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강 김려와 이옥, 근대의 성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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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시절 이옥은 문예적 가치가 높은 참신한 글을 많이 썼는데, <이언> 서문인 일난(一难), 이난, 삼난 세 편이 근대적 지향을 뚜렷히 보여줌.
성균관 시절 이옥은 문예적 가치가 높은 참신한 글을 많이 썼는데, <이언> 서문인 일난(一难), 이난, 삼난 세 편이 근대적 지향을 뚜렷히 보여줌.


<이언>은 우리말 노래, 조선 노래라는 뜻으로ㅠ
<이언>은 우리말 노래, 조선 노래라는 뜻으로 아조(바른곡조) 17수, 염조(부염한 곡저) 18수, 탕조(방탕한 곡조) 15수, 비조(원망하는 곡조) 16수 이렇게 정조를 달리하는 66수의 시가 실려 있음. 그리고 이 시들의 앞 부분에 일난, 이난, 삼난 이라는 서문이 붙어 있는 것. 난은 힐난하다라는 뜻으로 혹자의 힐난에 대해 작자가 해명하는 방식이라 이러한 제목이 붙은 것. -> 이는 <이언>의 시가 세간의 반발과 의혹을 불러 일으킬 수 있어 작자가 미리 자기 변론을 한 것으로 여겨짐.
 
이옥은 <시경>의 국풍을 근거로 하며 <이언>의 시를 옹호하고 있음.
 
<일난>
 
<nowiki>:</nowiki> 혹자는 작자가 어떤 존재인지 묻고, 이옥은 “작자란 천지 만물의 통역자”라고 말함. 즉, 작자는 세계를 표현하는 매개자라는 뜻. 또 만물의 개별성과 차이에서 ‘개성’이 나오기 때문에 이를 강조하고 있음.
 
“어찌하여 대청 건륜 연간에 태어나 조선 땅 한양성에 살면서 감히 짧은 목을 늘어뜨리고 가는 눈을 부릅뜨고서 망령되이 국풍, 악부, 사곡의 작자를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조선 땅에 살면 국풍, 악부, 사곡(중국 작품)이 아닌 우리 작품을 써야 한다는 주장. 이옥은 작자는 자신이 속한 시공간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시공간과 작자는 본질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고, 작자는 세계의 통역자로서 세계를 충실히 표현해야 하기 때문임.
 
<이난>
 
<nowiki>:</nowiki> 혹자(예교주의자)는 <이언>에서 왜 여자만 노래했는가?라고 질문하고, 이옥은 “남녀의 정만큼 진실한 것은 없으며, 이야말로 거짓되지 않고 진실한 정“이라고 답변함. <금병매>, <육포단>처럼 음탕한 문학도 남녀의 진실한 감정을 그린 것이기 떄문에 보이기 따라 긍정할 수 있다 함.
 
<삼난>
 
<nowiki>:</nowiki> 혹자는 <이언>이 향명(우리말 명칭)을 사용하고 있음을 힐난하고, 이옥은 “나는 내 이름을 이름으로 하고, 내 자를 자로 하고 있다“라고 답변함. ‘나’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이자, 선언.
 
또 한자어와 우리말은 다르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음. 따라서 우리 말을 버리고 중국인의 말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선언도 함. 동시대의 박제가가 우리 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쓰자는 주장을 한 것과는 상반되는 주장. 이옥은 이러한 이유로 우리말로 시를 써야 옳다고 주장함.
 
“우리가 어찌하여 반드시 우리의 명칭을 버리고 저들의 명칭을 따라야 하겠는가? 저들은 어찌하여 그 명칭을 버리고 우리의 명칭을 따르지 않는단 말인가?”
 
ㅡ> ‘언어성 주체성’에 대한 자각. 이옥은 중국인은 중국의 언어를, 조선인은 조선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이언>의 향명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음.
 
<삼난>은 전근대적 틀을 벗어나 근대적 담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글이라고 할 수 있음. 시공간의 개별성이나, 향명, 속담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정약용, 이학규, 박지원에게서도 발견되지만, 이들과 달리 이옥은 인식을 전면적으로 이론화하여 선언하는 것까지 이르렀음. 이러한 점에서 <삼난>은 조선 문학의 새로운 창작 방법, 미증유의 새로운 노선을 천명한 비평문이라 할 수 있음.
 
<삼난> 속 이옥의 주장이 심화되면 국문시의 창작이 정당화 됨. 즉, <삼난>의 이론적 귀결은 국문시 창작이라고 여겨짐. 하지만 국문시 창작은 실제로 실현되지는 못함. <이언>은 우리말 노래라는 뜻을 가졌지만 한시로 창작되었고, 이옥 본인도 국문시를 창작하지는 않았음. 이 점에서 <이언>은 한문학 내부의 혁신에 불과할 뿐, 한문학을 넘어서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가짐.
 
하지만 <이언>은 국문시 창작의 문턱에 이르러있고, 근대성을 선취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음.
 
<이언> 아조 중의 한 수
 
“어려서 익힌 궁체 글씨 / 이응 자가 약간 각이 져 있네. / 시부모가 글씨 보고 기뻐하시며 / 언문 여제학이라 하시네”
 
ㅡ> 궁체, 이응, 언문 여제학은 모두 우리말.
 
<이언>의 시들은 정치적 의식이나 사회적 의식 보다 세태적이고 풍속적임. 또한 여성의 모습이 대상화되어 있음. 이옥의 여성에 대한 의식은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음.
 
 
<nowiki>*</nowiki>연객 허필의 국문시
 
이덕무의 <이목구심서>
 
“어떤 사람이 관아재 조영석이 그린 동국 풍속도를 수집해서 그대로 베낀 것이 70여 첩이나 되었는데 허필이 이 그림들을 국문으로 평했다.”
 
ㅡ> 허필은 조영성의 그림 70여점에 국문으로 제화시를 썼음. (현전하지 않음.) 이덕무는 <이목구심서>에 허필의 국문시를 한문으로 번역해서 실어놓음.
 
허필은 이옥과 마찬가지로 당색이 소북이었음. 이옥이 당색이 같은 허필의 국문시를 접했을 수도 있음.
 
 
마무리
 
이옥과 김려는 소품체를 밀고 나가 조선의 다른 작가들이 이르지 못한 경지를 보여줌. 이를 통해 근대성을 선취하고 있다고 보임.
 





2024년 10월 14일 (월) 14:33 기준 최신판

소품, 혹은 패사소품[편집 | 원본 편집]

명말청초 소주, 항주와 같은 강남의 도회를 중심으로 ‘소품’이 성행함.

소품: 짧은 형식의 산문, 인간의 삶과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리면서 작가의 감정이나 욕망을 진솔하게 드러냄.

우리 문학사에서 소품이 문제되는 것은 영, 정조 때. 이 시기 활동한 젊은 문신들은 대개 소품에 대한 취향이 있었음. -> 정조가 문체반정을 통해 소품을 금한 이유.

조선에서는 소품과 패사라는 말을 결합해 패사소품이라는 말을 썼는데, 소품과 달리 패사소품은 소설과도 관계가 있게됨. (소설체의 산문 -> 패사소품체)

소품이나 패사소품은 정통 고문과는 다른 글쓰기.

고문: 유교(주자학)의 가치의식과 예교를 벗어나지 않으며 질서와 규범을 지킴

<-> 소품/패사소품: 질서나 규범의 이탈을 보여주기도 함.

따라서 주자학의 회복을 원했던 정조에게 소품은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고, 금지하였던 것.

정조 때 이덕무, 박제가나 박지원 등이 문체와 관련하여 정조의 견책을 받긴 하였지만, 벼슬에 지장이 있지는 않았음. 그러나 이옥은 이들과 달리 서얼이었기 때문에 문체반정의 희생양이 되어 큰 타격을 입었음.

이옥은 소품으로 문학 공부를 시작하였고, 김려는 이옥과 절친한 벗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 패사소품에 심취한 문인이었음. 소품은 산문에 국한되어 쓰이는 말이지만, ‘소품적 취향’은 산문이 아니라 시에서도 발견가능 함. 두 사람은 소품체 한시를 구사한 시인으로도 주목됨.

김려의 생애[편집 | 원본 편집]

김려는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호는 담정. 원래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김려 당대에는 벌열층은 아니었음. 18세기 후반에 들어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나뉘어 크게 대립했는데, 김려의 집안은 노론 시파에 속했음.

김려는 정조 4년 성균관에 입학했고, 그 때 같은 성균관 학생이던 이옥과 교제하게 됨. 정조 16년 27살 때 진사시에 합격했고, 이해에 김조순과 더불어 <우초속지>라는 패사소품서를 저술함. -> <우초속지>에는 김려와 김조순이 쓴 패사소품적 전 50여편이 실려있었다고 전해짐. 현전하지 않음. 김려의 글 일부가 김려의 문집인 <담정유고>에 단량패사라는 이름으로 수습되어 있음.

김려는 정조 21년 32살 때 강이천의 비어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가게되었고, 유배 중이던 1799년에 아버지를 여의게 됨. 1801년에는 신유옥사가 일어나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고 진해로 유배를 가게됨. 김려는 진해에서 <사유악부>, <우해이어보>, <방주를 위한 시> 등을 지었음. -> <유해이어보>는 진해의 특이한 물고기들에 대해 기록한 책이라는 뜻으로, 진해에 서식하는 72종의 어패류에 대한 자세한 기록.

김려는 41살 때인 순조 6년 유배에서 풀려나게 됨. 당시 순조의 장인이었던 친구 김조순의 도움이 있었음. 유배에서 풀려난 뒤 김려는 부친의 묘가 있는 공주로 가 3년동안 상복을 입었고, 46살 때인 1811년 서울 삼청동으로 이거하였고, 47~52살까지 말단 내직을 지내다가 1817년 연산 현감에 제수되어 지방관으로 나가게 됨. 이곳에서 1819년까지 재직하다가, 몸의 병을 이유로 사직함. 1820년 함양 군수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임지에서 사망하였음.

김려의 생애에서는 성균관 시절 / 강이천 비어 사건 / 유배기 라는 세 국면이 특히 문제가 됨.

성균관 시절의 김려: 옥대체 시와 소품에의 경도[편집 | 원본 편집]

김려는 열다섯 살 때 성균관에 입학해 유배 가기 전까지 성균관에 출입했음. (1780~1797. 17년간)

이 시기에 교유한 인물들은 이안중, 이우신, 이노원, 김조순, 이옥, 권상신, 김선신 등이었는데, 이 중에 이옥과 김선신은 서얼이었음. 김려는 이옥과 각별하게 친한 사이었음.

김려는 위 인물들의 주요 작품들을 말년에 <담정총서>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 엮었고, 여기실린 글들은 패사소품과 옥대체 시가 많음. 이안중, 이우신, 이옥, 이노원 등은 옥대체라고 불리는 여성적 정조가 현저한 시를 특히 애호했는데, 김려는 이들과 교유하면서 여성적, 낭만적 취향의 문학에 경도되게 됨.

옥대체: 중국 남조 진나라의 서릉이 편찬한 <옥대신영>이라는 책에 여성적 정조가 현저한 시들이 많이 실려 있어 그러한 정서의 시를 이 책의 이름울 따 ‘옥대체’, 혹은 ‘향렴옥대체(향렴체)’라고 부름. 향렴은 부녀자들의 화장 도구를 넣어두는 상자. -> 도학자나 선비들은 옥대체 시가 경박하고 부화하다고 여겨 잘 짓지 않았음.

김려의 문학적 취향은 그가 당대의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게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짐.

소품체는 원래 중국의 명말청초에 성행하였고, 1. 인간의 개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는 점, 2. 정욕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는 점에서 주목됨. 이때문에 ‘감정 해방’이라고 할 만한 문학적 현상이 명말청초의 사대부 문학에 나타나게 됨. Ex) 공안파인 원굉도의 문학. (공안파는 상소문등의 정론문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주변의 소소한 일을 짧은 글로 표현하는 것에 관심을 둠. 그래서 小品체라고 불린 것.) 양명학, 특히 좌파 양명학에서 유교적 예교를 반대하며 인간의 욕망과 감정의 해방을 적극적으로 긍정한 것이 사상적 배경이 됨.

그러나 정조 연간에 들어서 소품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게 됨. 소품체가 시와 연결될 경우 옥대체와 연결되고, 섬세하고 기려하거나 첨신한 시풍을 보여주게 됨. -> 유교에서 강조하는 온유돈후함과는 대척점에 있게 되는 것. 따라서 소품문은 소재나 그 문학적 지향이 기존의 고문과 달랐고(소재 선정, 예교나 이념에 구애받지 않음), 수사법의 차이(소품문은 고문과 달리 균형감각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가 나타남.

=>따라서 소품은 고문과 달리 순정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지속적으로 받았음.

성균관 시절 김려는 김조순과 친하게 지냈는데, 김조순은 명문 벌열가의 자제였음에도 소품문을 좋아하였음.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집안의 좋고 나쁨을 막론하고 젊은 문인들은 대개 소품문의 영향을 받았음. 소품문이 당대 젊은이들 사이의 유행이었던 것.

소품적 글쓰기는 감수성과 상상력을 새롭게 확장하였고, 이 점에서 보수적인 인물에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소품적 글쓰기 자체만으로는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거나 근대적 지향을 가지지 못함. 하지만 소품적 글쓰기 중 일부는 명백히 근대적 지향을 가지고, 특히 김려와 이옥의 글쓰기 중 몇몇은 시대의 명확한 근대적 지향을 보여줌. -> 이는 한국고전문학사에서 중요한 현상.

강이천 비어 사건[편집 | 원본 편집]

강이천 비어 사건은 김려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임.

강이천 비어 사건은 강이천이 퍼뜨린 유언비어 사건이라는 뜻. 강이천은 탈놀이에 관한 시 <남성관희자>를 쓰기도 하였고, 표암 강세황의 손자임. 강세황은 정조로부터 융성한 대접을 받았었음. 이 집안의 당색은 소북. 강이천의 문집인 <중암고>가 현전하는데, 참신한 글들이 더러 보임. 이를 통해 강이천이 사고가 참신하고 문학적 역량이 있는 문인이었음을 알 수 있음.

강이천은 정조 10년 20살 때 진사가 되었고, 11년 후인 정조 21년 강이천 비어 사건이 터지게 됨. 강이천은 김건순 및 김건순의 친적인 김이백, 김려 등과 어울려 천주교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서해의 어떤 섬에 진인이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죄목으로 형조에서 심문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됨. 이때 김이백은 흑산도로, 김려는 부령으로 유배를 갔음. 김건순은 대단한 벌열가의 종손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책없이 방면됨. (이것은 후일 문제가 된다.)

강이천은 서해의 어떤 섬에 진인이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이는 <정감록>과 관련이 있음. 즉, 강이천 비어 사건은 천주교와 <정감록>이 결합된 사건. 그런데 사건의 심각성에 비해 경미하게 처벌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벽파쪽에서는 계속해서 재조사를 요구하였음. 정조는 천주교 문제를 크게 확대시키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를 계속 묵살함. (남인세력에 천주교와 연관된 사람이 많아서 남인과 노론의 균형을 위해서는 문제 삼기 어려웠음. -> 따라서 정조는 천주교 탄압보다는 주자학의 강조로 천주교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함.)

하지만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벽파가 권력을 잡고 신유옥사를 일으켰고, 강이천 비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다시 붙잡혀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게 됨. 이때 김건순은 참수형을 당했고, 강이천과 김이백도 처형되게 됨. 김건순은 정약종과 함께 사대부 가운데 쌍벽을 이루던 천주교 지도자이자 이론가였음. 또  노론쪽 인물이었고 박지원이 인정할 만큼 비상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음. 노론의 비상한 인물이 천주교를 믿은 것은 이례적인 일.

이 사건에 이옥은 연루되지 않았으나 강이천과 소북으로 당색이 같았기 때문에 교유가 있었음. 김려는 이 때 진해로 유배가게 됨.

1797년 강이천 비어 사건이 논의 중일 때 정조가 했던 말을 보면,

“저 이른바 김려 형제는 또한 본디 소품을 하는 사람들로 일컬어진다.” – 승정원일기 1797년 11월 11일 기사 —>소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나타남.


“강가의 문체를 보면 초쇄부경하니 전적으로 소품이다.”

->강가는 강이천, 초쇄나 부화경박은 소품을 비난할 때 쓰이던 말. 이를 통해 강이천도 소품에 경도되었음을 알 수 있음.

유배기의 김려[편집 | 원본 편집]

김려는 함경도 부령에서 3년 5개월, 남쪽의 진해에서 5년 4개월, 9년가까이 유배생활을 하였음. 김려는 부령의 한 기생과 깊은 사랑을 나누고 그곳의 토착민들과 사귀며 우정을 나누었는데, 정약용이나 이학규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할 수 있음. -> 이러한 차이는 유배지에서 비롯됨. 김려가 유배간 부령은 남방과 풍토가 달랐기 때문. 그러나 김려가 이들과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이었떤 것이 가장 큰 이유일듯.

김려는 자유분방하고 직정적인 기질의 인간이라 부령의 기생이나 병사, 이민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음. 이 때문에 김려의 유배생활은 특이한 양상을 보임.

부령은 아주 거친 땅이고, 이곳의 사람들은 호랑이나 곰 같은 야생동물을 상대하며 살아가야 했음. 김려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북방의 거친 자연을 만나고, 지배층의 수탈과 싸우는 민중들의 삶을 목도하게 됨. 또한 이 과정에서 기생이나 이민들과 같은 하층민에게도 고귀한 덕성과 인간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됨. 즉, 김려는 부령에서 삶의 다른 접촉면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척박한 삶의 조건에서도 의연하게 살아가는 북방 민중에게 큰 애정을 가지게 되었음.  -> 이러한 경험을 통해 김려의 인식과 문학은 유배 이후 크게 바뀌게 되었음. 특히 여성과 민중에 대한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었음. 김려의 여성에 대한 인식은 다른 작가들과 확연히 다름. 여성을 종속적인 존재,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인격을 가진 독립된 주체로서의 여성’으로 여기었고, 평등한 관계속의 주체이자 친교의 대상으로 여기었음.

<사유악부>[편집 | 원본 편집]

김려의 대표작으로는 <사유악부>, <방주를 위한 시> 둘을 꼽을 수 있음.

<사유악부>는 진행에 유배온 해인 1801년 12월에 창작되었음. 김려의 문집인 <담정유고>에 실린 본은 총 290수이고, 김려가 편찬한 책인 <담정총서>에 실린 본은 총 300수임.

김려는 부령에서 애정을 나누었던 기생 연희와, 친교를 맺었던 사람들을 그리워 하며 이 시를 창작한 것으로 보임.

이 작품은 악부시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 또한 ‘사유’라는 말은 ‘생각의 창’이라는 뜻임. 김려는 진해에 오자 집의 오른쪽 창호에 사유라고 쓴 편액을 걸었음. <사유악부> 서문에 의하면 “남쪽으로 옮겨 와 하루도 북쪽을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없어” 그리 했다고 함. 즉, 생각의 창은 곧 그리움의 창이며, 김려가 창을 바라보며 북쪽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음.

<사유악부>에서 주목되는 것은 세 가지인데,

1.     부패한 권력에 대한 비판: <사유악부>의 도처에 부패한 권력에 대한 비판이 보임. 애민시는 다른 문인들도 종종 썼지만, 김려처럼 폭발적인 분노와 증오를 표현하는 경우는 보기 드뭄.

ex) <사유악부> 제224수: “죽일놈”, “개 같은 김가 놈”, “살쾡이 같은 이가 놈” 등의 격렬한 표현 사용.

제74수 : “홍양을 쪄 죽이지 않으면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으리라“ (관찰사를 중국 한나라의 상홍양(가혹한 관리로 유명)으로 비유) 등의 극단적 표현 사용.

=> 부패한 권력에 대한 증오를 강렬하게 표현, 유교에서 강조하는 온유돈후의 글쓰기와는 반대됨.

이러한 비판의 원인은 민중과의 사귐을 통한 일체감 형성. 유배지에서 권력자의 탐학과 백성에 대한 수탈을 직접 보고, 그들과 사귀면서 민중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으로 전이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임.

Ex) <사유악부>에서 함경도 관찰사 이병정과 부령 도호부사 유상량이 자신을 탄압한 일과 백성을 수탈한 일을 고발함. / 하급 관리, 포졸, 토호 등의 부정부패를 드러냄.

2.     민중적 인물에 대한 애정: 민중적 인물의 형상화와 그러한 인물에 대한 김려의 애정이 드러남.

김려는 유배지 주민들의 도움을 통해 유배 생활을 버틸 수 있었는데, 김려가 사귀었던 사람들은 모두 변방의 토착민들로서 민중적 성향을 갖는 자들이 많았음.

Ex) <사유악부> 제208수: “사람들이 영남 지방을 추노지향(성현의 고을)이라고 칭하고 함경도를 말갈의 땅이라고 폄하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함경도가 영남보다 낫다.”

-> 호랑이를 쏘아죽인 최포수(제26수),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은 홍생(제164수), 여자의 몸으로 호랑이와 맞서싸운 윤씨 열녀(제150수) 등 용맹과 기개가 높은 북방 백성의 모습을 그려냄.

-> 병법에 뛰어난 지덕해(제54수), 백발백중의 활솜씨에 다가 말타기도 뛰어났던 황대석(제57수), 칠순의 나이에도 4척의 활과 돌화살촉이 박힌 화살을 들고 말을 달리는 이제할(제할은 평안도와 함경도에 둔 토관. ) (제126수) 등 변방의 씩씩한 인물을 그려내기도 함.

제26수 호랑이를 쏘아죽인 최포수

‘무얼 생각하나? / 저 북쪽 바닷가. / 작은 키의 최 포수 날래고 용감해. (…) / 아아, 최 포수는 참으로 신포라네. / 수풀 사이 노루 사슴이야 쏘려고도 하지 않네. “

->이 시를 통해 거친 환경 속에서도 굳세고 넉넉한 마음씨로 살아가는 북방 민중의 삶의 자세를 떠올릴 수 있음.

<사유악부>의 모든 시들은 ”무얼 생각하나 / 저 북쪽 바닷가“라는 시구로 시작함. 부령이 바다 근처였기 때문.


3.     여성에 대한 인식: <사유악부>에는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뚜렷하고 빼어나게 형상화된 인물은 연희인데, 연희는 부령의 기생으로 김려의 연인이었음. <사유악부>의 전편에서 연희에 대한 회상이 거듭 되풀이 되고 있음.

연희는 문장과 그림 등 문예적 재능이 빼어나고 세상에 대한 자기 나름의 뚜렷한 안목을 지닌 여인으로 그려짐.

ex) 제2수: 연희의 모습이 선녀와 같다고 묘사함, 제12수: 장백산 정기가 길러낸 연희 같은 사람이 어째서 변방에 묻혀 있는지 묻고 있음.

제299수: 연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읊음.

“무얼 생각하나? / 저 북쪽 바닷가. / 연못에 붉은 연꽃 천만 송이 피었는데 / 연희가 그리워 보고 또 본다네. / (…) / 전생에 무슨 죄 지어 이런 고통 겪는 건지 / 연희야 연희야 어쩌면 좋으냐.“

-> 그리운 마음의 분출을 볼 수 있음. 김려는 제160수에서 연희를 ‘지기‘라고 표현하기도 함. 김려는 <사유악부>에서 연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거리낌없이 토로하고 있는데 이는 온유돈후의 글쓰기와는 반대임.

김려는 연희를 타자가 아닌 독립된 자유로운 인격으로 인정하며 그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한국 고전문학사에서 볼 수 없던 광경임. 남존여비의 패러다임이 아닌 여성을 독립적 인격으로 인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글이 쓰여지고 있기 때문.

김려는 연희의 훌륭한 언행과 품행을 후세에 알리고자 <연희언행록>을 저술하기도 하였음. 연희의 신분을 생각했을 때 이는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음. -> 이는 연희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평등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

언행록: 뛰어난 학자나 덕이 높은 위대한 인간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형식. 대부분 남성이 대상이고, 여성의 경우 사대부 집안의 부녀였음.

연희에 대한 사랑은 더 나아가 전근대 시기 하층 여성의 비참한 운명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으로 이어짐.

ex) 제295수: 연희의 친구인 영산옥의 운명을 읊음.

“무얼 생각하나 / 저 북쪽 바닷가. / 영산옥은 평생 한이 뼈에 사무쳐 / 매일 밤 울음 삼키며 눈물 흘리네. / 어찌하여 하늘은 기박한 이몸 낼 제 / 총명한 남자 만들지 않고 여자 되게 하였나? / (…) / 절통하다 저 인간 유가네 자식 / 삼생의 원수가 너 아니고 누루리? / 적막한 규방 깊은 곳에서 / 꽃다운 세월 수심 속에 늙어 가네.“

-> 영산옥은 부기인데,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수절하고자 하였음. 그러자 도호부사 유상량이 그를 벌하려고 하였음. 김려는 영산옥의 전인 <정안전>(현전하지 않음.)을 창작해 그를 기리고 유상량을 비난함.

영산옥은 자신이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다는 구절을 통해 김려가 여성의 처지에 깊이 공감했음을 느낄 수 있고, 영산옥이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연민을 표시하고 있음.

김려는 부령에 있을 때 주변 여성들의 뛰어난 능력을 알아보고 이것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많은 글을 썼음.

Ex) <심홍소전>, <정설염전>, <우아전>, <경선전>, <소혜랑소전>, <장애애시> 등.

->이는 모두 미천한 여성이 지닌 높은 덕성과 재능을 기리기 위해 창작되었음. 모두 현전하지는 않는다.

김려는 유배오기 전에 옥대체 시와 소품에 경도되었었는데, 이 때문에 <사유악부>의 여성을 노래한 시가 옥대체 시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지만, 그 질적 성격은 상이함. 옥대체 한시는 실제 여성의 처지와 삶에 대한 관심이 아닌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의 정서를 읊는 것에 그치기 때문에 한계를 가지며, <사유악부>는 여성에 대한 전근대적 통념과 인식에서 벗어나 있음.

또한 소품체 산문이나 시는 개성, 독창성, 자유로운 감정의 유로를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근대적 지향을 보이는 것은 아님. -> 소품체의 근대적 지향을 위해서는 새로운 사유나 인식이 필요함. <사유악부>는 소품체를 통해 자기 시대의 틀 바깥으로 나와 근대를 성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ㅡ> 즉, <사유악부>의 여성을 다룬 시는 옥대체 시에 영향을 받은 것은 맞지만, 옥대체 시와 성격이 다름. 또한 <사유악부>의 이러한 성격은 자유분방한 소품체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 김려가 가진 ‘근대적’ 인식과 + 소품체 특유의 성격이 만나 <사유악부>의 근대적 지향성을 나타나게 함.

<사유악부>는 여성, 특히 미천한 여성인 기생을 하나의 ‘주체’로서 승인하고, 독립된 인격과 영혼을 가진 대등한 인간으로 인식한 것에서 근대적 지향성이 확인된다고 할 수 있음.

<방주를 위한 시>[편집 | 원본 편집]

원 제목은 ‘고시위장원경처심씨작(장원경의 처 심씨를 위해 지은 고시)’임. 고시는 근체시와 달리 형식이 자유로워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을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길게 노래하기에 좋음.

방주(장원경의 처 심씨의 이름)는 백정의 딸로, 장원경에게 시집 갔지만 그의 외도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산 것으로 보임.

<방주를 위한 시>는 장편 서사시로 기획되었지만, 현전 하는 것은 서두 부분뿐. 하지만 이 서두만으로도 전근대 시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긴 서사시에 해당함.

(<공작동남비>: 중국에서 제일 긴 서사시, 700여구. <방주를 위한 시>는 현전하는 것만으로도 <공작동남비>의 두 배정도 됨.)

이 시는 중세적 신분관을 타파하고 평등 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민중에 대한 애정, 여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줬던 <사유악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할 수 있음.

하지만 <방주를 위한 시>와 <사유악부>는 1. 연희의 형상이 심방주의 형상에 녹아들어 있다는 점, 2. <사유악부>의 인간 이해와 평등에 대한 감수성이 <방주를 위한 시>에서 더욱 심화되거나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음.

<방주를 위한 시>는 장파총이라는 인물이 백정의 딸인 심방주의 심성에 반해 그를 며느리로 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음.

백정의 딸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나, 양반과 백정 집안의 혼인을 제재로 한 것을 통해 이 작품이 계급적 틀을 벗어나 평등의 인간관에 바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앞태를 보니 관세음이요, 뒤태를 보니 석가세존이네”

ㅡ> 시인은 애정어린 필치로 심방주의 외, 내면을 묘사하는데, 백정의 딸을 가장 고귀한 언어로 찬미하고 있음.

“지체의 귀하고 천함으로 / 사람의 현우를 단정하지 말라 / 연꽃은 진흙탕에서 피어나고 / 용은 개천에서 태어나네.”

ㅡ> 신분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 그 자체가 중요함을 말함.

장파총이 백정의 집에 들러 하룻밤을 묵으며 백정을 설득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뜻 맞으면 모두 친구이고 / 정 깊으면 곧 형제이지요. / 어찌 하늘의 뜻이 사람 사이에 계급을 나누는 것이겠소? / 주인이 이 말 듣고 / 마지못해 주춤주춤 섬돌을 올라 / 무릎 맞대고 정다이 앉으니 / 신분의 차이가 어찌 있으리.

ㅡ> 백정과 양반이 무릎을 맞대고 함께 앉고 있음. 김려는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이치는 / 고르고 가지런하여 본디 치우침이 없는데 / 어쩌다 우리 인간 세상은 / 아비지옥처럼 되어 버렸나“라고 하면서 계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세상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간주함. 즉, 김려는 장파총의 입을 통해 만민 평등 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 이는 한국고전문학사에서 없던 일. 김려가 1800년대 문학을 통해 계급 부정과 평등 의식을 선취한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음.

소품체 문학은 대개 개인적 정회나 개인의 소소한 신변사를 기술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사회역사적 전망이나 민중적 연관을 보여주지는 않음. 그러나 김려는 소품체 문학을 통해서 심중한 사회역사적, 민중적 연관을 보여줌. 즉, 김려는 소품체 문학의 한계를 돌파해 근대를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음.

이옥의 생애 – 문체 탄압을 중심으로[편집 | 원본 편집]

이옥은 김려보다 6살 위로, 무인계의 서얼 집안 출신임. <발해고>를 쓴 이득공의 이종사촌 동생으로, 유득공과 이옥은 모두 소북 집안. 이옥의 <백운필>에서 유득공의 <고운당필기> 조목을 인용한 것을 통해 이옥과 유득공이 서로 왕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이옥은 정조 14년 31살 때 생원이 되었음. 이옥이 문체반정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는 점에서 이 부분이 중요함.

이옥이 서른 세살 때인 1792년 9월 16일 정조가 행차해서 소과에 합격한 유생을 입시하게 함. 이때 이옥이 정조에게 나아가 자신의 성명을 아룀. 정조가 “전후 지은 표와 책이 각각 몇수나 되는 가?”하고 묻자 “표는 5백 수 이고 책은 백여 수입니다.” 대답함. 이것이 이옥과 정조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

1792년 11월 20일 <승정원일기>기사에 ‘생원 이옥이 응제문에 소설체를 끌어들여 일상 문자로 글을 쓰고 있어 사습이 몹시 해괴해질 수 있으니 정거(과거를 못보게 함)시키고 벌로 표를 50수 지어 바치게 하라’는 정조의 분부와 그에 따라 표 50수를 올렸다는 언급이 있음. 이옥이 표 50수를 지어 바친 뒤 성균관에서 이옥의 정거가 지나치다며 풀어달라는 계를 올림.

12월 27일에는 열흘 안에 백 편의 율시를 지어 바치도록 함. 이옥의 문장과 시가 소품체라고 본 것. 그리고 정조는 소품체를 얼른 고치지 않으면 경기도 수군에 충정(지방군의 군적에 편입시켜 군역을 살게 하는 것)시키겠다고 하였음.

3년 뒤 이옥은 성균관 상재생으로서 영란제(임금이 성균관에 거등할 때 보는 시험)에 응시하였는데, 이 때 답안의 문체가 괴이하다는 이유로 정거를 명령 받음. 하지만 곧 가혹한 처사라는 의견에 충군으로 명령이 바뀌었음. (선비는 충군되더라도 실제 군사 훈련을 받지 않지만, 치욕스러운 일이었음.)

이옥은 충청도 정산현으로 가서 편적(군역에 편입)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와서 9월에 과거에 응시하였음. 그러나 이때도 정조가 이옥의 글이 초쇄하다는 평을 내렸고, 이옥은 더 먼 경상도 삼가현으로 충군가게 됨.  -> 이 일이 모두 1795년에 일어났음.

이후 이옥은 1796년 2월 별시의 초시에 응시해서 수석을 하였음. 그러나 정조가 답안을 보고 이옥이 지은 책문이 격식에 어긋난다며 방의 끝자리로 강등시킴. (1등->꼴찌가 된 것)

<승정원일기> 1796년 2월 6일 기사

“이옥의 문체에 대해 여러 번 고치라고 명령했으나 끝내 고치지 않아 충군하게 했는데, 이 사람이 장원을 하다니! 이로 과거 시험에서 어떤 사람을 선발하는 지 알 수 있으며 합격자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 이옥의 문체는 전적으로 소품을 일삼는다.“

“이옥이 이번에 지은 글은 그리 괴악하지 않사옵니다.“ (우승지 이조원)

“이옥의 답안을 보니 구습을 좀 고쳤사옵니다.” (시관 임제원)

ㅡ> 이옥은 소품체가 아닌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음. 그러나 정조는 이미 이옥에 대한 심한 편견이 있었고, 이 때문에 이옥에게 과잉 반응을 보인 것으로 보임.

이옥은 이 사건 이후로 다시는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음.

이옥은 1796년 3월 고향 남원으로 돌아오고 5월에 부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름. 그런데 1797년 봄에 삼가현의 관리가 ‘삼가현 군적에 편입되어 있는데 왜 삼가현에 돌아오지 않느냐’고 물으며 자신의 군적이 삼가현에 있음을 깨달음. 3년 상을 치르는 동안 이옥은 삼가현으로 가지 않고 버텼지만, 1799년이 되자 독촉이 빈번해져 이해 10월에 삼가현으로 가게 됨.

1800넌 2월 나라에 큰 경사가 생겨 삼가현감이 서울에 가는 것을 허락하였고, 이 때 조정의 명령으로 자신이 사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됨.

1799년 10월 18일 삼가현에 도착해 1800년 2월 18일까지 118일간 삼가현에 있었고, 1800년 6월 정조가 죽으면서 이옥과 정조의 악연이 끝나게 됨.

이옥은 글쓰기에 대한 권력의 계속된 간섭과 탄압으로 인해 고향에서 낙척불우한 삶을 살다가 1813년 세상을 떠나게 됨.

정조는 문체반정을 통해 정학(주자학)을 부지하려고 하였고, 이를 통해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조선은 신유옥사로 이어지는 반동기에 들어서게 됨.

ㅡ> 정조의 입장에서는 ‘문체반정’이지만, 피해자인 이옥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문체탄압’, 그중에서도 소품탄압이라 할 수 있음.

이옥의 전하는 글 중에 <북관의 기생이 한밤중 통곡하다>라는 글이 있는데,

“북관의 어떤 기생이 아무에게나 몸을 허락하지 않고 자기가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허락하겠다 하다가, 자신이 찾던 귀공자를 만남. 그런데 그 공자는 고자였고 관계를 할 수 없었음. 그래서 기생이 하늘을 우러르며 통곡을 하였음.”

이옥은 이 일에 대해 긴 논평을 붙였는데, 서두에서 “여인이 정욕을 실현하지 못해 통곡한 것이 아니라, 천고의 좋은 만남을 얻기 힘들어서 통곡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음. 즉, 기대했던 만남이 어그러진 것으로 인해 실망해 눈물을 흘렸다는 것임. 이어서 군신, 남녀 등 사람 사이의 만남에 대해 긴 사설을 덧붙였음.

이옥은 성균관에서 과거를 준비하며 일신을 도모했고, 정조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결국 문체탄압으로 불우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음. 이옥은 이 글에 정조와 자신의 관계를 은근히 가탁한 것으로 보임.

성균관 시절의 작품들[편집 | 원본 편집]

현전하는 이옥의 작품 중 주목되는 것들은 대부분 성균관 시절에 창작된 것임.

Ex) 소설 <심생전>, <이홍전>, <부목한전> / 산문 <중흥사 유기>, <시간기>, <이언>인(引) / 희곡 <동상기>

이옥은 충군과 관련된 일로 1795년,  1799년 두 차례 삼가현에 갔었는데, 이 때 두 편의 글을 남김.

1795년에는 <남정십편(남쪽으로 귀양갈 때 쓴 열 편의 글)>. <남정십편> 중의 한 편이 <옥변(집에 대한 변)>인데, 현감으로 있던 박지원을 만난 뒤 쓴 글임. 당시 박지원은 벽돌을 이용해 관아 건물을 지었다가 중국식 건물을 지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는데, 이옥은 박지원을 변호하며 이 세상에 중국에서 유래하지 않은 집이 어디 있는가?라는 논리를 펼침. (박지원 역시 1793년 정조로부터 문체와 관한 견책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문체 탄압을 받은 인물 간의 만남이라 할 수 있음.)

1799년의 <봉성필>은 영남의 토속, 구전되는 이야기, 방언, 세태, 인물, 역사, 유적, 경관 등 잡다한 내용을 필기 형식으로 기록한 글임. 총 64항목인데 항목마다 제목이 붙어 있음.

봉성필 중  <언패(국문소설)> 항목에서는 어떤 사람이 인본(印本, 방각본) <소대성전>을 기져와 읽으라고 했다는 말이 나옴. -> 이를 통해 18세기 말 이미 방각본 국문소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음.

김려는 이옥이 죽은 뒤 <담정총서>에 <봉성필>을 <봉성문여>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실어놓았음. 봉성은 삼가현의 다른 이름.

ㅡ> <남정십편>, <봉성필>의 흥미로운 점은 소품체로 인해 견책을 받아 편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들이 모두 소품체라는 것임.

Ex) <봉성문여(봉성필)>의 시기(市记, 저자에 대한 기록): 저자의 풍경을 서술한 글로, 무수한 열거법을 통해 장터의 풍경을 묘사함.

이옥은 정조의 문책에도 불구하고 소품체 글쓰기에 익숙하여 소품체 글을 계속 쓴 것으로 보임. 소품체에 익숙한 사람은 고문을 쓰기 어렵고, 고문에 익숙한 사람은 소품체 글쓰기가 힘들기 때문.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소품체와 고문에 해당하는 글 모두를 구사했는데, 이는 박지원이 이옥과 달리 고문으로 글쓰기를 시작해 20대 이후 소품을 배웠기 때문임. 또한 박지원은 원래 문재가 뛰어나 뭐든 잘 구사할 수 있던 것으로 보임. (하지만 박지원도 문체반정 이후 주로 고문을 사용하고 패사소품체는 쓰지 않았음.)

이옥은 과거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 소품체 글을 썼지만, 성균관 시절처럼 혁신적인 글을 쓰지는 못함. 문학에 대한 권력의 탄압이 발전을 저해한다는 사실을 이를 통해 알 수 있음.


소설과 패사소품적 전

이옥은 <심생전>, <이홍전>, <부목한전> 같은 소설과 20편여의 전을 남겼음.

<심생전>은 비극적 애정전기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 조선시대의 마지막 비극적 애정전기 작품임. 이 소설은 여성의 심리 묘사가 곡진하고, 남녀 주인공의 신분 갈등에 작자의 불우감이 깊게 투사되어 있음.

<이홍전>은 피카레스크 소설(15~16세기 스페인에서 처음 등장한 문학 장르의 하나로, 주인공을 포함한 주요 등장인물을 도덕적 결함을 갖춘 악인으로 설정하여 이야기를 이끄는 것을 가리킨다.)에 해당하는데, 사기꾼 이홍의 개성이 잘 나타남.

<부목한전>은 이인(異人)에 속하는 부목한(절에서 밥 짓고 물 기는 일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신비주의에 대한 경도를 보여줌. 이 작품에서 주목되는 것은 작품 말미 작가의 논평임.

“속담에 같은 동네에 명창 없고, 동접에 문장없다는 말이 있다. 중국의 월에 신선이 있고 촉에 부처가 있다라고 말하면 믿지만, 우리나라 아무 산에 신선과 부처가 있다”라고 말하면 믿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나라의 아무 산이 촉이나 월에서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촉이나 월에 해당하는 줄 알기나 하는지.“

ㅡ> 자국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볼 수 있음. 이옥은 무조건적인 화풍에 대한 경도보다는 토풍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존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

<남정십편>과 <봉성문여>에서는 ‘방언’이라는 항목이 들엉 있어, 지방어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줌.

ㅡ> 즉, 중심과 주변의 우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가치가 대등하다는 입장을 나타내는 것.  <이언>의 서문인 ‘삼난’에서도 동일한 생각이 발견됨.

“초나라에서는 초나라 말을 하고, 제나라에서는 제나라 말을 하며, (…) 오나라에서는 오나라 말을 한다. (...) 나를 따라온 한 호서인이 여관에 들어 주인과 말하면서 지금을 일컬어 ‘산대’라 하고, 가을을 일컬어 ‘가슬’이라 하니 영남인 주인이 크게 웃는다. (…) 나는 호서인이 영남인의 말을 듣고 웃는 것이 옳은 지 영남인이 호서인의 말을 듣고 웃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또한 호서인과 영남인이 나 같은 사람의 말을 듣고 웃지 않을 지 어찌 알겠나.“

ㅡ> 모든 나라나 지방은 각각 그 나라, 지방의 말을 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각 지방, 나라의 말은 대등하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음. 한국고전문학사에서 이옥을 제외하고 이러한 인식을 보여주는 문인은 없음.

이옥이 창작한 전에는 패사소품적 취향을 보여주는 것이 많고, 대부분은 소설적 지향을 다소간 보여줌. 이는 이옥이 구전서사를 수용한 것과 관련이 있음. -> 이옥의 패사소품적 전들은 형식은 전이어도 서사는 야담과 동일한 것이 많음. Ex) <부목한전>, <협효부전(산골에 살던 효성스러운 며느리 이야기> 등. 이러한 작품은 구연되던 이야기를 듣고 쓴 것으로 보임. 야담의 성립과 같은 과정을 보여줌.

이옥의 전은 작품 뒤에만 사설이 붙는 보통의 전과 다르게 작자의 말이 작품의 서두에 붙어있거나, 앞 뒤에 다 붙어 있기도 함. 이옥의 의론을 제외하고 서사만 본다면 이러한 전들은 모두 야담과 같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경계가 모호함. (박지원의 <광문자전>, <허생전> 등은 야담과 구분이 가능한 것과 대조)

<유광억전>이나 <장복선전>, <가자송실솔전>은 야담을 수용한 것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패사소품에 속함. 특히 <각로선생전(흰 머리를 뽑는 족집게에 대한 글)>은 특이한 패사소품. ‘나‘와 ’혹자‘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불우한 삶을 살다 노년을 맞이한 이옥의 모습이 족집게인 ’각로선생‘에 투영되어 있음. 이옥이 죽기 4년 전인 순조 9년 창작되었음.

이옥의 소설이나 전에 등장하는 주인공에는 변변한 양반이 없음. 일사(逸士, 세상을 등지고 숨어사는 선비) 조차 없으며 주변부에 속한 한사(寒士, 가난하거나 권력이 없는 선비)혹은 민간이나 여항의 비천한 인물임.

<이언>[편집 | 원본 편집]

성균관 시절 이옥은 문예적 가치가 높은 참신한 글을 많이 썼는데, <이언> 서문인 일난(一难), 이난, 삼난 세 편이 근대적 지향을 뚜렷히 보여줌.

<이언>은 우리말 노래, 조선 노래라는 뜻으로 아조(바른곡조) 17수, 염조(부염한 곡저) 18수, 탕조(방탕한 곡조) 15수, 비조(원망하는 곡조) 16수 이렇게 정조를 달리하는 66수의 시가 실려 있음. 그리고 이 시들의 앞 부분에 일난, 이난, 삼난 이라는 서문이 붙어 있는 것. 난은 힐난하다라는 뜻으로 혹자의 힐난에 대해 작자가 해명하는 방식이라 이러한 제목이 붙은 것. -> 이는 <이언>의 시가 세간의 반발과 의혹을 불러 일으킬 수 있어 작자가 미리 자기 변론을 한 것으로 여겨짐.

이옥은 <시경>의 국풍을 근거로 하며 <이언>의 시를 옹호하고 있음.

<일난>

: 혹자는 작자가 어떤 존재인지 묻고, 이옥은 “작자란 천지 만물의 통역자”라고 말함. 즉, 작자는 세계를 표현하는 매개자라는 뜻. 또 만물의 개별성과 차이에서 ‘개성’이 나오기 때문에 이를 강조하고 있음.

“어찌하여 대청 건륜 연간에 태어나 조선 땅 한양성에 살면서 감히 짧은 목을 늘어뜨리고 가는 눈을 부릅뜨고서 망령되이 국풍, 악부, 사곡의 작자를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조선 땅에 살면 국풍, 악부, 사곡(중국 작품)이 아닌 우리 작품을 써야 한다는 주장. 이옥은 작자는 자신이 속한 시공간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시공간과 작자는 본질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고, 작자는 세계의 통역자로서 세계를 충실히 표현해야 하기 때문임.

<이난>

: 혹자(예교주의자)는 <이언>에서 왜 여자만 노래했는가?라고 질문하고, 이옥은 “남녀의 정만큼 진실한 것은 없으며, 이야말로 거짓되지 않고 진실한 정“이라고 답변함. <금병매>, <육포단>처럼 음탕한 문학도 남녀의 진실한 감정을 그린 것이기 떄문에 보이기 따라 긍정할 수 있다 함.

<삼난>

: 혹자는 <이언>이 향명(우리말 명칭)을 사용하고 있음을 힐난하고, 이옥은 “나는 내 이름을 이름으로 하고, 내 자를 자로 하고 있다“라고 답변함. ‘나’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이자, 선언.

또 한자어와 우리말은 다르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음. 따라서 우리 말을 버리고 중국인의 말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선언도 함. 동시대의 박제가가 우리 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쓰자는 주장을 한 것과는 상반되는 주장. 이옥은 이러한 이유로 우리말로 시를 써야 옳다고 주장함.

“우리가 어찌하여 반드시 우리의 명칭을 버리고 저들의 명칭을 따라야 하겠는가? 저들은 어찌하여 그 명칭을 버리고 우리의 명칭을 따르지 않는단 말인가?”

ㅡ> ‘언어성 주체성’에 대한 자각. 이옥은 중국인은 중국의 언어를, 조선인은 조선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이언>의 향명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음.

<삼난>은 전근대적 틀을 벗어나 근대적 담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글이라고 할 수 있음. 시공간의 개별성이나, 향명, 속담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정약용, 이학규, 박지원에게서도 발견되지만, 이들과 달리 이옥은 인식을 전면적으로 이론화하여 선언하는 것까지 이르렀음. 이러한 점에서 <삼난>은 조선 문학의 새로운 창작 방법, 미증유의 새로운 노선을 천명한 비평문이라 할 수 있음.

<삼난> 속 이옥의 주장이 심화되면 국문시의 창작이 정당화 됨. 즉, <삼난>의 이론적 귀결은 국문시 창작이라고 여겨짐. 하지만 국문시 창작은 실제로 실현되지는 못함. <이언>은 우리말 노래라는 뜻을 가졌지만 한시로 창작되었고, 이옥 본인도 국문시를 창작하지는 않았음. 이 점에서 <이언>은 한문학 내부의 혁신에 불과할 뿐, 한문학을 넘어서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가짐.

하지만 <이언>은 국문시 창작의 문턱에 이르러있고, 근대성을 선취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음.

<이언> 아조 중의 한 수

“어려서 익힌 궁체 글씨 / 이응 자가 약간 각이 져 있네. / 시부모가 글씨 보고 기뻐하시며 / 언문 여제학이라 하시네”

ㅡ> 궁체, 이응, 언문 여제학은 모두 우리말.

<이언>의 시들은 정치적 의식이나 사회적 의식 보다 세태적이고 풍속적임. 또한 여성의 모습이 대상화되어 있음. 이옥의 여성에 대한 의식은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음.


*연객 허필의 국문시

이덕무의 <이목구심서>

“어떤 사람이 관아재 조영석이 그린 동국 풍속도를 수집해서 그대로 베낀 것이 70여 첩이나 되었는데 허필이 이 그림들을 국문으로 평했다.”

ㅡ> 허필은 조영성의 그림 70여점에 국문으로 제화시를 썼음. (현전하지 않음.) 이덕무는 <이목구심서>에 허필의 국문시를 한문으로 번역해서 실어놓음.

허필은 이옥과 마찬가지로 당색이 소북이었음. 이옥이 당색이 같은 허필의 국문시를 접했을 수도 있음.


마무리

이옥과 김려는 소품체를 밀고 나가 조선의 다른 작가들이 이르지 못한 경지를 보여줌. 이를 통해 근대성을 선취하고 있다고 보임.




- 윤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