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강 삼국 다시 읽기와 토풍의 소환―『삼국유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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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강 삼국 다시 읽기와 토풍의 소환 -<삼국유사> ==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 130년 후에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함. 일연은 대몽항쟁기를 살았던 사람으로, <삼국유사> 속에는 민족적 위기에 대한 일연 나름대로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음.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 130년 후에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함. 일연은 대몽항쟁기를 살았던 사람으로, <삼국유사> 속에는 민족적 위기에 대한 일연 나름대로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음.


일연은 김부식과는 다른 관점으로 ‘삼국 다시 읽기’ 함으로써 민족적 주체성을 이끌어 내고 있음.  
일연은 김부식과는 다른 관점으로 ‘삼국을 다시 읽기’ 함으로써 민족적 주체성을 이끌어 내고 있음.  


<삼국유사>는 한문으로 쓰였지만, 화풍이 아닌 토풍을 적극적으로 소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임. 이러한 점에서 <삼국유사>는 13세기 후반에 나타난 하나의 커다란 문학사적 사건.
<삼국유사>는 한문으로 쓰였지만, 화풍이 아닌 토풍을 적극적으로 소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임. 이러한 점에서 <삼국유사>는 13세기 후반에 나타난 하나의 커다란 문학사적 사건.

2024년 3월 29일 (금) 01:31 판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 130년 후에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함. 일연은 대몽항쟁기를 살았던 사람으로, <삼국유사> 속에는 민족적 위기에 대한 일연 나름대로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음.

일연은 김부식과는 다른 관점으로 ‘삼국을 다시 읽기’ 함으로써 민족적 주체성을 이끌어 내고 있음.

<삼국유사>는 한문으로 쓰였지만, 화풍이 아닌 토풍을 적극적으로 소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임. 이러한 점에서 <삼국유사>는 13세기 후반에 나타난 하나의 커다란 문학사적 사건.

일연의 생애

일연은 1206년 최충 집권기에 경주의 속현인 장산군에서 태어남. 일연의 비문 중 “아버지가 좌복야(左僕射)에 추증(追贈)되었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족 집안이거나 향리 집안 출신으로 여겨짐.

일연은 9세 때 광주 무등산에 있는 절에서 공부를 하였음. 다만 불교 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음. 14세 때 승려가 되기 위해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에 갔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정식 승려가 되었음. 신라 말 선종(禪宗)이 일어날 때 9개의 문파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가지산파(迦智山派)이고 그 개창자가 도의 선사(道義 禪師). 진전사는 도의 선사가 은거했던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구족계를 받은 일연을 가지산파의 승려라고 부름.

22세에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1236년 31세에 몽골의 침입을 겪음. 41세인 1246년 남해의 정림사(定林寺)라는 절에 있으면서 대장경을 조판하는 일에 참여함. 당시 남해에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이라는 관서가 있었는데, 이곳에 속해 문도들과 대장경 조판에 참여하였음. 이는 일연의 생애에서 중요한 대목임. 대장경 조판에는 불법의 힘을 빌려 몽골침입에 맞서 나라를 수호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

51세때는 남해의 길상암에 있으며 <중편조동오위(重編曺洞五位)>를 편찬.

  • <중편조동오위>: 고려후기 승려 일연이 조동오위설에 대하여 해석을 덧붙인 주석서. 불교서.

중국 선종의 일파인 조동오위설은 중국의 동산양개(洞山良介)가 제창한 편정오위설(偏正五位說)을 말한다.  일연은 이 오위설의 편정(偏正)에 각각 군신(君臣)을 대비시켜 군신오위설(君臣五位說)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조동선의 극치를 제5 겸대위(兼帶位)라고 보았는데, 이것은 바로 ‘군·신·도합(道合)의 경지’를 나타낸다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일연의 선사상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일연은 다양한 저술을 하였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중편조동오위>와 <삼국유사> 밖에 없음.

1259년 고려와 몽골이 강화를 맺고, 이후 ‘원간섭기’가 시작됨. 일연은 1277년(충렬왕 3년)에 왕명으로 경상북도 청주의 운문사 주지가 되어 4년동안 머무르게 됨. 이 시기 <삼국유사>를 편찬했을 것으로 추정됨. 4년 뒤인 충렬왕 7년 때, 경주에 와 있던 충렬왕의 行在所에 불려감.

  • 행재소(行在所): 왕이 상주하는 궁궐을 떠나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別宮).

당시 원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선박을 제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충렬왕은 이를 독려하고자 경주에 내려왔던 것. 이때 일연은 몽골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를 목도함.

2년 뒤인 1283년, 일연의 나이 78세에 국사(國師)가 되고, 이 해 연로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감. 1년 뒤 모친이 사망하게 됨.

모친이 사망한 뒤 경상북도 군위에 있는 인각사의 주지가 되어 머무름. <삼국유사>는 이 절에서 완성됐을 것이라고 추정됨. 일연이 주지로 있던 당시 인각사는 당시의 산문(山門)을 포괄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가 두 번이나 열림. 이를 통해 일연이 당시 고려불교의 중심적인 인물이었으며, 선종 9문 중 가지산파가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음.

  • 구산문(선종 9문): 선종 구산(禪宗九山)은 남북국 시대의 신라 때부터 시작되어 고려 태조 때 완성된 불교 선종(禪宗)의 구산문(九山門)을 가리킨다. 가지산문 · 동리산문 · 봉림산문 · 사굴산문 · 사자산문 · 성주산문 · 수미산문 · 실상산문 · 희양산문이다

일연은 12889년 입적하고, 나라에서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내림.

<삼국유사>의 찬술동기

일연이 몽골 항쟁기를 살았으며, 원 간섭기에 <삼국유사>를 집필하였다는 사실은 <삼국유사>의 찬술동기를 살펴볼 때 매우 중요함. 대장경 조판 사업에 참여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연은 호국(護國)의 뜻이 있었음.

<삼국유사> 기이 편의 고조선 조에는 단군신화가 나옴. 단군의 내력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이 책이 처음임. 왕력 편에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단군지자(檀君之子)’라고 하며 단군과 고구려를 연결시켜 놓음. 단군과 고구려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지만, 일연의 이러한 서술은 단군과 고구려를 연결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연속성과 유구성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음.

-> 그렇다면 이러한 서술은 자국의 고유한 유래를 강조하여 내적결속을 다짐으로써 원의 압제에 대한 ‘정신적 대응’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음.  

일연은 <삼국유사> 곳곳에서 호국불교를 긍정하고 있음. 그는 승려로써 호국불교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 호국불교의 오랜 전통을 삼국의 역사에서 확인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임. <삼국유사> 속 불교관련 서사에는 국가의 안위, 국가 수호가 빈번하게 문제되고 있음. 즉, 국가와 불교는 불가분한 관계라고 본 것.

->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몽골의 침입과 압제에 대한 정식적, 이념적 맞섬이 <삼국유사> 찬술의 중요한 하나의 동기라고 볼 수 있음.

한편으로는 삼국시대 역사를 보는 관점의 차이가 또 다른 찬술 동기가 되고 있기도 함.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반하여 편찬되었지만, <삼국유사>는 불교적 신비주의 사관에 의거해 편찬되었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삼국시대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서술되었지만, 일연이 <삼국사기>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님. <삼국사기>에 대한 불만으로 <삼국유사>를 썼다는 견해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여러 난점이 있음.

<삼국유사>의 곳곳에는 <삼국사기>의 인용이 있음. 대개 신뢰할 수 있는 근거로서 <삼국사기>를 인용하거나 거론하고 있음.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일연이 <삼국사기>를 부정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움. 또한 <삼국유사> 속 동명왕에 대한 서술은 <삼국사기> 속 서술과 거의 동일한데, 일연은 구<삼국사>가 아닌 <삼국유사> 속 서술을 취한 것임. 이러한 예를 통해 일연이 <삼국사기>를 존중했음을 알 수 있음. 즉,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없는 이야기를 엮어 <삼국사기>를 보완하고 삼국의 역사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자국의 고유성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음.

-> 요컨대 일연은 <삼국사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책으로 <삼국유사>를 기획한 것으로 보임. 다른 관점을 통해 삼국을 다시 바라보았으므로 <삼국사기>와는 다른 의미망이 구축될 수 있었던 것.

<삼국유사>에서 확인되는 토풍

고려 시대 들어와 토풍은 한 편에서 지속되지만, 그럼에도 한문학의 발전에 따라 차츰 위축되는 양상을 보였음. 그러나 13세기 후반 원 간섭기에 <삼국유사>가 편찬됨으로써 토풍은 다시 소화되게 됨.

불교는 토속적인 것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내부에 포용하려는 태도를 취함. 그렇기 때문에 ‘습합’이 잘 일어나 유교와는 달리 토풍에 친화적인 종교라 할 수 있음. <삼국유사>는 기본적으로 불교를 토대로 삼고 있는 저술임. 그러나 불교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삼국유사>는 토풍이 적극적으로 솧화되고 있음.

<삼국유사> 속 토풍은 두 가지 방식으로 소환되는데,

1.    불교와 토풍이 결합된 방식.

2.    불교와 별도로 토풍이 제시되는 방식.

->  불교와 토풍이 결합된 경우가 상대적으로 더 많지만, 이러한 이야기에서 불교는 단지 외적 요소에 불가하거나 견경부회로 결부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음. 즉, 불교와 토풍이 결합된 경우라도 그 본질은 토풍에 있다.

<삼국유사>는 王歷, 紀異, 興法, 塔像, 義解, 神呪, 感通, 避隱, 孝善 총 9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 왕력: 연표
  • 기이: 고조선에서 후삼국까지의 기이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음.
  • 흥법: 삼국의 불교 수용기에 있었던 이야기
  • 탑상: 탑과 불상에 관련된 이야기들
  • 의해: 신라의 교학승(敎學僧)들에 대한 이야기
  • 신주: 신라의 밀교승(密敎僧)에 대한 이야기
  • 감통: 불교의 여험 이야기
  • 피은: 은일담(隱逸談)

[<삼국유사> 속 이야기들]

  • 수로부인 이야기: 불교적 요소가 발견되지 않음. 산신이나 수신은 민간적 상상물의 소산. 토속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음.
  • 도화녀 비형랑: 불교적 요소가 없는 신이한 이야기.
  • 사금갑: 불교적 요소 없이 신라의 고유한 풍속의 기원에 대한 서사적 풀이. 민간적 세계관이 표현됨. 최치원이 <수이전>에 쓴 것을 옮겨놓은 것.

<삼국유사> 의해 편에 [원광서학(圓光西學: 원광이 중국에 가서 불교를 배우다.)]이라는 항목이 있음. 이 항목 중 <수이전>에 있던 <원광법사전>이 그대로 옮겨져있음.

  • 원광법사전: 이야기의 주인공인 원광이 승려이니 불교와의 관련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흥미를 자아내는 존재는 삼기산의 신임. 여우의 신이함에 대한 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불교적 상상력이 아닌 민간적 상상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음.
  • 거타지: <원광법사전>과 달리 여우가 악한 존재로 등장. 역시 토속적 상상력을 보여줌.
  • 처용랑: 신라 풍속의 기원을 풀이하고 있음. 마지막에 불교와 관련된 내용인 “왕이 처용을 위해 망해사라는 절을 세웠다.”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지만, 서사적 흐름을 볼 때 없어도 괜찮은 내용임.
  • 미륵선화 미시랑과 진자사: 토풍과 불교의 습합을 잘 보여줌. ‘진자사’에서 ‘사’는 승려를 의미함. 진자사는 진자라는 승려를 의미. ‘랑’은 화랑을 의미. 이야기 속에 화랑에 대한 언급이 여러 군데 나오고, 풍월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언급도 등장함.
  • 신라에서 화랑을 종종 미륵선화라고 불렀는데, 이 이야기는 그 기원을 풀이하고 있음. 화랑이라는 존재가 미륵불의 현현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미륵 신앙과 풍월도를 연결시키고 있음. 토착적인 세계관과 불교의 습합을 보여주는 이야기.

->  <삼국유사>에는 이처럼 토속적인 서사가 불교적 외피를 쓰고 있거나 윤색이 가해진 것들이 많음. 불교적 이야기 같더라도 그 본질에 토풍이 짙게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음. <삼국유사>의 불교적인 내용 역시 중요하지만, 단지 불교적인 것으로만 단정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음.

<삼국유사> 서사의 특징

1.    상하층이 망라되어 있음

: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상하층이 망라되어 있음. 그렇지만 주목되는 것은 하층의 이름 없는 백성들에 대한 존중과 친화감이 짙게 표출되어 있다는 것. 이 점이 <삼국유사>를 우리 문학사의 다른 저술들과 구별짓게 됨.

ex) <욱면비염불서승>: 욱면이라는 여종이 염불을 해서 서방 정토로 올라갔다.는 이야기. 욱면은 종이면서 여성이라 이중의 타자에 해당하는 인물임. 이러한 이물이 극락으로 갔다고 하는 점에서 여성과 하층민을 존중하며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발견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임.

<광덕엄장>: 일연은 광덕의 처가 관음보살의 19응신의 하나라고 말함. <삼국유사>에서 관음보살은 미천한 여성으로 응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점에서 보면 19응신이라는 관념은 현실 세계의 미천한 여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긍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음.

그러나 광덕의 처를 관음의 화신이라고 한 것은 미천한 여성의 고매함을 설명할 수 없어 불교적 입장에서 가져다 붙인 것이고, 현실적인 맥락에서 생각하자면 미천한 하층민 중에서도 도가 높은 인물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전하고 있는 것.

-> 이러한 예를 통해 <삼국유사>의 서사 특징 중 하나가 하층민에 대한 존중임을 알 수 있음.

2.    보잘것없고 남루한 인간에 대한 긍정

: <삼국유사>에서 이러한 인간들은 대개 이인(대부분 불보살)으로 현신함. 용렬하고 남루한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세속적인 인간은 이인을 알아보기 어려움.

불보살들이 미천한 존재로 현신하는 이유는 인간의 겉이 아닌 속을 보아야 한다는 일연의 인간학이라고 할 수 있음. 미천해 보이는 인간이 오히려 성스러운 인물일 수 있다는 메시지가 내재해있다 할 수 있음.  

ex) 경흥우성: 문수보살이 외양이 남루한 거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국사 경흥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음.

진신수공: 석가불이 행색이 초라한 승려로 현신함.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 서답(생리대) 빠는 여인이 관음보살의 진신이었음.

이 이야기는 상하의 전복을 이야기 한다는 해석이 재기되어 있지만, 관점을 달리해보면 인간을 제대로 알아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음.

연회도명: 밭 갈던 노인은 문수보살이고, 노파는 변재천녀였음. 연회는 도가 높은 인물이지만 두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음. 인간으로 화현한 성스러운 존재를 알아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하고 있는 이야기.

->  이러한 예를 통해 <삼국유사>의 서사에는 남루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확인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음.

->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서답빠는 여인이나, 노파 등 남루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에 여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이를 통해 <삼국유사>의 서사에 젠더적으로 진보적인 측면이 있다 할 수 있을 듯함.

<삼국유사>의 성격-술이부작

<삼국유사>는 일연이 견문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아닌, 문헌에서 가져온 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음. 이에 민간의 구전을 간단히 보충하거나, 자신이 보거나 들은 사실을 첨부한 경우는 이따금 있음. 즉, <삼국유사>는 ‘술이부작(述而不作): 이전의 문헌은 정리, 편집하였을 뿐 창작은 아님.’이라 할 수 있음.

일연이 자료를 편집한 방식으로는

1.    어떤 자료를 그대로 옮겨 싣는 방식: <수이전>에서 그대로 옮겨온 <김현감호> 같은 것.

2.    몇 개의 자료를 한 데 묶어 병렬적으로 제시하는 방식: 중국의 <속고승전(續高僧傳)>, <수이전>, <삼국사기> 열전의 내용을 차례로 제시해 놓은 <원광서학>

3.    하나의 자료를 기본으로 삼되 다른 자료를 참조해 수정하여 제시하는 방식: <백월산양성성도기>라는 고기를 바탕으로 하되 다른 자료를 참조해 약간 수정을 가한 <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

이 있음. 주목할 점은 일연이 고증을 중요시 여겨 본문의 여기저기에 협주(夾註)를 많이 달아놓았다는 것임. 이를 통해 일연이 문헌을 취급할 때 디테일과 사실관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알 수 있음. 다만, 역사적 사실만이 아니라 설화에까지 이러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기도 함.

협주 이외에도 일연은 작품의 말미에 ‘의왈(議曰: 논의하여 말한다)’로 시작하는 사설의 논찬에 해당하는 논평을 붙여놓은 것과, ‘찬왈(讚曰)’이라는 자신이 지은 한시로 된 게송(偈頌)을 첨부하기도 하였음.

  •   게송: 불교에서 붓다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한시 형식의 노래이다

‘찬왈’이나 ‘의왈’은 모든 작품에 첨부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작품에 첨부되어 있음. 이는 다른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삼국유사>의 독특한 면모라 할 수 있음.

일연이 참조한 문헌들

일연은 <삼국유사>를 엮을 때 아주 많은 문헌을 참조한 것으로 보임.

  • 중국 문헌: 역사서에 대항하는 <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당나라 구우가 편찬한 <통전(通典)>, 송나라 때 편찬된 백과사전인 <책부원귀(冊府元龜)>, 양나라 혜교가 지은 고승전인 <고승전(高僧傳)>, 당나라 도선이 지은 <속고승전(續高僧傳)> 등
  • 우리 문헌: <단군기(檀君記)> 新羅古記, 高麗古記를 비롯한 古記류, <수이전>, <증보 수이전>, <삼국사기>를 많이 참조함. 각훈이 쓴 <해동고승전>을 참조했지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함. 이외에도 <원효전>, <의상전>, <범일전>, <보덕전>, <욱면전>, <양지법사전>, <낭지전> 다양한 고승전을 참조함. 이 외에도 사찰에 전하는 옛 기록이나 문서를 많이 참고함. 가야의 역사를 기록한 <가락국기(駕洛國記)>도 참조함.

->  이를 통해 <삼국유사> 서사의 중요한 원천을 크게 고기(古記), <수이전>(<증보 수이전> 포함), 고승전(高僧傳), 사기(史記)로 꼽을 수 있음.

이 가운데 <수이전>과 <삼국유사>의 관련을 보자면,

<삼국유사>는 <수이전>에서 많은 이야기를 가져왔는데, <수이전>의 이야기를 인용할 때 최치원의 <수이전>은 고본(古本)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음.

  • 고본: 동경(경주)의 안일(安逸) 호장(戶長)이 소장하고 있던 고본 <수이전> 지칭

당시에는 고려 초 박인량이 편찬한 <증보 수이전>이 널리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구별을 위해 고본이라는 말을 쓴 것으로 보임.

<삼국유사>에서 ‘고본’이라는 말이 발견되는 작품은 <도화랑 비형랑>, <태종춘추왕>, <효공왕>, <무왕>, <원광서학>, <손순매아> 등임.

일연은 <증보 수이전>의 내용과 차이가 있어 언급할 필요가 있을 때만 협주를 통해 ‘고본’을 언급했고, 아닐 경우 <수이전>의 내용을 옮겨 싣더라도 언급하지 않았음. <연오랑 세오녀>, <김현감호>, <탈해왕>, <사금갑>, <도화녀 비형랑>, <민장사> 같은 작품에는 <수이전>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문헌 연구를 통해 <수이전>에서 가져온 것임이 확인됨. 따라서 실증적인 문헌 대조는 어렵지만 <삼국유사>에는 <수이전>의 내용이 생각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여겨짐.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삼국유사>가 세 번째 버전의 <수이전>이라 할 수 있는 측면이 있음. <수이전>의 이전 버전과 달리 세 번째 버전에는 편찬자의 의견과 육성이 곳곳에 삽입되어 있고, 일종의 고이(考異: 텍스트들 간의 내용차이를 고증하는 것)가 가해져 있다는 차이가 있음. 이 때문에 이전의 <수이전>이 신이한 이야기 책으로 기획된 것과 달리 <삼국유사>는 ‘역사’로 기획되었다는 차이를 보여줌.

->  역사기록으로서의 면모를 중시하여 의식적으로 자료를 편집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으로서의 서사적 완결성은 이전 버전보다 약화되었음.

->  그러나 단군신화나, 동명왕 신화를 싣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버전들과는 달리 민족적 자의식의 강화가 나타나고 있음.

->  또한, 고기나 사찰기록을 비롯한 수많은 문헌을 참조함으로써 이전보다 훨씬 다채롭고 풍부한 내용을 구축하고 있음.

<삼국유사>의 문학사적 의의

<삼국유사>는 고조선과 삼국, 특히 신라의 기이한 이야기들을 13세기 말에 되살려내고 있고, 자국의 고유성이 담긴 이야기라는 점에서 <삼국유사>는 토풍을 소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또한 지금은 전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각종 문헌에 담긴 서사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어 羅麗時代 서사문학의 보고라 할 수 있음.

<삼국유사>는 역사의 외관을 취하고 있기도 해 역사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본질상 ‘문학’으로 봐야활 것임. 문학으로서의 <삼국유사>는 신비주의적 세계관으로 인간과 세계를 해석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