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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소품, 혹은 패사소품 명말청초 소주, 항주와 같은 강남의 도회를 중심으로 ‘소품’이 성행함. 소품: 짧은 형식의 산문, 인간의 삶과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리면서 작가의 감정이나 욕망을 진솔하게 드러냄. 우리 문학사에서 소품이 문제되는 것은 영, 정조 때. 이 시기 활동한 젊은 문신들은 대개 소품에 대한 취향이 있었음. -> 정조가 문체반정을 통해 소품을 금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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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천은 서해의 어떤 섬에 진인이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이는 <정감록>과 관련이 있음. 즉, 강이천 비어 사건은 천주교와 <정감록>이 결합된 사건. 그런데 사건의 심각성에 비해 경미하게 처벌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벽파쪽에서는 계속해서 재조사를 요구하였음. 정조는 천주교 문제를 크게 확대시키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를 계속 묵살함. (남인세력에 천주교와 연관된 사람이 많아서 남인과 노론의 균형을 위해서는 문제 삼기 어려웠음. -> 따라서 정조는 천주교 탄압보다는 주자학의 강조로 천주교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함.) | 강이천은 서해의 어떤 섬에 진인이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이는 <정감록>과 관련이 있음. 즉, 강이천 비어 사건은 천주교와 <정감록>이 결합된 사건. 그런데 사건의 심각성에 비해 경미하게 처벌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벽파쪽에서는 계속해서 재조사를 요구하였음. 정조는 천주교 문제를 크게 확대시키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를 계속 묵살함. (남인세력에 천주교와 연관된 사람이 많아서 남인과 노론의 균형을 위해서는 문제 삼기 어려웠음. -> 따라서 정조는 천주교 탄압보다는 주자학의 강조로 천주교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함.) | ||
하지만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벽파가 권력을 잡고 신유옥사를 일으켰고, 강이천 비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다시 붙잡혀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게 됨. | 하지만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벽파가 권력을 잡고 신유옥사를 일으켰고, 강이천 비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다시 붙잡혀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게 됨. 이때 김건순은 참수형을 당했고, 강이천과 김이백도 처형되게 됨. 김건순은 정약종과 함께 사대부 가운데 쌍벽을 이루던 천주교 지도자이자 이론가였음. 또 노론쪽 인물이었고 박지원이 인정할 만큼 비상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음. 노론의 비상한 인물이 천주교를 믿은 것은 이례적인 일. | ||
이 사건에 이옥은 연루되지 않았으나 강이천과 소북으로 당색이 같았기 때문에 교유가 있었음. 김려는 이 때 진해로 유배가게 됨. | 이 사건에 이옥은 연루되지 않았으나 강이천과 소북으로 당색이 같았기 때문에 교유가 있었음. 김려는 이 때 진해로 유배가게 됨. |
2024년 9월 30일 (월) 18:04 판
소품, 혹은 패사소품
명말청초 소주, 항주와 같은 강남의 도회를 중심으로 ‘소품’이 성행함.
소품: 짧은 형식의 산문, 인간의 삶과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리면서 작가의 감정이나 욕망을 진솔하게 드러냄.
우리 문학사에서 소품이 문제되는 것은 영, 정조 때. 이 시기 활동한 젊은 문신들은 대개 소품에 대한 취향이 있었음. -> 정조가 문체반정을 통해 소품을 금한 이유.
조선에서는 소품과 패사라는 말을 결합해 패사소품이라는 말을 썼는데, 소품과 달리 패사소품은 소설과도 관계가 있게됨. (소설체의 산문 -> 패사소품체)
소품이나 패사소품은 정통 고문과는 다른 글쓰기.
고문: 유교(주자학)의 가치의식과 예교를 벗어나지 않으며 질서와 규범을 지킴
<-> 소품/패사소품: 질서나 규범의 이탈을 보여주기도 함.
따라서 주자학의 회복을 원했던 정조에게 소품은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고, 금지하였던 것.
정조 때 이덕무, 박제가나 박지원 등이 문체와 관련하여 정조의 견책을 받긴 하였지만, 벼슬에 지장이 있지는 않았음. 그러나 이옥은 이들과 달리 서얼이었기 때문에 문체반정의 희생양이 되어 큰 타격을 입었음.
이옥은 소품으로 문학 공부를 시작하였고, 김려는 이옥과 절친한 벗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 패사소품에 심취한 문인이었음. 소품은 산문에 국한되어 쓰이는 말이지만, ‘소품적 취향’은 산문이 아니라 시에서도 발견가능 함. 두 사람은 소품체 한시를 구사한 시인으로도 주목됨.
김려의 생애
김려는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호는 담정. 원래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김려 당대에는 벌열층은 아니었음. 18세기 후반에 들어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나뉘어 크게 대립했는데, 김려의 집안은 노론 시파에 속했음.
김려는 정조 4년 성균관에 입학했고, 그 때 같은 성균관 학생이던 이옥과 교제하게 됨. 정조 16년 27살 때 진사시에 합격했고, 이해에 김조순과 더불어 <우초속지>라는 패사소품서를 저술함. -> <우초속지>에는 김려와 김조순이 쓴 패사소품적 전 50여편이 실려있었다고 전해짐. 현전하지 않음. 김려의 글 일부가 김려의 문집인 <담정유고>에 단량패사라는 이름으로 수습되어 있음.
김려는 정조 21년 32살 때 강이천의 비어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가게되었고, 유배 중이던 1799년에 아버지를 여의게 됨. 1801년에는 신유옥사가 일어나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고 진해로 유배를 가게됨. 김려는 진해에서 <사유악부>, <우해이어보>, <방주를 위한 시> 등을 지었음. -> <유해이어보>는 진해의 특이한 물고기들에 대해 기록한 책이라는 뜻으로, 진해에 서식하는 72종의 어패류에 대한 자세한 기록.
김려는 41살 때인 순조 6년 유배에서 풀려나게 됨. 당시 순조의 장인이었던 친구 김조순의 도움이 있었음. 유배에서 풀려난 뒤 김려는 부친의 묘가 있는 공주로 가 3년동안 상복을 입었고, 46살 때인 1811년 서울 삼청동으로 이거하였고, 47~52살까지 말단 내직을 지내다가 1817년 연산 현감에 제수되어 지방관으로 나가게 됨. 이곳에서 1819년까지 재직하다가, 몸의 병을 이유로 사직함. 1820년 함양 군수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임지에서 사망하였음.
김려의 생애에서는 성균관 시절 / 강이천 비어 사건 / 유배기 라는 세 국면이 특히 문제가 됨.
성균관 시절의 김려: 옥대체 시와 소품에의 경도
김려는 열다섯 살 때 성균관에 입학해 유배 가기 전까지 성균관에 출입했음. (1780~1797. 17년간)
이 시기에 교유한 인물들은 이안중, 이우신, 이노원, 김조순, 이옥, 권상신, 김선신 등이었는데, 이 중에 이옥과 김선신은 서얼이었음. 김려는 이옥과 각별하게 친한 사이었음.
김려는 위 인물들의 주요 작품들을 말년에 <담정총서>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 엮었고, 여기실린 글들은 패사소품과 옥대체 시가 많음. 이안중, 이우신, 이옥, 이노원 등은 옥대체라고 불리는 여성적 정조가 현저한 시를 특히 애호했는데, 김려는 이들과 교유하면서 여성적, 낭만적 취향의 문학에 경도되게 됨.
옥대체: 중국 남조 진나라의 서릉이 편찬한 <옥대신영>이라는 책에 여성적 정조가 현저한 시들이 많이 실려 있어 그러한 정서의 시를 이 책의 이름울 따 ‘옥대체’, 혹은 ‘향렴옥대체(향렴체)’라고 부름. 향렴은 부녀자들의 화장 도구를 넣어두는 상자. -> 도학자나 선비들은 옥대체 시가 경박하고 부화하다고 여겨 잘 짓지 않았음.
김려의 문학적 취향은 그가 당대의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게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짐.
소품체는 원래 중국의 명말청초에 성행하였고, 1. 인간의 개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는 점, 2. 정욕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는 점에서 주목됨. 이때문에 ‘감정 해방’이라고 할 만한 문학적 현상이 명말청초의 사대부 문학에 나타나게 됨. Ex) 공안파인 원굉도의 문학. (공안파는 상소문등의 정론문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주변의 소소한 일을 짧은 글로 표현하는 것에 관심을 둠. 그래서 小品체라고 불린 것.) 양명학, 특히 좌파 양명학에서 유교적 예교를 반대하며 인간의 욕망과 감정의 해방을 적극적으로 긍정한 것이 사상적 배경이 됨.
그러나 정조 연간에 들어서 소품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게 됨. 소품체가 시와 연결될 경우 옥대체와 연결되고, 섬세하고 기려하거나 첨신한 시풍을 보여주게 됨. -> 유교에서 강조하는 온유돈후함과는 대척점에 있게 되는 것. 따라서 소품문은 소재나 그 문학적 지향이 기존의 고문과 달랐고(소재 선정, 예교나 이념에 구애받지 않음), 수사법의 차이(소품문은 고문과 달리 균형감각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가 나타남.
=>따라서 소품은 고문과 달리 순정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지속적으로 받았음.
성균관 시절 김려는 김조순과 친하게 지냈는데, 김조순은 명문 벌열가의 자제였음에도 소품문을 좋아하였음.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집안의 좋고 나쁨을 막론하고 젊은 문인들은 대개 소품문의 영향을 받았음. 소품문이 당대 젊은이들 사이의 유행이었던 것.
소품적 글쓰기는 감수성과 상상력을 새롭게 확장하였고, 이 점에서 보수적인 인물에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소품적 글쓰기 자체만으로는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거나 근대적 지향을 가지지 못함. 하지만 소품적 글쓰기 중 일부는 명백히 근대적 지향을 가지고, 특히 김려와 이옥의 글쓰기 중 몇몇은 시대의 명확한 근대적 지향을 보여줌. -> 이는 한국고전문학사에서 중요한 현상.
강이천 비어 사건
강이천 비어 사건은 김려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임.
강이천 비어 사건은 강이천이 퍼뜨린 유언비어 사건이라는 뜻. 강이천은 탈놀이에 관한 시 <남성관희자>를 쓰기도 하였고, 표암 강세황의 손자임. 강세황은 정조로부터 융성한 대접을 받았었음. 이 집안의 당색은 소북. 강이천의 문집인 <중암고>가 현전하는데, 참신한 글들이 더러 보임. 이를 통해 강이천이 사고가 참신하고 문학적 역량이 있는 문인이었음을 알 수 있음.
강이천은 정조 10년 20살 때 진사가 되었고, 11년 후인 정조 21년 강이천 비어 사건이 터지게 됨. 강이천은 김건순 및 김건순의 친적인 김이백, 김려 등과 어울려 천주교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서해의 어떤 섬에 진인이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죄목으로 형조에서 심문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됨. 이때 김이백은 흑산도로, 김려는 부령으로 유배를 갔음. 김건순은 대단한 벌열가의 종손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책없이 방면됨. (이것은 후일 문제가 된다.)
강이천은 서해의 어떤 섬에 진인이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이는 <정감록>과 관련이 있음. 즉, 강이천 비어 사건은 천주교와 <정감록>이 결합된 사건. 그런데 사건의 심각성에 비해 경미하게 처벌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벽파쪽에서는 계속해서 재조사를 요구하였음. 정조는 천주교 문제를 크게 확대시키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를 계속 묵살함. (남인세력에 천주교와 연관된 사람이 많아서 남인과 노론의 균형을 위해서는 문제 삼기 어려웠음. -> 따라서 정조는 천주교 탄압보다는 주자학의 강조로 천주교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함.)
하지만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벽파가 권력을 잡고 신유옥사를 일으켰고, 강이천 비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다시 붙잡혀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게 됨. 이때 김건순은 참수형을 당했고, 강이천과 김이백도 처형되게 됨. 김건순은 정약종과 함께 사대부 가운데 쌍벽을 이루던 천주교 지도자이자 이론가였음. 또 노론쪽 인물이었고 박지원이 인정할 만큼 비상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음. 노론의 비상한 인물이 천주교를 믿은 것은 이례적인 일.
이 사건에 이옥은 연루되지 않았으나 강이천과 소북으로 당색이 같았기 때문에 교유가 있었음. 김려는 이 때 진해로 유배가게 됨.
1797년 강이천 비어 사건이 논의 중일 때 정조가 했던 말을 보면,
“저 이른바 김려 형제는 또한 본디 소품을 하는 사람들로 일컬어진다.” – 승정원일기 1797년 11월 11일 기사 —>소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나타남.
“강가의 문체를 보면 초쇄부경하니 전적으로 소품이다.”
->강가는 강이천, 초쇄나 부화경박은 소품을 비난할 때 쓰이던 말. 이를 통해 강이천도 소품에 경도되었음을 알 수 있음.
유배기의 김려
김려는 함경도 부령에서 3년 5개월, 남쪽의 진해에서 5년 4개월, 9년가까이 유배생활을 하였음. 김려는 부령의 한 기생과 깊은 사랑을 나누고 그곳의 토착민들과 사귀며 우정을 나누었는데, 정약용이나 이학규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할 수 있음. -> 이러한 차이는 유배지에서 비롯됨. 김려가 유배간 부령은 남방과 풍토가 달랐기 때문. 그러나 김려가 이들과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이었떤 것이 가장 큰 이유일듯.
김려는 자유분방하고 직정적인 기질의 인간이라 부령의 기생이나 병사, 이민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음. 이 때문에 김려의 유배생활은 특이한 양상을 보임.
부령은 아주 거친 땅이고, 이곳의 사람들은 호랑이나 곰 같은 야생동물을 상대하며 살아가야 했음. 김려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북방의 거친 자연을 만나고, 지배층의 수탈과 싸우는 민중들의 삶을 목도하게 됨. 또한 이 과정에서 기생이나 이민들과 같은 하층민에게도 고귀한 덕성과 인간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됨. 즉, 김려는 부령에서 삶의 다른 접촉면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척박한 삶의 조건에서도 의연하게 살아가는 북방 민중에게 큰 애정을 가지게 되었음. -> 이러한 경험을 통해 김려의 인식과 문학은 유배 이후 크게 바뀌게 되었음. 특히 여성과 민중에 대한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었음. 김려의 여성에 대한 인식은 다른 작가들과 확연히 다름. 여성을 종속적인 존재,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인격을 가진 독립된 주체로서의 여성’으로 여기었고, 평등한 관계속의 주체이자 친교의 대상으로 여기었음.
<사유악부>
김려의 대표작으로는 <사유악부>, <방주를 위한 시> 둘을 꼽을 수 있음.
<사유악부>는 진행에 유배온 해인 1801년 12월에 창작되었음. 김려의 문집인 <담정유고>에 실린 본은 총 290수이고, 김려가 편찬한 책인 <담정총서>에 실린 본은 총 300수임.
김려는 부령에서 애정을 나누었던 기생 연희와, 친교를 맺었던 사람들을 그리워 하며 이 시를 창작한 것으로 보임.
이 작품은 악부시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 또한 ‘사유’라는 말은 ‘생각의 창’이라는 뜻임. 김려는 진해에 오자 집의 오른쪽 창호에 사유라고 쓴 편액을 걸었음. <사유악부> 서문에 의하면 “남쪽으로 옮겨 와 하루도 북쪽을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없어” 그리 했다고 함. 즉, 생각의 창은 곧 그리움의 창이며, 김려가 창을 바라보며 북쪽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