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고려 전기의 토풍과 화풍: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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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종과 도이장가] === | === [예종과 도이장가] === | ||
예종은 고려 16대 왕, 문학을 애호하고, 유불도의 균형을 통해 토풍과 화풍의 균형을 취하려고 노력한 왕임. | |||
<고려사> 예종세가 예종 10년 11월 기사 | |||
팔관회를 열었다. (…) 창우들에게 호위 행차에서 노래와 춤을 벌이게 하여 밤 12시 무렵까지 계속하였다. (…) | |||
<nowiki>:</nowiki> ‘창우(倡優)’는 팔관회의 배우들을 말함. 국왕이 창우들의 춤과 노래를 즐겼다는 것은 토풍에 대한 애호라고 해석할 수 있음. | |||
<고려사> 예종세가 예종 15년 10월 기사 | |||
팔관회를 열고 왕이 잡희를 관람하였다. 국초의 공신 김락과 신숭겸의 모습을 본뜬 우상이 있었는데, 왕이 감탄하여 시를 지었다. | |||
<nowiki>:</nowiki> 여기서 ‘시’는 한시를 의미함. 그러나 예종은 이때 <도이장가(悼二將歌)>라 하는 우리말 노래도 지었음. <장절공유사>의 내용 중 예종이 하사한 ‘단가 이장’이 <도이장가>를 의미함. | |||
(<장절공유사> 내용: 본책 205쪽) | |||
예종이 지은 노래 중 <도이장가>이외에 <벌곡조(伐谷鳥)>도 전하고 있는데, 새들의 울음소리를 사용해 신하들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을 요청하는 노래임. | |||
예종은 통치 이념에서 유불도의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는데, 이는 토풍과 화풍의 균형잡기와도 연결됨. -> 김락과 신숭겸의 후손에게 한시와 우리말 노래를 함께 지어줬다는 것에서도 이러한 균형잡기를 확인할 수 있음. | |||
예종은 태자일 때부터 중국의 경전을 공부했으며(김인존의 <논어신의>), 왕위에 올라서도 수시로 신하들에게 경연에서 유교 경전을 진강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도교에도 관심을 가졌음. 도가에 경도된 ‘곽여’라는 인물과 세자시절부터 친분을 다지고, 왕이 되어서는 궁궐에서 살게하고 ’선생’이라는 칭호를 붙여줌. 곽여가 궁이 답답하다고 하자 개성 근처에 산에 ‘허정재’라는 집을 지어주고, 몰래 찾아가기도 하였음. | |||
곽여는 해동도가에 속한 인물로 보이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토풍에 속해 있다 할 수 있음. 이러한 인물을 대우하였다는 점에서 예종이 유불도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음. | |||
=== [김부식과 묘청] === | === [김부식과 묘청] === | ||
인종 때 들어서 동아시아의 정세가 완전히 바뀌게 됨. 인종 3년인 1125년 금(金)에 의해 요(遼)가 망하고, 1127년 금에 의해 북송(北宋)이 망하고 남송(南宋)이 들어서게 됨.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 금나라가 급성장해 동아시아의 정세를 요동치게 만든 것. | |||
이 시기 고려 내부에서는 이자겸의 반란(1126년)이 일어나 개성의 궁궐이 불타고 왕권이 크게 훼손되게 됨. | |||
* 이자겸: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 외척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름 | |||
인종 초년에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고, 이자겸의 난까지 일어나자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이 개성의 지세가 다했으니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고, 정지상이 이를 지지하였음. 서경은 고려 초부터 중시되어왔고, 인종도 이자겸의 난 이후 실추된 왕권 회복이 필요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서경 천도 주장을 지지하였음.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을 지지하는 신하들도 적지 않았지만, 김부식을 위해 반대하는 문신들도 있었음. | |||
서경에 대화궁(大華宮)을 짓는 등 서경 천도가 어느정도 진행되자,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으로 행차해 ‘칭제건원’하라고 상주함. 그러나 김부식 등 신하들의 반대로 인종은 서경으로 행차하지 않았다. 서경 천도가 어려워지자, 묘청은 서경 사람들을 모아 국호를 ‘대위(大爲: 大有爲, 큰 뜻을 이룸)’, 연호를 ‘천개(天開: 하늘이 열림)’라 하여 칭제건원을 함. 국호와 연호에서 주체성과 의욕, 자긍심을 느낄 수 있음. | |||
묘청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서경천도를 반대하던 문신들은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였고, 반란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음. 이 주장이 힘을 얻어 김부식을 원수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도록 함. 김부식은 서경으로 이동하기 전에 김안, 백수한, 정지상 세 문신을 묘청과 반란을 공모했다는 죄명으로 참수함. 김안은 묘청의 근신이었고, 백수한은 묘청의 제자였지만 묘청과 거사를 공모했다고 보기는 어려움. 또한 정지상은 묘청의 하수인이나 지시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고, 단지 서경 출신 문인으로써 이념적, 세계관적 입장과 정치적 전망에 묘청과 공감대가 있었고, 연대를 꾀한 것으로 보임. | |||
<고려사> 정지상에 관한 내용 중 | |||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김부식이 평소 정지상과 더불어 문학으로 이름을 나란히 해 그새 불만이 쌓였으므로 이 때 이르러 그가 (묘청과) 내응(內應)했다고 칭탁해 살해했다.” | |||
이 말을 통해 당시 사람들도 김부식의 정지상 처형에 의문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 |||
이후 김부식은 난을 진압하고 최고의 공신자리에 올랐으며 정지상을 필두로 한 서경파가 제거되고, 개경파 문신 귀족 세력의 독주가 시작되게 됨. | |||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우리나라 천년의 역사 중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보았는데, 묘청의 난이 ‘낭불양가(郎佛兩家)’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고, ‘독립당’대 ‘사대당’의 싸움이라고 여겼음. 이 싸움에서 서경파가 패함으로써 유교의 사대주의가 득세하는 쪽으로 우리 역사의 방향이 잡혔다고 본 것. | |||
* 낭불양가(郎佛兩家): ‘낭불’은 낭가사상((郎家思想), 즉 화랑도의 풍류 사상과 불교를 말함. | |||
인종 때 서경파와 개경파의 대립이 첨예해진 것은 대외정세의 변화 때문임. 그동안 사대해왔던 송나라가 망하고 오랑캐로 여겼던 금나라가 신흥강자로 등장하면서 고려 지배층 내부는 정치적 노선의 차이에 따라 | |||
1.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 우리도 칭제건원해서 금나라와 대등하게 맞서야 한다. (대표: 서경파 정지상) | |||
2. 고래(古來)부터 대국이 소국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금나라가 대국이 되었으니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대표: 개경파 김부식) | |||
는 입장으로 나뉨. 다만 꼭 서경 출신만 1번 입장에 동의한 것은 아님. 윤언이는 서경 출신이 아니지만 칭제건원에 적극 동조함. | |||
중요한 것은 정치적 노선차이의 배후에 이념적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임. | |||
* 묘청: 민간신앙과 결부된 불교 사상, 민간 신앙과 결부된 도가 사상,(-> ‘낭가사상’) 풍수도참(風水圖讖) 사상, 음양비술(陰陽秘術) 등을 공부함.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의 궁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는데, 팔성의 이름이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실덕 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 등으로 '''도가의 명칭과 불교의 명칭이 결합되어 있음'''이 특징적임. ‘팔성’은 유교의 성인과 다른 동방의 성인인데, '''명칭에서 단군 신화나 산신 신앙이 감지된다는 것'''이 주목할 만함. (정지상은 ‘팔성’의 술법이 나라를 이롭게 하고 왕업을 늘린다고 보아 제문을 짓기도 하였음.) | |||
-> ‘팔성’의 상상력에는 토풍이 반영되어 있음. 팔성의 명칭이나 정지상의 제문을 통해 고려인의 주체성을 지키려는 분투를 확인할 수 있음. 자주적이고 고유한 관념형태이며, 서경파의 이념적, 세계관적 기반이라 할 수 있음. | |||
-> 즉, ‘칭제건원’이 정치적으로 현실적이었는가?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칭제건원’ 담론의 기저에 토풍이 자리하고 있음. | |||
* 김부식: 선조가 대대로 신라 사람이며, 중국의 명사에서 따온 이름에서부터 중국에 대한 강한 경사가 드러남. 묘청의 난이 진압된지 5년 뒤인 1141년에 고려는 금의 번국이 되어 금의 연호를 쓰기 시작함. 이로부터 4년 뒤인 인종 23년 김부식은 <삼국사기>을 인종에게 바침.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은 묘청의 난의 평정과 깊은 연관이 있음. 김부식은 관찬 사서를 통해 유교적 이념과 사대적 정치 노선을 정당화하고자 하였고, 고구려가 아닌 신라를 중심으로 삼는 사관을 정립하게 됨. 그러나 <삼국사기>는 문학적으로 형식이 자유로운 고문이 구사되어 있다는 점, <온달전>, <설씨전>과 같은 문예성이 높은 글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주목됨. 김부식은 인종 사후 <인종실록>을 편찬했는데, "(...) 북사를 대접하길 매우 공손히 아니, 이때문에 북인도 모두 공경하고 좋아하였다. (...)"는 찬을 붙였음. 이는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입장을 잘 보여줌. 이러한 김부식의 정치적 입장은 개경파 귀족 문신의 체질과 이해관계에 말미암은 것임.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서는 현상 유지가 필요했고, 때문에 변화를 추구한 서경파와 대립할 수 밖에 없었음. | |||
묘청의 난 이후 서경파의 견제가 사라져 개경파가 독주하게 되고, 이는 무신란을 야기하게 됨. | |||
=== [마무리] === | === [마무리] === | ||
화풍이 유교와 주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숭문적이거나 사대적 지향이 강한 것에 비해, 토풍은 풍류도, 선가, 불교와 더 큰 관련을 맺고 있고 자주적이며 상무적인 지향을 가지고 있음. | |||
문학 방면에서 토풍은 우리말 노래에 대한 애호와 결부됨. 화풍이 강해질 수록 우리말 노래에 대한 애호는 약하지고 한시문에 대한 애호가 커지는 것으로 보임. 그러나 한시문을 무조건 화풍으로 해석해서는 안됨. 그 속에 담지된 의식, 정신, 사상을 잘 헤아려야 함. | |||
EX) 정지상의 <팔성제문>: 형식은 한문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담겨 있는 내용은 토풍임. | |||
고려 초에 쓰인 현화사비 음기는 우리 문학사에서 시와 노래의 이원적 구조가 정착되었음을 확인해주는 의미가 있음. 이러한 시와 가의 이원구조는 19세기 말까지 지속되게 됨.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이원구조에 기본적으로 토풍과 화풍의 대립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임. | |||
- 윤서 |
2024년 5월 21일 (화) 18:26 기준 최신판
6강: 고려 전기의 토풍과 화풍
[토풍과 화풍이란][편집 | 원본 편집]
신라 말기 최치원에게서 문제가 되었던 동아시적 보편성은 고려 왕조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됨. 그리하여 고려 전기 문학사는 중국에 의해 마련된 동아시적 보편성을 공유하되 자국의 주체성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하는 이중의 과제에 직면하게 됨.
- 토풍: 우리나라의 고유한 풍속, 의례, 제도, 음악, 종교, 제사, 언어, 문학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
- 화풍: 우리나라에 수용된 중국 고유의 풍속과 문물 전반을 지칭하는 말.
토풍이 문학과 관련하여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임. 한글창제 이전에는 우리의 독자적인 언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말을 우리 문자로 표기할 수 없었음. 그래서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향찰’을 만듦. 이러한 점에서 향찰 표기에 의거한 향가는 모두 토풍이라 할 수 있음. 조선시대의 한글로 쓰인 시가나 편지, 수필, 소설 등도 그 언어적 지표로 보면 토풍이라 할 수 있을 것.
한글이라는 언어가 창제되기 이전의 문학사에서 우리말로 된 문학은 구전문학과 노래(시가)를 제외하고는 없음. 구전문학은 사라져 진면모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토풍이 확인되는 고려 시대의 문학으로는 향가, 경기체가, 고려속요, 시조 같은 노래에 특히 주목할 수밖에 없음.
한편 토풍과 달리 화풍에는 중국을 전범으로 삼는 의식(중화주의, 화이론)이 내재되어 있음. 화풍은 중국을 전범으로 삼기 때문에 화풍이 강해질 경우 중국 중심주의를 받아들이게 디어 주체성의 약화가 초래될 가능성이 커짐.
토풍과 화풍은 꼭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문화 전반의 문제에 해당함. 이 때문에 고려 지배층의 가치 지향, 문화적 지향과 ‘토풍’/’화풍’이라는 것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됨. 그러므로 여러 영역에 걸쳐 있는 토풍과 화풍을 이해하는 것은 고려전기의 문학은 물론이고 이후의 우리 문학사를 이해하는 것에도 큰 도움이 됨.
신라와 마찬가지로 고려 전기의 문헌은 대부분 소실되어 토풍과 화풍의 성쇠는 <고려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
- <고려사>: 조선 초에 편찬된 역사서, 고려 시대에 쓰인 문헌들에 의거하고 있어 고려의사정을 파악하는 것에 도움을 줌.
[태조의 <훈요십조>][편집 | 원본 편집]
<훈요십조(訓要十條)>
제4조: 우리 동방은 옛날부터 중국의 풍속을 흠모하여 (…) 지역이 다르고 인성도 각기 다르므로 꼭 같게 할 필요는 없다.
-> 예로부터 중국의 풍습을 따르기는 하였으나, 지역과 사람이 다르니 꼭 중국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말함. 토풍을 일정하게 긍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함.
제6조: 연등회와 팔관회에 있으니, (…) 후대의 간신들이 이 행사를 더하거나 줄일 것을 건의하는 것을 절대 금지하라.
-> 팔관회는 고려시대 국가적 차원의 놀이마당이었음, 원래 불교의 여덟가지 계율을 지키는 것과 관련된 의식이었는데, 고려 때와서 토속신에 대한 제사, 특히 자국 산처에 대한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성격이 바뀌게 됨. 신라의 풍류도와도 관련을 맺고 있는데, 풍류도는 화랑들이 산천에 노닐면서 가무를 하고, 심신을 수양하고, 하늘과 산악신을 숭배하는 풍습. 우리의 민간 신앙에서 유래함.
즉, 고려의 창업주인 왕건의 <훈요십조>에는 자국의 고유성과 독자성에 대한 긍정이 확인됨. 중국의 문물을 배우는 것은 무방하나, 자국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토풍의 긍정.
[광종의 과거제 시행][편집 | 원본 편집]
고려 제4대 임금인 광종때에 이르러 처음 과거제가 시행되게 됨, 과거제는 능력에 따라 인재를 뽑아 벼슬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골품제보다 나은 제도라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과거 시험 과목이 모두 중국의 경전이라는 점에서 ‘한화’의 진행을 가속화, 심화화하는 결과를 초래함.
그렇다보니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문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대부분 모화적 관념을 가지게 됨. 이러한 점에서 과거제는 ‘화풍’의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할 수 있음.
[최승로의 <시무 28조>와 팔관회의 위축][편집 | 원본 편집]
광종 다음 임금인 성종 때에 와서 팔관회가 중지되게 됨. 팔관회의 중지에는 ‘최승로’라는 유학자가 큰 관여를 함. 성종의 시대 최승로만큼 국가의 이념적 방향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없음.
최승로의 <시무 28조>: 중화의 제도는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습속은 각기 그 지역의 특성을 따르는 것이므로, 모두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악이나 시서의 가르침과 군신, 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화를 전범으로 삼아서 비루한 습속을 개혁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 거마와 의복의 제도는 토풍을 따라도 좋으니, (…) 중국과 꼭 같아질 필요는 없습니다.
“거마와 의복의 제도는 토풍을 따라도 좋으니, (…) 중국과 꼭 같아질 필요는 없습니다.
” -> <훈요십조>의 제 4조와 대동소이.
그러나 “예악이나 시서의 가르침과 군신, 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화를 전범으로 삼아서 비루한 습속을 개혁하도록 하고” -> ‘비루한 습속’은 토풍을 말하는 것, 토풍을 화풍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 예악은 유교적 통치의 근간이며, 시서는 문학을 뜻하는데, 중국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함.
이러한 입장에서 바라보면 토풍에 해당하는 우리말 노래(향가 등)은 열등하고 남루한 것으로, 한문으로 된 시는 우등하고 고상하다는 ‘우열’의 관점이 생기게 됨.
<시무 28조>: 우리나라는 봄에 연등화를 열고 겨울에 팔관회를 개최하여 사람들을 널리 징발해 노역이 대단히 번거로우니 이를 줄여 백성의 수고를 덜어주십시오. (…) 또한 우인은 상례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데, 중국 사신이 예전에 와서 이것을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던 일도 있으니, 바라옵건대 지금부터는 이것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옵소서.
팔관회는 고려의 토풍을 표상하는 중요한 의례 중의 하나임, 따라서 화풍을 규준으로 삼는 입장에서 팔관회는 ‘비루한 습속’의 하나로서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었음. 이와 관련해 최승로가 ‘우인’을 언급하고 있음이 지목됨.
- 우인(偶人): 우상(偶像), 짚 같은 것으로 만든 사람 모양. 연극 등에 사용됨.
최승로는 우인 제도를 혁파해야 할 이유로 우인을 만드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고, 실은 유교적 예법에 맞지 않는 다는 점이 주된 이유임.
-> 이러한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종은 팔관회의 잡기를 모두 혁파함. 성종 때와서 고려사회는 유교화가 좀 더 진전되었다 할 수 있음.
[서희와 이지백의 말][편집 | 원본 편집]
- 서희: 고려 성종 때의 문신, 거란이 침략했을 때 정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의 분위기는 거란의 요구대로 서경 이북 땅을 거란에게 내주고 화친을 맺자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음. 서희는 이에 반대해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군을 철수시킨 일로 유명.
<고려사> 열정 서희전에 보면 서희와 민관어사 이지백이 성종에게 아뢴 말이 실려 있음. (본책 197P)
“연등회, 팔관회, 선랑 등의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다른 나라의 괴이한 법을 본받지 말며”라는 말이 주목됨. 성종이 최승로의 건의에 따라 폐지한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거행하라는 요구이며, 중국의 제도와 풍속, 즉 화풍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음.
서희전에는 이지백의 말 바로 뒤에 “성종도 옳은 말이라 여겼다. 당시 성종이 화풍을 즐겨 따르는 것을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는 말이 나옴. 이를 통해 지배층은 화풍을 따랐지만, 백성들은 지배층이 화풍을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음.
[현화사비 음기 – 향가와 한시의 창작 양상][편집 | 원본 편집]
성종 다음 왕인 현종 대에는 다시 팔관회가 개최됨. 현종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현화사비(玄化寺碑)’라는 비석임.
현종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화사를 짓고, 이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음. 절이 완공된 것은 1021년인데, 이 비석에 음기(陰記)를 새긴 것은 1022년임.
- 음기: 비석 뒷면의 글, 현화사비 음기는 채충순이 짓고 씀.
현화사비 음기를 보면 현종은 신하들을 현화사로 데리고 가 자신이 먼저 한시 한 수를 짓고 신하들도 각각 한시를 한 수씩 지으라고 하였음. 그리고 지은 한시들을 판자에 새겨 절에 걸었음,
이후에 “방언과 풍속은 비록 중국과 같지 않지만, (…) 그래서 <시경>에서 “차탄하는 것으로 부족하므로 노래를 부르며, 노래하는 것으로 부족하므로 춤을 춘다.”고 한 것이다. 향풍체에 의거한 노래를 짓고, 신하들에게 절의 개창을 경축하는 시뇌가를 지어 바치라고 했는데, (…) 판자에 그것을 써서 법당의 밖에 걸어, 이 절에 놀러 온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 익힌 바에 따라 그 맑은 정취의 뜻을 알게 했다.”라는 진술이 등장한다.
‘방언’은 우리 말을 가리키고, ‘차탄한다’는 것은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시경>의 이 어구를 가져온 것은 향가 창작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임. 현종과 신하들이 한 수씩 한시를 지었으나 흥취를 제대로 풀 수 없었기 때문에 ‘향가’를 지었던 것.
마지막의 “판자에 그것을 써서 법당의 밖에 걸어, 이 절에 놀러 온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 익힌 바에 따라 그 맑은 정취의 뜻을 알게 했다”라는 말은 한시와 향가를 판자에 적어 절에 거니, 향가를 익힌 사람은 향가를 감상하고, 한시를 익힌 사람은 한시를 감상하라는 뜻임. 이를 통해 11세기 초엽에도 여전히 향가를 짓거나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알려줌.
-> 현화사비 음기는 11세기 초 현종조 때의 문학에서 화풍이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지 않았으며, 토풍과 화풍이 병존하고 있었음을 알려줌.
[문종 때의 상황 – 혁련정, 최충, 박인량][편집 | 원본 편집]
문종 때 혁련정이라는 선비가 <균여전>을 지음. <균여전>속에 향가인 <보현십원가> 11수가 실려 있음. <균여전>에 따르면 당시 <보원십원가>는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올라 전파되었다고 함. 이 향가를 통해 당시 토풍의 한 존재 양상이 확인 됨.
문종 때의 인물로는 최충과 박인량이 주목됨.
최충: “최충이 후진들을 모아 부지런히 가르치니, (…) 그래서 낙성재, 대중재, 성명재 등 9재로 나누어 가르쳤으며, (…) 교도로 삼아 9경, 3사를 가르치게 하였다. (…)” (201P)
è 9경은 중국의 경전을, 3사는 중국의 고대 역사서인 사기, 한서, 후한서를 의미함. 9재에서는 9경과 3사를 가르쳤고, 한시문 짓는 법을 가르쳤으며, 유교의 예법을 익히게 했다고 함. 과거제에 따른 교육인 것임. 당시 고려에는 최충의 9재 같은 것이 11개나 더 있었다고 함. 자연스럽게 토풍은 약화되거나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한문학은 점점 더 발전하게 됨. 이러한 경향은 고전문학이 끝나는 19세기까지 계속됨.
박인량: 문종 때 과거 급제, 김근과 함께 사신으로 송나라에 간 적이 있음. 중국인들에게 시문을 인정받아 중국에서 <소화집(小華集)>이라는 책이 간행됨. 이를 통해 이맘때의 고려 문인들의 시문 짓는 실력이 중국에 방불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음.
당시 남송과 요에 보내는 외교문서는 모두 박인량이 작성했을 정도로 한문에 몹시 능했음. 박인량은 두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모두 전하지 않음.
1. <고금록> 10권: 역사서일 것으로 추정.
2. <증보 수이전>: 한문으로 작성되었지만 토풍에 귀속된다 할 수 있음.
-> 이처럼 한 작가 내부에도 화풍과 토풍이 병존할 수 있음.
한문학을 이야기할 때, 한문학이라고 해서 모두 화풍이라고 말할 수는 없음. 표기 문자상의 한계가 있기는 하나, 한문학 내에도 화풍의 지향이 있는가 하면, 토풍의 지향도 존재함. 또 토풍에 가까운 지향이 있는가 하면 화풍에 좀 더 가까운 지향이 있을 수도 있다. 시대나 작가나 작품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텍스트에 담지된 의식이나 정서를 잘 파악해야 한다.
[예종과 도이장가][편집 | 원본 편집]
예종은 고려 16대 왕, 문학을 애호하고, 유불도의 균형을 통해 토풍과 화풍의 균형을 취하려고 노력한 왕임.
<고려사> 예종세가 예종 10년 11월 기사
팔관회를 열었다. (…) 창우들에게 호위 행차에서 노래와 춤을 벌이게 하여 밤 12시 무렵까지 계속하였다. (…)
: ‘창우(倡優)’는 팔관회의 배우들을 말함. 국왕이 창우들의 춤과 노래를 즐겼다는 것은 토풍에 대한 애호라고 해석할 수 있음.
<고려사> 예종세가 예종 15년 10월 기사
팔관회를 열고 왕이 잡희를 관람하였다. 국초의 공신 김락과 신숭겸의 모습을 본뜬 우상이 있었는데, 왕이 감탄하여 시를 지었다.
: 여기서 ‘시’는 한시를 의미함. 그러나 예종은 이때 <도이장가(悼二將歌)>라 하는 우리말 노래도 지었음. <장절공유사>의 내용 중 예종이 하사한 ‘단가 이장’이 <도이장가>를 의미함.
(<장절공유사> 내용: 본책 205쪽)
예종이 지은 노래 중 <도이장가>이외에 <벌곡조(伐谷鳥)>도 전하고 있는데, 새들의 울음소리를 사용해 신하들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을 요청하는 노래임.
예종은 통치 이념에서 유불도의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는데, 이는 토풍과 화풍의 균형잡기와도 연결됨. -> 김락과 신숭겸의 후손에게 한시와 우리말 노래를 함께 지어줬다는 것에서도 이러한 균형잡기를 확인할 수 있음.
예종은 태자일 때부터 중국의 경전을 공부했으며(김인존의 <논어신의>), 왕위에 올라서도 수시로 신하들에게 경연에서 유교 경전을 진강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도교에도 관심을 가졌음. 도가에 경도된 ‘곽여’라는 인물과 세자시절부터 친분을 다지고, 왕이 되어서는 궁궐에서 살게하고 ’선생’이라는 칭호를 붙여줌. 곽여가 궁이 답답하다고 하자 개성 근처에 산에 ‘허정재’라는 집을 지어주고, 몰래 찾아가기도 하였음.
곽여는 해동도가에 속한 인물로 보이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토풍에 속해 있다 할 수 있음. 이러한 인물을 대우하였다는 점에서 예종이 유불도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음.
[김부식과 묘청][편집 | 원본 편집]
인종 때 들어서 동아시아의 정세가 완전히 바뀌게 됨. 인종 3년인 1125년 금(金)에 의해 요(遼)가 망하고, 1127년 금에 의해 북송(北宋)이 망하고 남송(南宋)이 들어서게 됨.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 금나라가 급성장해 동아시아의 정세를 요동치게 만든 것.
이 시기 고려 내부에서는 이자겸의 반란(1126년)이 일어나 개성의 궁궐이 불타고 왕권이 크게 훼손되게 됨.
- 이자겸: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 외척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름
인종 초년에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고, 이자겸의 난까지 일어나자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이 개성의 지세가 다했으니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고, 정지상이 이를 지지하였음. 서경은 고려 초부터 중시되어왔고, 인종도 이자겸의 난 이후 실추된 왕권 회복이 필요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서경 천도 주장을 지지하였음.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을 지지하는 신하들도 적지 않았지만, 김부식을 위해 반대하는 문신들도 있었음.
서경에 대화궁(大華宮)을 짓는 등 서경 천도가 어느정도 진행되자,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으로 행차해 ‘칭제건원’하라고 상주함. 그러나 김부식 등 신하들의 반대로 인종은 서경으로 행차하지 않았다. 서경 천도가 어려워지자, 묘청은 서경 사람들을 모아 국호를 ‘대위(大爲: 大有爲, 큰 뜻을 이룸)’, 연호를 ‘천개(天開: 하늘이 열림)’라 하여 칭제건원을 함. 국호와 연호에서 주체성과 의욕, 자긍심을 느낄 수 있음.
묘청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서경천도를 반대하던 문신들은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였고, 반란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음. 이 주장이 힘을 얻어 김부식을 원수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도록 함. 김부식은 서경으로 이동하기 전에 김안, 백수한, 정지상 세 문신을 묘청과 반란을 공모했다는 죄명으로 참수함. 김안은 묘청의 근신이었고, 백수한은 묘청의 제자였지만 묘청과 거사를 공모했다고 보기는 어려움. 또한 정지상은 묘청의 하수인이나 지시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고, 단지 서경 출신 문인으로써 이념적, 세계관적 입장과 정치적 전망에 묘청과 공감대가 있었고, 연대를 꾀한 것으로 보임.
<고려사> 정지상에 관한 내용 중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김부식이 평소 정지상과 더불어 문학으로 이름을 나란히 해 그새 불만이 쌓였으므로 이 때 이르러 그가 (묘청과) 내응(內應)했다고 칭탁해 살해했다.”
이 말을 통해 당시 사람들도 김부식의 정지상 처형에 의문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이후 김부식은 난을 진압하고 최고의 공신자리에 올랐으며 정지상을 필두로 한 서경파가 제거되고, 개경파 문신 귀족 세력의 독주가 시작되게 됨.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우리나라 천년의 역사 중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보았는데, 묘청의 난이 ‘낭불양가(郎佛兩家)’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고, ‘독립당’대 ‘사대당’의 싸움이라고 여겼음. 이 싸움에서 서경파가 패함으로써 유교의 사대주의가 득세하는 쪽으로 우리 역사의 방향이 잡혔다고 본 것.
- 낭불양가(郎佛兩家): ‘낭불’은 낭가사상((郎家思想), 즉 화랑도의 풍류 사상과 불교를 말함.
인종 때 서경파와 개경파의 대립이 첨예해진 것은 대외정세의 변화 때문임. 그동안 사대해왔던 송나라가 망하고 오랑캐로 여겼던 금나라가 신흥강자로 등장하면서 고려 지배층 내부는 정치적 노선의 차이에 따라
1.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 우리도 칭제건원해서 금나라와 대등하게 맞서야 한다. (대표: 서경파 정지상)
2. 고래(古來)부터 대국이 소국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금나라가 대국이 되었으니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대표: 개경파 김부식)
는 입장으로 나뉨. 다만 꼭 서경 출신만 1번 입장에 동의한 것은 아님. 윤언이는 서경 출신이 아니지만 칭제건원에 적극 동조함.
중요한 것은 정치적 노선차이의 배후에 이념적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임.
- 묘청: 민간신앙과 결부된 불교 사상, 민간 신앙과 결부된 도가 사상,(-> ‘낭가사상’) 풍수도참(風水圖讖) 사상, 음양비술(陰陽秘術) 등을 공부함.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의 궁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는데, 팔성의 이름이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실덕 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 등으로 도가의 명칭과 불교의 명칭이 결합되어 있음이 특징적임. ‘팔성’은 유교의 성인과 다른 동방의 성인인데, 명칭에서 단군 신화나 산신 신앙이 감지된다는 것이 주목할 만함. (정지상은 ‘팔성’의 술법이 나라를 이롭게 하고 왕업을 늘린다고 보아 제문을 짓기도 하였음.)
-> ‘팔성’의 상상력에는 토풍이 반영되어 있음. 팔성의 명칭이나 정지상의 제문을 통해 고려인의 주체성을 지키려는 분투를 확인할 수 있음. 자주적이고 고유한 관념형태이며, 서경파의 이념적, 세계관적 기반이라 할 수 있음.
-> 즉, ‘칭제건원’이 정치적으로 현실적이었는가?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칭제건원’ 담론의 기저에 토풍이 자리하고 있음.
- 김부식: 선조가 대대로 신라 사람이며, 중국의 명사에서 따온 이름에서부터 중국에 대한 강한 경사가 드러남. 묘청의 난이 진압된지 5년 뒤인 1141년에 고려는 금의 번국이 되어 금의 연호를 쓰기 시작함. 이로부터 4년 뒤인 인종 23년 김부식은 <삼국사기>을 인종에게 바침.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은 묘청의 난의 평정과 깊은 연관이 있음. 김부식은 관찬 사서를 통해 유교적 이념과 사대적 정치 노선을 정당화하고자 하였고, 고구려가 아닌 신라를 중심으로 삼는 사관을 정립하게 됨. 그러나 <삼국사기>는 문학적으로 형식이 자유로운 고문이 구사되어 있다는 점, <온달전>, <설씨전>과 같은 문예성이 높은 글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주목됨. 김부식은 인종 사후 <인종실록>을 편찬했는데, "(...) 북사를 대접하길 매우 공손히 아니, 이때문에 북인도 모두 공경하고 좋아하였다. (...)"는 찬을 붙였음. 이는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입장을 잘 보여줌. 이러한 김부식의 정치적 입장은 개경파 귀족 문신의 체질과 이해관계에 말미암은 것임.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서는 현상 유지가 필요했고, 때문에 변화를 추구한 서경파와 대립할 수 밖에 없었음.
묘청의 난 이후 서경파의 견제가 사라져 개경파가 독주하게 되고, 이는 무신란을 야기하게 됨.
[마무리][편집 | 원본 편집]
화풍이 유교와 주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숭문적이거나 사대적 지향이 강한 것에 비해, 토풍은 풍류도, 선가, 불교와 더 큰 관련을 맺고 있고 자주적이며 상무적인 지향을 가지고 있음.
문학 방면에서 토풍은 우리말 노래에 대한 애호와 결부됨. 화풍이 강해질 수록 우리말 노래에 대한 애호는 약하지고 한시문에 대한 애호가 커지는 것으로 보임. 그러나 한시문을 무조건 화풍으로 해석해서는 안됨. 그 속에 담지된 의식, 정신, 사상을 잘 헤아려야 함.
EX) 정지상의 <팔성제문>: 형식은 한문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담겨 있는 내용은 토풍임.
고려 초에 쓰인 현화사비 음기는 우리 문학사에서 시와 노래의 이원적 구조가 정착되었음을 확인해주는 의미가 있음. 이러한 시와 가의 이원구조는 19세기 말까지 지속되게 됨.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이원구조에 기본적으로 토풍과 화풍의 대립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임.
- 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