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강 추방된 자의 글쓰기-정약용과 이학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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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부사 민영철이 소나무를 못 베게 하려고 도끼를 다 빼앗았는데, 임기가 끝난 뒤 서울로 돌아가려고 하자 고을 경계에서 아낙네 대여섯명이 앞길을 막고 도끼의 행방을 물었음. 이학규는 고을 백성들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시를 지었음.
김해부사 민영철이 소나무를 못 베게 하려고 도끼를 다 빼앗았는데, 임기가 끝난 뒤 서울로 돌아가려고 하자 고을 경계에서 아낙네 대여섯명이 앞길을 막고 도끼의 행방을 물었음. 이학규는 고을 백성들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시를 지었음.


*  {color:red}정약용과 이학규의 태도 차이{color}  : 정약용은 자아를 놓지 않았기 때문에 시 속에서 시인의 목소리가 느껴지는 반면, 이학규에게 있어 시는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용도였으므로 자아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됨. -> 그렇기 때문에 이학규의 시에서는 윤리적 판단 등의 자아가 없이 대상의 충실한 재현만이 나타날 뿐임.  <소주도>, <철문어> 등의 시에서도 현실을 비판하고 있지만 시인의 자아는 보이지 않음.  정약용의 <파리를 조문하다>가 정약용의 세계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실적 묘사를 통해 리얼리즘의 승리를 이루어 냈다면, 이학규의 <석신막지부행> 같은 작품은 작가가 자아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사실적 묘사가 가능해져 리얼리즘의 승리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님.  이학규도 백성에 대한 연민이 있었기 때문에 <기경기사>나 <철문어>와 같은 시를 창작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주관적으로 개입해 연민을 표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정약용과 차이점을 가짐. -> 자아를 표출하지 않고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대문에 지배층의 횡포, 민의 참혹성, 저항적 면모를 여실히 드러낼 수 있었던 것.  
* <u>'''정약용과 이학규의 태도 차이'''</u>: 정약용은 자아를 놓지 않았기 때문에 시 속에서 시인의 목소리가 느껴지는 반면, 이학규에게 있어 시는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용도였으므로 자아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됨. -> 그렇기 때문에 이학규의 시에서는 윤리적 판단 등의 자아가 없이 대상의 충실한 재현만이 나타날 뿐임.  <소주도>, <철문어> 등의 시에서도 현실을 비판하고 있지만 시인의 자아는 보이지 않음.  정약용의 <파리를 조문하다>가 정약용의 세계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실적 묘사를 통해 리얼리즘의 승리를 이루어 냈다면, 이학규의 <석신막지부행> 같은 작품은 작가가 자아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사실적 묘사가 가능해져 리얼리즘의 승리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님.  이학규도 백성에 대한 연민이 있었기 때문에 <기경기사>나 <철문어>와 같은 시를 창작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주관적으로 개입해 연민을 표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정약용과 차이점을 가짐. -> 자아를 표출하지 않고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대문에 지배층의 횡포, 민의 참혹성, 저항적 면모를 여실히 드러낼 수 있었던 것.  


=== 민요에 대한 관심 ===
=== 민요에 대한 관심 ===

2024년 8월 12일 (월) 17:28 기준 최신판

유배문학[편집 | 원본 편집]

유배: 죄인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격리하는 것. 감옥에 갇히는 것은 아니지만 거주의 공간이 제한되며, 유배지 밖을 벗어날 수 없음.(편지를 주고받거나 가족이 유배지에 왕래하는 것은 가능.) 죄의 경중에 따라 2천 리, 2천5백 리, 3천 리로 나뉨.

유배객은 대개 정치범임. 즉, 동아시아에서 유배는 최고 권력자가 신하나 반대자를 처벌하는 통치 행위이거나 정파간의 싸움에서 기인하는 숙청이기도 했음. -> 조선 후기에는 당쟁의 심화로 유배객이 더욱 많아짐.

유배객 중에는 문신이 많았음. 이들의 ‘유배’ 생활이라는 존재요건이 반영된 글은 평상시의 글과 다를 수 밖에 없었고, 여기서 ‘유배문학’이라는 하나의 범주가 성립함.

우리 문학사에서 처음 확인되는 유배문학은 고려시대 정서의 <정과정곡>. 고려 말 정도전의 <답전부>나 조선시대 조위의 <만분가>, 김정의 <제주풍토록>등도 유배문학의 범주에 포함됨.

정약용과 이학규는 1801년 신유옥사 때 천주교인이라는 혐의를 받아 고문을 받은 뒤 오랜 세월 유배살이를 하였음. 조선시대 유배를 간 문인은 많지만, 이 둘은 단순한 정쟁이 아니라 이단 사설로 간주된 천주교 교인으로 몰려 유배를 갔다는 점에서 특별함. 정약용은 이 때문에 본인을 ‘폐족’으로 인식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배지에서 필사적으로 학문에 몰두한 것으로 보임. 또한 정약용은 17년, 이학규는 23년 간 귀양살이를 했는데, 유배 기간이 몹시 길다는 점과 그 기간 내내 글쓰기로 자신을 지탱하며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뤘다는 점, 귀양 살이 이후에 이렇다한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됨. (노수신도 19년의 귀양살이를 했으나 나중에 영의정에 오름. 이광사는 22년동안 귀양살이를 하였으나 이렇다 할 문학적 성취는 없음.)

정약용은 40살에 귀양을 가서 57살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학규는 32살에 떠나 55살에 고향에 돌아왔음. 두 사람다 문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중년을 유배지에서 보냈음. -> 권력에 의해 자신의 공간에서 추방되어 오랜 기간 귀양살이를 한 두 사람의 글쓰기를 살펴보는 것은 문학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할 수 있음.

정약용의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정약용은 영조 38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에서 태어나 헌종 2년 75세에 사망함. 호는 다산, 혹은 여유당. 부친은 음직으로 진주 목사를 했지만 조부와 증조부는 벼슬을 하지 못함. ->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음. 정약용 대에 와서 집안이 흥함.

정약용은 28살(정조 13년)에 문과에 급제함.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아 예문관 검열,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 동부승지, 곡산 부사, 형조 참의 등을 지냄.

정약용은 문과에 급제하기 전 1784년 큰형수의 동생인 이벽과 자형인 이승훈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함.

  •   이승훈: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가서 1784년 초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음.

정약용 24살(1785년)에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발생함.

  • 을사추조적발: 1784년,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한 뒤 귀국한 이승훈은 천주교회를 설립한 후 전교에 힘썼다. 그는 이벽, 권일신 등과 서울 명례동(현 명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미사를 집전하고 교리를 공부했다. 다음해 3월,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 권일신 부자 등 10여명이 이벽의 교설을 듣고 있던 중에 주위의 고발로 도박 단속을 위하여 순라를 돌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형조로 끌려갔다. 이들의 종교 활동을 처음 접한 형조판서 김화진은 중인 출신 역관 김범우만 투옥하고 그를 제외한 양반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사건 직후 양반 출신들은 모두 배교한 영향도 있는듯하다. (다만 이후 몇몇은 다시 복교하기도 한다.) 그런데 석방된 권일신, 이윤하, 이총억, 이정섭 등 다섯 사람이 함께 형조에 들어가 성화상의 반환과 김범우의 석방을 요청하자 사건이 시끄러워지면서 외부로 알려지게 된다. 이에 소식을 접한 일부 유생들이 천주교 교리가 국가의 지도 이념인 성리학적 윤리 체계를 파괴한다고 반발하면서 이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자 "서학(천주교)은 한 때의 유행일 뿐이니 정학(성리학)을 바로 세우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라던 정조는 김범우를 경상도 밀양의 단장으로 유배시키고 사태를 마무리짓는다.

-> 이벽, 이승훈,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정약용의 형들) 등 10명이 참석했음. 그러나 당시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 양반집 자제들은 훈방되고 증인인 김범우만 처벌을 받음.

정약용 30살 때인 1791년 ‘진산 사건(신해박해)’이 벌어짐.

  •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년(신해년, 정조 15년) 조선 최초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 사건이다. 신해교난(辛亥敎難) 또는 신해사옥(辛亥邪獄), 진산 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부른다.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이 종교적 가르침을 지키고자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후 제사를 폐함으로 인해 사회적 파장이 일고 당쟁으로까지 비화됨에 따라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한다는 죄명하에 그의 행위에 동조한 외사촌 권상연과 함께 참수당하였다. 정조는 관대한 처결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윤지충이 남인에 속했던 탓에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서인 조차 신서파와 공서파로 분열되었다. 많은 양반계층 교인들은 천주교가 박해의 대상이 되자 배교하였다. 그 공백은 중인들이 메우며 교세는 성장했으나 제사거부라는 교리는 천주교 탄압의 좋은 명분이 되었고 천주교는 정치세력간에 정적 숙청의 희생양으로 악용되기 시작했다. 신해박해를 필두로 하여 시작된 탄압은 신유박해, 을해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가 자행되어 수많은 천주교 성직자와 천주교도들이 '천주학 죄인' 또는 '천주학 쟁이'라고 비난받으며 순교의 피를 흘리는 불행사로 이어졌다.

->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종형. 제사는 유교의 근본 이념인 효와 직결되는 행위. 따라서 진산 사건은 유교와 천주교 신앙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

이후 정약용은 천주교를 등지는 쪽을 택했고, 평생 이러한 입장을 고수했지만 이후로도 노론으로 부터 천주교 신자라는 공격을 받게 됨.

33살 때는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폈고, 다음해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 밀입국 사건(형인 정약전이 연루됨.)으로 인해 충청도 금정 찰방으로 좌천되게 됨. -> 정조는 당시 남인들을 보호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정약용을 잠시 외직으로 내보낸 것.

정약용은 1796년 규영부 교서가 되어 박제가 등과 <사기영선>을 교열함. 이듬해 6월 좌부승지에 제수되지만 바로 사직하고, <자명소>를 올려 자신이 천주교에서 빠져나왔음을 분명히 함. 같은 해 윤6월 정조는 정약용을 곡산 부사로 내보냄. -> 정약용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

1799년 4월 다시 내직으로 발령받아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직책을 제수 받으나 반대파의 무고로 사직하게 됨.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등극함. 이듬해 2월 신유옥사(신유박해)가 일어남. 신유옥사로 이승훈과 정약종은 참수되고, 이가환은 고문 끝에 옥중에서 사망함. 정약용과 정약전은 배교한 것이 참작되어 경상도 포항과 전라도 신지도에 각각 유배됨. 정약용의 형제 중 맏형인 정약현만 천주교를 믿지 않아 탈이 없었던 것. -> 정약용은 장기로 유배 가는 도중에 <수오재기>라는 글을 써 자신들이 큰형처럼 언행을 삼가며 세상을 살지 않아 이런 화를 당하게 되었음을 성찰함.

신유옥사가 일어난 지 8개월 뒤인 1801년 10월 황사영백서 사건이 일어남.

  •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조선에서,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信者) 황사영이 중국 로마 가톨릭교회 북경 교구의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적은 밀서(密書)이다. 신유박해에 대한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다.

황사영은 정약현의 사위, 정약용과 정약전은 이 사건으로 인해 서울로 압송되어 다시 국문을 받게 됨. 정약용은 이때 전라도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됨.

정약용과 정약전은 처음에 천주교를 믿었지만, 나중에 배교하였음. 정약용 본인이 그 사실을 여러차례 이야기 했음. 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신유옥사 때 억울하게 죽거나 귀양을 간 다섯 사람(이가환, 이기양, 권철신, 오석충, 정약전)을 신원하는 묘지명을 씀. -> 억울하게 천주교도로 몰려서 정치적 탄압을 받은 사람들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쓴 것, 진짜 천주교도 였던 정약종이나 황사영의 묘지명은 쓰지 않았음.

정약용이 쓴 <돌아가신 둘째 형님 묘지명>이나 <자찬묘지명>에 의하면 정약용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귀국한지 한 달 뒤인 1784년 4월 15일 이벽에게서 <천주실의>와 <칠극>등 천주교 서적을 빌려 읽었고, 이 때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이 시작되었고 이로부터 7년 뒤인 진산사건까지 신앙이 이어짐. 그러나 진산사건 이후로는 천주교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됨.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정약용이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거짓으로 배교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음. 하지만 정약용은 학자로서, 그리고 사상가로서 정직성과 양심이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인간이므로 이러한 주장은 정약용이라는 인간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

정약용은 유배간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에서 동문 밖에 있는 주막집 노파의 집을 거처로 정함. -> 다들 정약용을 기피해서 이 집을 거처로 삼은 것임.

정약용은 자신의 유배 거처지에 ‘사의재(네 가지 마땅한 집)‘이라는 이름을 붙임. 사의는 생각은 담박할 것, 외모는 엄정할 것, 말은 과묵할 것, 행동은 진중할 것. -> 사의를 실천하며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방 이름에 붙인 것.

정약용은 1802년 봄 이후 다시 마음을 추슬러 공부를 시작함. <사의재기>에 이러한 대목이 나옴. -> “생각건대 나이는 자꾸 들어가는데 학업이 황폐해진 게 슬프다.“

사의재에 거주할 때인 1803년 정약용은 <소경에게 시집간 여자>라는 서사시를 지음. 정약용이 직접 목격한 일을 쓴 것인데, 이 작품에서는 참혹한 처지에 있는 여성에 대한 정약용의 연민을 느낄 수 있음. 이는 약자에 대한 정약용의 인도주의적 관심, 혹은 유교적 가부장제하에 있는 여성에 대한 관심이 보이는 시.

정약용은 사의재에서 만 4년을 지냈고, 이후 보은산방(고성사)에서 2년간 지냄. 47살 때인 1808년 다산 아래에 있는 운단의 산정으로 거처를 옮김. 이 산정이 ‘다산초당’이고, 유배에서 풀려서 돌아올 때까지 이 집에서 저술에 전념함. 이때가 다산초당 시절.

정약용의 학문적 글쓰기[편집 | 원본 편집]

정약용은 1802년 4월부터 이해 내내 <독례통고>를 읽으며 주기를 붙이는 일에 몰두함. -> <독례통고전주>

  • <독례통고>: 청초의 학자 서건학이 상례에 대한 경전과 여러 설을 모아 그 뜻을 밝힌 책.

“또한 나는 천지간에 외롭게 서 있는지라 의지해 살아갈 방도는 글쓰기 밖에 없다.(…) 너희들이 끝내 공부를 하지 않고 포기해 버린다면 내가 한 저술과 편찬은 장차 누가 수습해 편차를 정하고 산정하겠느냐?(…) 내 책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다만 사헌부에서 탄핵한 말과 의금부에서 심문한 말만 가지고 나를 평가할 것이니 나는 장차 어떠한 사람이 되겠느냐?“

->   이해 12월 22일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정약용에게 학문이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음. 정약용은 학문을 이루는 일이 폐족으로 명예가 떨어진 자신의 가문을 부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음. -> 정약용이 목숨을 걸고 학문 행위를 한 이유.

“반드시 먼저 경학으로써 토대를 세운 뒤에 역사책을 섭렵해서 정치의 득실과 치란의 근원을 알아야 하며, 또 모름지기 실용적인 학문에 유의해 옛사람의 경제에 관한 서적을 즐겨 읽고서 마음 속에 늘 만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만물을 편안히 하려는 마음을 둔 뒤에라야 독서를 한 군자라 할 수 있다.“

->  정약용이 강진에 와서 ‘어떻게’ 학문을 해야할 것인가를 오랫동안 생각한 결과. 이후 정약용의 학문 행위는 이 말에서 벗어나지 않음.

정약용은 처음 사의재에 거주할 때는 주로 상례에 대한 책을 저술하는 데 힘을 씀.

Ex) 1803년 <예전상의광> 17권

상례에 대한 관심은 보은산방까지 이어짐. (1807년 <상례사전>)

그러나 이 해 봄 정약용이 <주역사전>을 저술하며 그의 관심이 경학 쪽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줌. -> 이후 다산초당 시절에는 이전과 다르게 상례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면서도 경학 연구에 몰두함.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 정약용의 주요 저술은 모두 이 시절에 저술된 것. 다산초당 시절 정약용의 학문적 글쓰기는 두 가지 방면으로 진행됨.

1.    경학연구: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 동아시아에서 오랜 전통이 있는 학문 분야로, 당시 학문의 으뜸으로 간주되었음.

정약용은 당시 조선의 폐단이 경전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매진한 것. -> 유교경전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현실의 모순과 폐단을 시정하는 학문적 기초가 된다고 여김.

정약용의 경학은 주자와 다른 해석이 있고, 독자적 성취가 있음. 그러나 당시는 19세기 전반기였고, 박제가나 최한기 같은 학자들은 경전에서 완전히 벗어난 학문을 추구하였음. 따라서 정약용의 학문이 시대를 선취하거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의의를 갖는다고는 할 수 없음. -> 하지만 정약용의 경학 연구는 자신을 부지하고 실존을 떠받치는 행위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함. 이 점에서 정약용의 경학 연구는 추방된 자의 글쓰기로서의 양면을 보여줌.

- 한 면은 자기 존재를 건 혼신의 글쓰기라는 점. (비장미가 내포됨.)

- 한 면은 자신의 처지에 제약되어 새로운 사상을 만들지는 못했다는 점. (유배지라는 제한된 공간에 갇혔고, 유배객으로써 정치적 제약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경학은 진보적 계기가 내포되어 있긴 했어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음.)

2.    조선의 사회제도 개혁 방안에 대한 연구 (실학연구)

:  이는 경학 연구와는 대조적임. -> 그러나 정약용의 경학 연구는 현실의 개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실학 연구도 정약용의 실존과 분리되지 않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음. 즉, 경학 연구도 실학 연구도 모두 정약용의 존재 이유를 확인시키는 행위였던 것.

정약용의 애민시와 사회 개혁적 산문들[편집 | 원본 편집]

정약용은 유배 시절 애민시를 많이 창작하였음. 유배 이전에도 애민시를 창작한 적 있는데, 경기도 암행어사를 할 시절 연천을 순찰하고 쓴 <적성촌에서>라는 시가 있고, 다음 해의 <기민시(굶주리는 백성을 읊은 시) > 세 수도 애민시에 해당함. -> 그러나 애민시가 많지는 않았는데, 유배 이후에는 많은 시를 창작하게 됨.

주목되는 점은 30대 시절의 애민시에서 확인되는 애민의식이 이 시기에 쓴 <전론>, <원목>, <탕론> 등의 급진적 개혁 사상과 연결된다는 사실임.

1.    <전론>: 하늘 아래 굶주리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주장. -> 과다한 토지 소유의 부도덕성과 빈부 격차를 좌시하는 무책임한 정치를 비판함. 또한 균전법이나 한전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여전법(농사짓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해야 한다. 토지의 공동소유 및 노동에 따른 분배를 말함.)을 제안함. 또한 선비들도 농업이나 수공업, 상업에 종사하거나 실학을 연구하여 사회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봄.

2.    <원목>: ‘목민관을 탐구한다‘라는 뜻. 임금을 포함한 목민관들이 백성의 추대로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라고 주장. -> 따라서 모든 권력의 원천은 백성에게 있다는 주장.

3.    <탕론>: ‘탕임금에 대해 논하다.‘라는 뜻. 임금은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땅에서 솟아난 존재가 아니라 아랫사람들의 추대로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함. <원목>과 비슷한 취지.

또한 탕왕과 무왕의 역성혁명을 긍정하고 있는데, 임금은 백성의 추대로 올라간 존재이므로 정치를 잘못한다면 교체할 수 있다고 여김.


->  정약용 30대에 쓰인 이 정론 산문은 정약용 개혁 사상의 정점을 보여줌. 그러나 유배 이후에는 정약용의 처지로 인해 여러 고려와 자기 검열이 있었기 때문에 글쓰기와 사유에 제약을 가지게 됨. 또한 유배지에 갇혀 있어 서울에 있을 때처럼 중국을 통해 세계의 사정을 알 기회가 없던 것도 감안해야 함.

유배 시기 정약용의 애민시들은 강진 백성의 참혹한 현실을 그리고 있음.

Ex) 1803년의 <애절양>: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는 가혹한 현실에 대해 그려냄. 이를 통해 백성의 고통을 여실히 그림.

1810년의 <용산촌 아전>, <파지촌 아전>, <해남촌 아전>: 수탈을 일삼는 아전들과 백성들의 참성을 읊음.

1802년의 악부시 <탐진촌요>, <탐진농가>, <탐진어가>와 같은 악부시도 주목되며, <고양이>, <승냥이와 이리> 같은 우화시를 통해서 수탈하는 지배층과 수탈당하는 백성의 살을 우의적으로 노래함.

Ex) <승냥이와 이리>: <전간기사> 시 중의 한 수. 1809년~1810년 대기근이 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음. <전간기사>는 이때의 참사를 시로 읊은 것,

<파리를 조문한다>도 이때의 작품. -> 1810년은 유배기 정약용의 문학 행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

<전간기사>는 여섯 수로 구성되어 있음. (<쑥을 캐네>, <볏모를 뽑네>, <메밀>, <보리죽>, <승냥이와 이리>, <버려진 오누이>)

<파리를 조문한다>[편집 | 원본 편집]

1810년 정약용은 산문으로도 당시 목도한 백성의 참상을 나타냄. 1810년 여름에 쓴 <파리를 조문한다>.

->  정약용은 파리를 대기근에 굶어 죽은 백성들의 화신으로 보고 있음. 즉, 죽은 백성들과 파리를 일체로 보고 있음.

“파리야 날아와 이 음식 소반에 앉아라. (…) 그대의 시신은 이리저리 높이 쌓였는데, 옷도 없이 거적에 둘둘 말려 있다. 장맛비 내리고 날이 더워지자 시신은 모두 이물로 변한다. 구물구물 솟아나 어지러이 꿈틀대며 움직인다. 옆구리와 등줄기에 넘쳐나더니 콧구멍까지 가득채운다. 그러고는 허물을 벗고 훌훌 날아가는구나.”

->  파리에게 곡진히 말을 건네며 음식을 권함. 이 대목 뒤에는 지방관의 무사안일, 아전들의 횡포와 백성 수탈, 조세의 과중함, 백성의 고통과 원망이 구체적,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음.

이 작품을 우언으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작품 속 파리는 가탁된 존재가 아니라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에 우언이 아님.

 이 글은 정약용의 다른 애민시들에 비해 비통함의 정도가 몹시 심함. -> 비통한 풍경을 목도하고 이 때문에 서정시를 읊을 수 없이 격하고 비통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상황이 되어 눈 앞의 광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임. 그리고 이로 인해 백성과의 거리가 매우 좁혀짐.

정약용의 다른 애민시들은 백성의 비통함을 그리고 있더라도 대상과 화자 사이의 일정한 거리감이 존재함. 그러나 <파리를 조문하는 글>의 경우에는 서술자 파리의 거리가 아주 좁혀져 있음. (그러나 서술자와 파리가 일체적인 것은 아님. )

정약용은 애민 의식이 높았지만, 연민의 대상일 뿐 정치적이나 저항의 주체로 인식하지는 못했음. 이러한 의식의 한계에도 이 글에서 백성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던 것은 극도의 비통함을 목격했기 때문으로 보임 -> 죽은 자들의 시신과 파리가 일체로 파악되며 진성측달(眞性恻達)의 감정이 고조되며 존재론적 일체로 나아간 것.

또한 이 글은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인데, 이러한 묘사를 통해 정약용이 느꼈던 고통의 감정을 감지할 수 있음.

-> <파리를 조문하는 글>은 작가가 가진 이념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고통을 상세히 묘사하며 ‘리얼리즘적 승리’를 성취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음.

유배기 정약용 문학 중 최고의 성취를 보여주는 작품이며, 추방된 자로서 정약용이 쓴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음.

“북으로 천 리를 날아 궁궐로 가거라, 임금님께 너희들의 충정을 하소연하고 깊은 슬픔 펼쳐 아뢰어라. 어려운 궁궐이라고 시비를 말 못하진 마라.”

->  임금의 시혜를 갈구하는 부분, 체제를 부정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약용이 창작한 애민시의 한계와 연결됨.

정약용은 백성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정치적 사상과 문학적 사상은 별개의 영역에 속하는 장르임. -> 따라서 <파리를 조문하는 글>과 정약용의 정치 사상적 입장을 연결지어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지내는 17년을 자신의 전 존재를 건 학문적 글쓰기를 통해, 그리고 백성의 고통을 대변하는 글쓰기를 통해 견뎌내었고, 이러한 글쓰기가 그를 살아있게 한 원동력이었을 것.

이학규의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이학규는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가는 사대문 밖 반송방에 있었음. 정약용, 이가환과 친인척 관계.

호는 낙하생(落下生)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뜻. -> 유배지 김해에서 사용한 호. 김해에 있지만 서울 사람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

이학규가 태어나기 전에 부친이 사망하여 집안이 넉넉치 못했고, 외가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게 됨. -> 이용휴가 외조부이고, 이가환이 외숙. 이가환은 정조 때 남인의 지도자격인 인물이었으며,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다가 배교하였지만,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도로 몰려 고문을 받고 사망하게 됨.

이학규는 이용휴에게 글을 배웠는데, 이용휴가 성호 이익의 조카이므로 성호 학통에 속한 학문을 배움.

정조 19년인 26살 때 포의의 신분은 규장각에서 <규장전운>의 교열 작업을 함. -> 포의 신분이지만 정조에게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교열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음.

  • <규장전운>: 동음(東音 : 朝鮮의 漢字音)과 화음(華音 : 中國의 本土字音)을 함께 표시한 운서로, 이덕무가 1792년(정조 16)까지 주로 편찬하고, 윤행임(尹行恁)·서영보(徐榮輔)·남공철(南公轍)·이서구(李書九)·이가환(李家煥)·성대중(成大中)·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이 교정한 다음, 1796년에 간행하였다. 그 뒤 방각본(坊刻本)으로도 많이 인행되어 이본이 많다.

그러나 정조가 급사하고 1801년에 신유옥사가 일어났고, 친인척인 이가환, 이승훈에 의해 연루되어 그해 2월에 의금부에 구금됨. 그리고 4월에 능주로 귀양을 가게 되고, 10월에 내종제인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터지자 다시 서울로 붙잡혀와 투옥되었다가 김해로 유배됨. 이때부터 1824년까지 23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됨. 이후 54살인 1824년 4월, 장남이 의금부에 소청하여 유배에서 풀려나게 됨. 서울에 올라와 정약용과 자하 신위를 방문해 서로 시를 수창하였음.

정약용은 귀양에서 돌아온 뒤 다시 강진에 돌아가지 않았지만 이학규는 유배에서 풀려난 그 해 가을 다시 김해로 돌아갔음. 이후 둘째 아들과 5, 6년 정도 김해에서 우거하다가, 1831년 경 충주 근처로 이거하였음. 그러나 이거한 뒤에도 김해에 자주 왕래함.

그리고 1833년 초가을에 정약용을 죽기 전 마지막으로 방문한 뒤 2년 후 충주 근처에서 생을 마감하게 됨.

이학규의 애민시[편집 | 원본 편집]

이학규 역시 유배지에서 애민시를 창작하였는데, 1809년 정약용의 <탐진농가>, <탐진촌요>, <탐진어가>를 본떠 <강창농가>, <남호어가>, <상동초가>를 창작하였음. -> 강창, 남호, 상동은 모두 김해의 지명.

1810년에는 정약용의 <전간기사>를 본떠 <기경기사>를 창작하였음. -> 대기근이 들었던 기사년과 경오년의 일을 기록한 시라는 뜻.

1808년에는 정약용의 <탐진악부>(현존하지 않음)을 본떠 <영남악부>를 창작했는데, 총 60수의 시가 수록되었고 매 시마다 서문 -> 본시가 나오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음. 영남의 인물, 민속, 고사를 읊은 시가 많지만 <소주도>, <철문어>처럼 탐관오리를 비판한 시들도 있음.

<소주도> : ‘소주를 마시는 무리’, 고려말 김진이 휘하의 무리들과 밤새 소주를 마시며 놀아 소주도로 불림. 엄격한 형벌로 군사들의 원망을 많이 샀었고, 결국 왜구가 쳐들어오자 군사들이 소주도가 나가 싸우라고 하며 싸우지 않아 결국 패했다고 함.

<철문어>: 철로 된 문어라는 뜻. 고려 말 계림 부윤을 지낸 배원룡의 별명. 백성들의 농기구까지 걷어갔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를 철문어라고 불렀음.

“철문어야! / 왜 밭을 파지 않고 / 도리어 백성을 노략질하는가? / (…) 계림에 이제 쇠붙이라곤 없으니 / 활을 당겨 水文魚라도 쏠 수 밖에”

->  이학규는 정약용과 같이 추방된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기 위해 애민시를 창작하였음. 그러나 “활을 당겨 수문어라도 쏠 수 밖에”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이학규는 백성을 저항적 주체로서 여기고 있음.

이학규가 1809년 창작한 <석민막지부행(땔나무 하러갈 때 도끼를 못 가지고 가게 한다)>에서도 백성의 저항적 주체로서의 면모가 나타남.

김해부사 민영철이 소나무를 못 베게 하려고 도끼를 다 빼앗았는데, 임기가 끝난 뒤 서울로 돌아가려고 하자 고을 경계에서 아낙네 대여섯명이 앞길을 막고 도끼의 행방을 물었음. 이학규는 고을 백성들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시를 지었음.

  • 정약용과 이학규의 태도 차이: 정약용은 자아를 놓지 않았기 때문에 시 속에서 시인의 목소리가 느껴지는 반면, 이학규에게 있어 시는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용도였으므로 자아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됨. -> 그렇기 때문에 이학규의 시에서는 윤리적 판단 등의 자아가 없이 대상의 충실한 재현만이 나타날 뿐임. <소주도>, <철문어> 등의 시에서도 현실을 비판하고 있지만 시인의 자아는 보이지 않음. 정약용의 <파리를 조문하다>가 정약용의 세계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실적 묘사를 통해 리얼리즘의 승리를 이루어 냈다면, 이학규의 <석신막지부행> 같은 작품은 작가가 자아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사실적 묘사가 가능해져 리얼리즘의 승리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님. 이학규도 백성에 대한 연민이 있었기 때문에 <기경기사>나 <철문어>와 같은 시를 창작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주관적으로 개입해 연민을 표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정약용과 차이점을 가짐. -> 자아를 표출하지 않고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대문에 지배층의 횡포, 민의 참혹성, 저항적 면모를 여실히 드러낼 수 있었던 것.

민요에 대한 관심[편집 | 원본 편집]

이학규는 민요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 민요풍의 한시를 여러 개 창작했는데, 모내기 노래를 항시화 한 <양가 오장> 같은 것이 있음.

<전하산가>, <후하산가> 같은 시도 민요에 대한 관심을 보여줌. 시의 서문에서 <하산가>는 김해의 여자 아이들이 산나물을 캘 때 부르는 노래다. (…) 한 명의 여아가 선창하면 열 명의 여아가 좇아 화답한다. 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음 -> 선창, 화답은 민요의 매김 소리와 받는 소리를 말하는 것

<걸사행>은 한시이나 민요의 리듬을 구현하고 있어 한시의 틀을 벗어남. -> 글자수를 일정한 규칙 없이 배열하며 격식을 완전히 파괴함. (19세기 유랑 지식인 김삿갓과 같은 파괴)

남사당패의 놀이를 자세히 읊은 노래인데, 남사당패의 음란한 행태를 윤리적 개입이나 가치 판단 없이 그대로 제시하고 있음. -> 사대부들의 한시는 반드시 윤리적 개입이나 가치 판단이 이루어지는데 그런 것이 없음.

기속시(紀俗詩)[편집 | 원본 편집]

이학규는 풍속이나 민속과 관련된 시를 많이 남김. <금관기속시>는 유배에서 풀리기 전인 1819년에 창작되었는데, 전부 59편 77수임. ‘금관’은 김해.

이 기속시들에서 서정 자아는 배제되고 대상의 충실한 묘사만이 나타남. -> 이학규는 기속시의 창작을 통해 사물에 눈을 돌리며 ‘배민(排悶)’, 즉 번민하는 자아를 잊고자 하였음.

김해는 문화적 변방으로써, 이학규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풍속이었음. 또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김해에는 전등신화나 삼국지연의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책이 존재하지 않았고, 학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음. -> 정약용이 지내던 강진(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의 수천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음.)과는 다른 존재여건. 따라서 학문을 하거나 체계적 저술을 하기는 어려웠음.

또한 이학규가 느끼기에 김해는 사대부들의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시료가 될 만한 것이 없었음. 따라서 일상에서 목도하는 김해의 풍속을 시로 창작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그러나 이학규가 자신의 배제한 채 김해라는 공간의 민속지를 낱낱이 기록한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주목되는 부분. -> 이학규가 어떠한 의식을 가진 채 기속시를 쓴 것은 아니고, 단지 무료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눈 앞에 벌어지는 풍경을 자아를 배제한 채 시로 읊은 것임.

기속시 중 <저자를 구경하다>라는 시가 있음. 이 시는 5언고시 160구의 장편인데, 세모의 김해 장시 풍경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음. -> 꾸밈이나 작위 없이, 도덕적 판단이나 가치 개입 없이 시골 장터라는 민중적 세계를 역동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문학적 성취가 돋보임.

시간과 슬픔을 견디기 위한 것으로서의 시[편집 | 원본 편집]

이학규가 유배지에서 쓴 시중에 <장난삼아 배체(해학적인 시체)를 지어 고민을 내쫒다>라는 것이 있음. ->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학규는 고민을 내쫓기 위해 시를 창작하였음.

배민을 하기 위한 시에서 이학규는 종종 우리말 속담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정약용처럼 우리말을 한문으로 바꾸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말 속담’을 한시에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함. -> 이러한 시에서는 사대부적 자아가 아닌 민중적 자아, 타자의 자아가 관찰됨.

이학규는 유배지에서 극도의 번뇌를 겪었고, 매일 되풀이되는 무료한 시간을 견디는 것도 힘든 일이었음. 이러한 감정을 배민하기 위해 시를 창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안과 밖의 경계가 주목됨. (내면에 있는 번뇌를 잊기 위해 바깥이 호출되고 있으므로.)

“시를 짓지 않으면 이리 기나긴 나날을 어찌 버티겠는가? (…) 심회를 스스로 억제하기 어려워질 때면 이리저리 시의 재료를 찾는다네. 이는 시를 짓는 게 목적이 아니라 거기에 마음을 부쳐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려 하는 거라네. (…) 이렇게 본다면 내가 유배 와서 지은 시는 참으로 시를 좋아해서가 아니요, 마음을 부치는 시를 지어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려 한 것이라네.” -<어떤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 이학규에게 시는 시간을 견뎌내는 유일무이한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음

“심회가 험궂어지면 더욱 스스로 견디기 어려워 문득 두어편의 시를 지어 어떻게든 고민을 떨칩니다. 이른바 ‘억지로 웃는 건 즐거워서가 아니며 길게 노래하는 건 통곡하는 것보다 슬프다.’는 격입니다.”

->  이학규는 자아를 잊기 위해 시를 썼기 때문에 그 시에 시인의 자아가 담기기 보다는 다른 자아, 혹은 바깥의 세계가 시 안으로 밀려들어오곤 했음. 이학규의 시에서 발견되는 민중적, 타자적 자아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포착된 것으로 보임.

마무리[편집 | 원본 편집]

정약용과 이학규는 신유박해에 연관되어 자신의 공간에서 추방되어 낯선 곳에서 긴 시간 고통으로 보내야 했음. 이들을 통해 극한 상황에서 글쓰기가 어떤 힘이 되는지, 삶을 어떻게 지탱해주는 지 알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