서 1480년까지 우거하게 됨. 이후 47세 대인 1481년 승복을 벗고 환속해 안씨의 딸과 혼인했지만 곧 사별했고, 이듬해 8월 성종의 계비인 윤씨가 부덕하다는 이유로 폐비된 뒤 사사되자 큰 충격을 받아 다시 미치광이 행세를 함. 이듬해 1483년 3월, 다시 승복을 입고 관동으로 향하였고, 1491년까지 강원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음. 1492년 가을에는 옛 벗인 화엄 승려 지희가 있는 무량사에 왔고, 이 절에 머물며 대승 경전의 하나인 <법화경>과 <능엄경>에 발문을 적었음. <자사진찬>이라는 글을 쓴 것도 이 무렵. === 김시습의 작품들 === ==== <금오신화> ==== 원나라 말 구우가 <전등신화>를 썼고, 성종 때 성임이 <태평통재>를 엮을 때 <전등신화>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성종 연간 이전부터 조선에서 <전등신화>가 읽혔음을 알 수 있음. 김시습도 <전등신화>를 읽고 그에 자극받아 <금오신화>를 썼음. 현존하는 <금오신화>에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다섯 편의 작품이 실려있음. -> 주목해야 할 점은 <금오신화>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문학적 대응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 만복사저포기는 ‘만복사에서 저포로 내기를 한 이야기’라는 뜻. 이생규장전은 ‘이생이 담장을 엿본 이야기’라는 뜻 (내용은 본책 74~75쪽) 이 두 소설은 외관상으로는 남녀의 사랑이야기. 그러나 주목할 점은 남녀주인공 모두가 절의를 지킨다는 사실. 특히 여자주인공은 감당할 수 없는 폭력에 맞서 정절을 지킴. 이것은 열녀 이데올로기를 부추기기 위한 것이 아님. 남자 주인공 역시 지조를 보여주는 것에서 인간 일반에게 요청되는 지조라는 덕목을 부각하기 위 함임을 알 수 있음. 즉, 이 두 소설은 사랑이야기는 단지 외피일 뿐이고, 인간의 삶에서 ‘절의란 무엇인가?’를 묻고 탐색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소설. 작가는 ‘절의’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고 종요로운 것이며,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보고 있음. ->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절의, 지조라는 것은 단순한 유교적 덕목이 아니라 존재의 내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행위로까지 나아감. -> 이 점에서 생에 대한 작가의 지향과 가치 의식을 느낄 수 있음. 그러나 두 여성주인공은 세계의 폭력에 희생되게 됨. 남성주인공 역시 그 연장선상에 서있음. 이들은 세계에 패배했음에도 폭력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음. 이러한 주인공들의 태도는 ‘절의’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함. 즉, 작가에게 절의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 인간 주체성의 문제인 것. 그리고 이 점에서 김시습에게 절의가 단순한 윤리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미학적인 것으로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윤리학과 존재론과 미학의 통일을 이뤄내고 있는 것.) -> 이러한 메시지는 작가가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겪은 삶, 고뇌와 사유, 깨달음이 반영된 것이라는 것이 주목됨. ->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김시습의 감정을 사랑의 외피를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낸 이야기. ‘술에 취해 부벽정에서 노닌 이야기’라는 뜻인 취유부벽정기는 고사를 인용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있음. (줄거리 77쪽) 이 작품 역시 절의를 부각하고 있으며, 준왕(準王)에 대한 위만의 왕위 찬탈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됨. 이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기 위한 것. 이와 관련해 작가는 홍생이 준왕의 딸을 만난 시점을 세조 당대의 일로 서술해 과거와 현재의 왕위 찬탈을 오버랩 시키고 있음. 남염부주지는 ‘남쪽 염부주 이야기’라는 뜻이며, 취유부벽정기보다 더 직접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있음. * 남염부주: 불교에서 수미산 남쪽에 있는 대륙 취유부벽정기와 마찬가지로 세조 당대가 작품의 배경임. 또, 주인공이 거주하는 공간이 경주라는 점에서 작가의 실존이 투사되어 있다고 여겨짐. 주목할 점은 작품에 김시습의 정치사상이 피력되어 있다는 것임. 1. 전제군주에 대한 반대 <nowiki>:</nowiki> “'''나라를 소유한 자는 폭력으로 인민을 겁박해서는 안 되오'''. 인민이 비록 두려워하며 따르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반역할 마음을 품어 시간이 흐르면 큰 재앙이 일어날 것이오” -> 염라대왕이 박생에게 한 말. 2. 국가는 인민의 것이라는 생각 <nowiki>:</nowiki> “덕 있는 자는 힘으로 군주의 자리에 나아가서는 안 되오 (…) 대개 나라란 인민의 나라요, 명이리란 하늘의 명이라오. 천명이 이미 떠나고 민심이 이미 떠나면, 비록 몸을 보전하고자 한들 어찌하겠소?” -> 염라가 박생에게 한 말. <금오신화>에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고, 이러한 상황에서 선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답하고 있음. 이를 통해 국가.인민.군주의 관계에 대한 정치사상적 인식의 진전을 보여주고 있으며, 선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절의임을 확인하고 있음. <금오신화>에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김시습의 입장이 드러나는 것은 맞지만, 정론(政論)의 개진이 아닌, 허구를 통한 문학적 형상화라는 ‘미학적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함. -> 이로써 한국 문학은 정치적 현실과의 대결에서 새로운 높이를 확보하게 됨. -> <금오신화> 속의 높은 예술적 긴장감, 폭력적 세계에 맞서는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옹호, 국가와 민에 대한 깊은 통찰 등이 이를 뒷받침. 이러한 점에서 <금오신화>는 미증유의 문학사적 성취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음. 그리고 이러한 성취는 김시습의 비극적 삶에서 시작된 것. * 미증유(未曾有): 전례가 없는 혁신적인 사건이나 변화. <금오신화>가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지만, 모방한 것은 아님. 이 두 작품은 전기소설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서로 다른 주제 의식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 <금오신화>가 왕위 찬탈이라는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음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전등신화>는 전란이 인간의 운명에 어떤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는가를 탐구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음. 16세기 전기, 베트남에서 완서(阮嶼)가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은 <전기만록(傳奇漫錄)>이라는 소설을 창작했는데, 이는 이민족 중국에 맞서는 베트남 인민에 주목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면모가 확인됨. 동아시아 문학사로 본다면 14세기 후반, 원나라 말기에 <전등신화>가 창작되고, 그 영향으로 15세기 후반에 조선에서 <금오신화>가, 16세기 전반에 베트남에서 <전기만록>이 창작된 것. 이 작품들은 모두 전기소설이지만, 주제 의식이 모두 다름. (이는 작가의 시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실존이 달라졌기 때문) ==== <애민의(愛民義)>, <방본잠(邦本箴)> ==== 김시습은 <애민의>, <방본잠> 같은 글을 통해서도 정치사상을 펼쳤음. 정치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을 ‘정론 산문(政論散文)’이라 하는데, 이 글들은 정론 산문임. 김시습은 정론 산문을 통해 자신의 민본적 사고를 정극적으로 개진하였음. <애민의>는 ‘인민에 대한 사랑을 논함’이라는 뜻임 “창고와 곳 같은 인민의 몸이요, 옷과 모자와 신발은 인민의 살갗이요, 술과 음식은 인민의 기름이요, 궁궐과 거마는 인민의 힘이요, 세금과 기물은 인민의 피다.” -> 임금이 사용하는 모든 것, 국가의 모든 것은 인민에게서 나온 것이니 인민을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피력됨. -> 애민론은 <맹자>에도 나타나지만, 무엇이 인민의 몸이고~ 이러한 인민의 ‘육체성’에 근거한 사고는 이전 중국, 한국의 어떤 책에도 나오지 않은 말임. 군주와 국가의 모든 재용은 인민의 몸의 일부이며, 그래서 인민의 몸과 노동의 산물은 동일시됨. -> 이러한 사고는 김시습이 인민적 관점에 투철함을 알려주고, 이러한 투철함은 김시습의 실존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음.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체제 안과 밖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 지점에서 체제를 비판적으로 조명했음. 그러한 사고의 결과가 인민과 군주와 국가에 대한 이러한 통찰을 낳게 된 것. <방본잠>은 ‘국가의 근본에 대한 잠언’이라는 뜻 “조금이라도 인민의 원망이 있게 되면 임금 당신의 잘못이니 하늘이 죄를 내리시어 당신의 나라를 빼앗아 훌륭하고 어진 이에게 주리니 당신이 필부로 떨어져 하루아침에 권력을 잃는다면 뉘우친들 소용없네. 그래서 인민을 나라의 근본이라 하니 근본이 굳건해야 당신이 편안하지. 당신이 먹는 건 백성의 곡식이고 당신이 입는 건 백성의 비단이며 궁실과 거마는 백성의 노동이네.” -> 국가의 근본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이라는 생각이 제시되어 있으며, 혁명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이 보인다는 점이 주목됨. -> 천명이 인민에게서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나쁜 군주를 교체하는 것은 결국 인민인 것. <애민의>나 <방본잠>에서 확인되는 김시습의 ‘인민이 나라의 실질적인 주인이며 군주는 인민을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민본주의적 사유는 근대의 민주주의 사상과는 아직 거리가 멀지만, 주목할 만함. 그래서 김시습의 사유 속에서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이 긍정되고 있음. 김시습의 이러한 민본주의 사상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을 계기로 심화되었다 할 수 있음. 권력의 폭력에 대한 사유, 국가의 근거에 대한 사유, 군주의 통치권에 대한 사유, 인민의 사회정치적 위상에 대한 사유, 혁명에 대한 사유로 정치철학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갔다고 보임. 이러한 김시습의 정치사상은 15세기 후반 한중일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의 사유를 보이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음. (중국의 지식인들은 김시습보다 200년쯤 뒤 왕조 교체를 겪으며 대담한 사유를 감행하게 됨.) ==== <청한잡저 2> ==== 김시습의 문집인 <매월당집(梅月堂集)>에는 잡저(雜著)라는 제목의 저술이 둘 실려 있음. 1. 도교를 논한 것. (청한잡저 1) 2. 불교를 논한 것 (청한잡저 2) -> 모두 10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고, 객과 청한자(淸寒子)의 문답형식을 취하고 있음. 청한자는 김시습의 또다른 호임. 문답 형식으로 저자의 사상을 펼치고 있음. (18세기 홍대용이 쓴 <의산문답>을 떠올리게 함.) 형식적 세련도로 볼 때 도교를 논한 글이 먼저 쓰였고, 이후 불교를 논한 글을 쓴 것으로 보임. 둘 모두 금오산 시절 쓰인 듯함. 김시습은 유학자이면서 불교학자이기도 하였음. <청한잡저 2>에서는 유교를 의식해 불교를 논하면서도, 불교의 의의를 적극 긍정하고 있음. 또한 일목요연한 체계를 갖추고 있는 책임. “부처의 법은 청정과 과욕에 있으므로 만물과 다투지 않으니, 산속에 있으면 그 도가 높고, 인간 세상에 행해지면 그 법이 엄합니다.” (3, 삼청) “이른바 부처의 도란 (…) 그 광대한 이로움이 무궁합니다. (…)” (6. 양무제) -> 불교의 가르침이 비단 출세간만 아니라 세간에도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음. 한편,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를 유교의 ‘인애(仁愛)’로 가져와 그 사회적 정치적 효용을 부각시키기도 하였음. “석가의 근본 뜻은 자애를 우선으로 삼으니, 임금 된 자로 하여금 백성을 사랑할 바를 알게 하고, 아비 된 자로 하여금 자식을 사랑할 바를 알게 하며, (…) 위로는 그릇되고 어긋난 정치가 없게 하고, 아래로는 시해하고 반역하는 생각을 끊게 함으로써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평온하게 살면서 (…) 그러므로 비록 인이니 의니 하는 말은 없으나 (…) 깨우침이 이미 인의의 자취를 드러내고 있다 할 것이니, (…)” (5. 송계) (본책 87쪽) -> 불교와 유교를 적극적으로 회통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음. 불교를 통해 유교에 대한 성찰을 심화시키고 있기도 하고, 유교를 통해 불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꾀하고 있음. 따라서 김시습의 회통은 ‘상호적’임. 김시습은 특히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서 불교의 가치를 논하고 있는데, 석가로 인해 “억세고 용맹한 자가 전쟁을 그치고, 패역한 자가 찬탈을 그치며, 꾀 많은 자가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고, 어진 자가 상도를 지켜” 인도가 성인의 땅이 되었으니, 석가는 은의 탕왕이나 주의 무왕과 대등하다고 하였음. 또, <남염부주지>에서도 석가의 말은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라고 하기도 하였음. 김시습이 불교의 사회적, 정치적 의의를 크게 긍정하고 있는 점은 매우 독특하다 할 수 있음. 김시습의 독특한 불교에 대한 해석 역시 수양대군에게서 기인함. 세조는 호불(好佛)의 군주였음. 왕이 되자 많은 불사를 일으켰고, 많은 불경을 국문으로 발행해 간행했고, 도성 한 가운데 원각사를 짓기도 했음. 김시습은 불교를 긍정했지만, 세조의 이러한 불교 숭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을 가짐. <청한잡저2>에서 중국 남조 양나라 무제의 호불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그는 왕위를 찬탈했다는 점에서도 세조와 유사함. 김시습은 양무제의 부처 숭배가 부처의 가르침과는 어긋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음. 객과 청한자가 주고 받은 문답을 보면(89쪽), 큰 돈을 들여 화려한 절을 짓는 등 불사를 일삼는 것은 부처가 바라는 바가 아니며, 임금이 복을 닦아서 좋은 나라를 만들려면 백성 사랑하기를 어린 자식처럼 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애민의>, <방본잠>등의 유교적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애민적, 반전제적 입장과 동일한 기초 위에 있으며, 세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 역시 개재되었다고 볼 수 있음. -> 즉, 세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인해 사회적, 정치적, 인민적 맥락에서 불교를 새롭게 해석해 낼 수 있게 됨. <청한잡저 2>는 불교적 텍스트지만, 유교적 텍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애민적’ 입장이 보임. '''김시습의 애민적 입장이 그가 유교와 불교를 회통시키고, 유교와 불교 상호에 대한 심화된 이해와 성찰을 가능하게 한 근본'''이었음. ==== <자사진찬> ==== 충청도 홍산현 무량사에 거처할 때 작성한 글로, 자화상에 찬(贊)을 붙인 것. 김시습 스스로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세상에 남기는 말로 볼 수 있음. * 찬(贊): 인물을 찬양하는 운문체의 글. 문인들 중에는 자찬의 글을 남긴 사람들이 많음. 김시습의 이 글은 자찬(스스로를 찬미하다)한 글로만 보기는 어렵고, 김시습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대해 남긴 평가라고 보임. 따라서 이 자찬은 김시습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글이라 여겨짐. 이하(李賀)를 내려봤고 해동에서 뛰어났네 -> 이하는 당나라의 뛰어난 시인으로 7살에 지를 지은 것으로 유명, 자신은 5살에 지를 지었기 때문에 내려보았다 한 것. 자신의 시재(時才)에 대한 자부. 높은 명성과 부질없는 칭찬 높은 명성과 부질없는 칭찬 네게 어이 해당하리, 네 몸은 지극히 작고 네 말은 크게 어리석다. -> 자신에 대한 냉철한 직시이며, 약간의 자괴감이 느껴지기도 함. ‘어리석다’는 말은 타인의 시선이며, 이를 통해 김시습이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객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김시습은 세상과 어긋나는 삶을 살았고, 이는 타인의 시선에서 ‘어리석은’ 것,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뜻을 견지하고자 하였음. (구렁이라네) 너를 내버려야 할 곳은 구렁이라네. -> ‘구렁’의 원문은 구학(溝壑), 땅이 움푹 팬 곳을 말함. 기근이 들면 백성들의 시체가 나뒹굴곤 했음. 이는 맹자의 “지사불망재구학(志士不忘在溝壑: 지사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뜻을 지킴.)”에 근거를 두고 있는 말, 즉, '''김시습은 죽을 때까지 절의에 대한 태도를 견지하였음을 알 수 있음'''. 이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의 여성 주인공들이 죽음 앞에서 보여준 태도와 동일. <자사진찬>에 묘사된 김시습의 모습은 유교적 의미의 충신뿐만 아니라, 불의한 세계와 맞서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저항적 지식인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할 만함. * <자사진찬>은 <매월당집>의 표기와 무덤에 세워진 표석, 율곡 이이의 <김시습전>의 표기가 다른데, <매월당집>에는 ‘구학’이 丘(언덕 구)壑, 나머지에는 溝壑으로 표기됨. 丘壑으로 해석한다면 언덕과 골짜기라는 뜻이 되어, 그윽한 산수를 의미하게 됨. 이러한 글자 변경은 김시습의 불온성을 완화하거나 없애기 위해서라고 생각됨. * 또한, 김시습의 자화상 역시 왜곡이 가해졌는데, 목의 염주 목걸이가 사라진 것임.이는 김시습의 승려로서의 정체성을 지우고, 유자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임. === 남효온의 <육신전> === 남효온(1454~1492)은 왕위 찬탈에 맞선 작가, 김종직의 문생. 김시습보다 19살 어림. 사육신(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의 전기인 <육신전>을 써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정면으로 비판함. -> 남효온의 문생들이 이 글로 인해 자신들에게 화가 올 것이 두려와 집필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지만, 남효온은 굴하지 않음. <육신전>에서 남효온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지조를 지킨 인물들의 최후를 그려내고 있음. 특히 주목할 부분은 성삼문과 유응부에 대한 서술임. 성삼문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안색에 변함이 없었다’는 것과 죽음 앞에서도 ‘안색이 태연했다’는 것이 부각되고 있음. 유응부는 달군 쇠를 배 아래에 놓는 고문에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는 서술이 나타남. 또한 사육신 중 유일한 무인인 유응부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음. 남효온은 사육신의 사건이 있었을 때 6살이었으므로, <육신전>은 그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훗날 전해 들은 일에 자신의 상상력을 가미한 것으로 보임. 그래서 상당한 극화(劇化)가 가미되어 있고, 그 속에는 작가의 태도와 가치 의식이 투사되어 있다고 여겨짐. 이 작품은 고문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에 대한 높은 감수성을 보여준다는 점이 주목됨. 우리 문학사에 이러한 작품은 <육신전> 뿐임. 또한 끝내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인간의 존엄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함. 이러한 점에서 <육신전>은 우리 문학사에서 불후의 위업으로 평가될 만함. 김시습이 <금오신화>에서 은유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 태도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냈다면, 남효온은 <육신전>에서 거사직서(據事直書)로 기술하는 방식으로 삶에 대한 가치태도와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드러냈음. * 거사직서: 사실을 직필(直筆)로 기술하는 방식. 두 작품은 미적 방식은 다르지만 지향에 있어서는 동일함, 또한 두 사람이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교유했다는 점에서 <육신전>의 창작에는 <금오신화>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추측할 수 있음. === 임제의 <수성지>, <원생몽유록> === 임제(1549~1587)는 김시습 사후 50년, 남효온 사후 57년에 출생했고, 무인 집안 출신임. 29살인 선조 10년 문과에 급제해서 서북도 병마평사, 예조정랑 등을 지냈음. 임제의 작품으로는 <수성지>, <원생몽유록>이 전함. <화사(花史)>는 임제의 작이 아닌 남성중이 숙종 28년에 창작한 작품. <화사>에서는 숙종 연간의 당쟁이 비판되고 있는데, 16세기에는 <화사> 수준으로 당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불가능했음. <수성지>의 수성(愁城)은 근심으로 가득찬 성을 말하는 것. 이 작품은 임제의 수심(愁心)과 분한(憤恨)이 가득한 내면세계를 잘 보여줌. 오로지 술로 수심을 풀 수 있다고 함. “초나라 의제는 강에서 죽었으니, 나라를 빼앗는 것만으로도 족하거늘 어찌 차마 죽인단 말인가. 충신의 눈물 다하지 않고, 열사의 한 다함이 없다.” 항우는 의제를 참현으로 내쫒은 뒤 의제를 살해하였는데, 임제는 이를 <수성지>에서 언급하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음. <수성지>에는 중국 역대의 충성스러운 인무들이 차례로 서술되는 대목이 있음. 끝부분을 보면 “그 맨 뒤에는 중국의 제도와는 다른 의관을 갖춘 이들이 있었다. 500년 강상(綱常)의 무게를 제 한 몸에 짊어진 한림학사(翰林學士)와 호두장군(虎頭將軍) 대여섯 사람이 무리 지어 당당하게 들어왔다.” 강상은 인륜 도덕, 즉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고, 한림학사는 집현전에 근무했던 성삼문 등, 호두장군은 유응부를 가리킴. 즉, 이 부분은 사육신에 대한 서술인 것. -> 이처럼 <수성지>에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비판과 사육신에 대한 추모의 마음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음. <수성지>는 고려 후기에 등장한 가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 가전에는 술을 의인화한 <국선생전>, <국순전>, 거북을 의인화한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같은 작품들이 있음. 가전은 많은 고사와 전거가 구사된다는 특징이 있는데, <수성지> 역시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였는데, 특이한 점은 마음을 의인화한 ‘천군(天君)’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임. 고려 후기의 다른 가전 중에서는 마음을 의인화한 가전은 없음. 천군을 주인공으로 한 가전인 <천군전>은 남명 조식의 제자인 김우옹이 1566년에 처음 창작하였고, <수성지>는 1580년에 창작되었음. <수성지>는 <천군전>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지만, 가전이 아닌 소설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음. <수성지>는 동아시아 문학사에서 오직 우리 문학사에만 보이는 ‘천군소설(天君小說)’의 출발점을 이룸. 이후 17세기 전반기에 황중윤이 장회체 장편소설 <천군기>를 창작하고, 17세기 후반에 정태제에 의해 보수적인 방향으로 수정되게 된다. (<천군연의(天君演義)>)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은 ‘원생이 꿈에 노닌 기록’이라는 뜻으로 우리 문학사에서 ‘몽유록’이라는 이름이 붙은 최초의 소설임. 단 한 세대 앞의 문인인 심의가 <기몽(記夢: 꿈을 기록하다)>이라는 작품을 남겼는데, 실제적으로는 꿈에 문인의 왕국에 가서 노닌 일을 기록한 몽유록에 해당함. <기몽>은 별 문제의식이 없는 희필적(戱筆的) 성격의 글이지만, <원생몽유록>은 심각한 주제 의식을 담고 있음. * 심의의 <기몽>: 대관재몽유록 (大觀齊夢遊錄), ‘대관재기몽(大觀齋記夢)’ 또는 ‘몽기(夢記)’라고도 한다. 중국문학사에도 <침중기>처럼 꿈을 꾸고, 꿈속에서 서사가 완성되는 ‘몽유록’과 비슷한 작품들이 존재하지만, 독자적인 양식으로 존재하지는 않음. 그러나 한국에서는 몽류록이 독자적인 소설 양식으로 간주되고 있음. <원생몽유록>은 원생이 꿈에서 단종과 사육신, 남효온을 만나는 이야기임. 꿈에서 단종과 사육신은 저마다 시를 한 수씩 읊으며 비감을 표하는데, 다음은 남효온이 한 말. “요임금과 순임금과 탕왕과 무왕은 만고의 죄인입니다. 후세에 음흉한 농간을 부려 왕위를 찬탈한 자들이 선양(禪讓)받았다며 요순을 빙자하고, 신하로서 임금을 공격한 자들이 탕왕과 무왕을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 아아 이 네 임금이 도적의 효시입니다.” * 요, 순: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선양함. (선양: 덕이 높은 신하에게 왕위를 물려줌.) * 탕왕, 무왕: 탕왕은 자신이 섬기던 하나라의 군주 걸을 쫒아내고 은을 세웠고, 무왕은 은나라의 군주 주를 몰아내고 주를 세움. -> 위 선양과 탕왕과 무왕의 방벌(放伐)은 나라를 도적질하는 행위의 효시라는 것. 남효온의 말은 곧 작자의 생각이라 할 수 있음. 작자인 임제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후 단종에게 왕위를 선양받은 것을 비판하기 위해 이러한 말을 한 것. 요순, 탕왕, 무왕은 모두 유교에서 성인으로 받들어지는 사람들임. 그런데 <원생몽유록>에서는 이들을 ‘만고의 죄인’으로 칭하고 있음. 이는 유가의 정치사상과 크게 어긋난 생각이며, 위험한 생각이라 할 수 있음. 유교의 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이며, 성인에 대한 전복적인 사고이며, 이러한 생각은 수양의 왕위찬탈로 인해 낳아진 사유라 할 수 있음. 그런데 김시습도 <백이, 숙제를 찬미하다.>라는 글에서 (내용 104쪽) 임제와 동일한 사유를 보여줌. 김시습 역시 수양의 왕위찬탈로 유교 경전을 재해석하게 되면서 일반적인 성인관과는 다른 사유에 도달하게 됨. <원생몽유록>은 <육신전>의 ‘속편’이라고 할 만함. 임제는 남효온의 육신전을 읽고 감명을 받아 이 작품을 쓴 것으로 보임. 이후 <원생몽유록>을 계승해 <수성궁몽유록(운영전)>, <달천몽유록>, <강도몽유록> 같은 작품들이 나옴. 임제는 소중화 의식에서 탈피해 주체적 의식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이러한 의식의 성립은 <원생몽유록>에서 확인되는 유교에 대한 과감한 전복적 사고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임. === 경계인 문학의 출현 === 김시습, 남효온, 임제 세 사람은 흔히 방외인(方外人)으로 지목됨. ‘방외인’은 세상을 벗어나 물외(物外)에서 초연히 노니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승려나 도사, 은자를 일컬을 때 쓰는 말임. 그러나 앞의 세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 물외를 노니는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움. 김시습은 늘 자신과 세상 사이의 모순(신세모순)을 느꼈음. 즉, 그는 방외와 방내의 ‘경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임. 늘 방내에 관심을 가졌지만 방내로 들어올 수 없었고, 방외로 아예 나가버릴 수도 없었던 것. 그 경계선상에서 고뇌하고 동요하는 존재가 ‘경계인’. 그래서 아예 물외에서 노니는 방외인과는 달리 체제 비판 의식이나, 강렬한 정치의식을 표출하게 됨. 이러한 경계인의 존재론적인 위상에서 참신한 문학적 성취가 이루어지거나 주목되는 사상적 언술이 나올 수 있었음. 김시습뿐만 아니라 임제, 남효온도 마찬가지. 임제는 둘과 달리 벼슬을 하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어떠한 정신적 지향을 취했으며 어떤 존재 상황에 있었던가 하는 점임. 이들의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 ‘경계인 문학’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문학 범주를 문학사에 선보였다고 할 수 있음. 경계인 문학은 조선 전기의 훈구파 문학이나 사림파 문학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제 3의 문학’으로서, 사림파 문학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예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체제를 비판하는 특징을 보여줌. 사상적으로도 대담하고 활달하며 창조적인 면모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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