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강 해동도가와 새로운 질서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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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사에서 본 16세기

16세기는 여러 차례의 사화가 일어나 선비들이 벼슬을 포기하고 산야에서 성리학 연구에 잠심하는 경우가 많았음. (ex) 이황, 서경덕, 조식 등) -> 이를 통해 조선 성리학이 심화, 발전됨.

한편 어떤 선비들은 현실에 불만을 품어 도가로 들어가기도 하였고, 이로 인해 ‘선풍’이 대두됨. 이때의 도가는 노장사상이 아닌 해동도가. 해동돠는 새로운 관점과 문제의식, 새로운 감수성과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어 문학사에서도 중요함.

  • 해동도가: ‘내단’에 집중하는 수련 도교에 근간을 두고 선술을 추구하는 도가. 도맥이 중국 당나라 도사인 종리권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관점도 있고, 도맥이 단군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는 관점도 있음. 이를 보면 해동도가가 중국도가의 영향을 아예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대로의 독자성을 갖는 사상이라 교의라고 할 수 있음.

16~17세기 문학사의 주요한 작품과 인물들이 해동도가와 관련을 맺고 있음.

17세기 초의 문헌인 <해동전도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해동도가의 원조는 김시습. 김시습은 내단 수련과 관련한 글을 남겼고, <취유부벽정기>에서 단군을 선인으로 언급하고 있음.

<해동전도록>에서 언급하기로는, 김시습이 <천진검법>, <연마진결>을 홍유손에게 전하고, <옥함기>와 <내단요법>을 정희량에게 전했으며, <참동계>와 <용호비지>를 윤군평에게 전했다고 하였음. 16세기 중엽 윤춘년이 지은 <매원당선생전>에서는, 세상에 김시습이 “환술이 ㅁ낳아 맹호를 부리고, 술을 피로 변화시키며, 기운을 토하여 무지개를 만들고, 오백 나한을 불러낸다고 하는데, 다 믿을 수 없다.”라고 언급되었음.

->이러한 언급을 보면 당시 민중 사이에서 김시습이 도교의 방술에 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음.

그러나 이러한 말들이나 <해동전도록>에 언급된 김시습이 도를 전했다~하는 말은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임. 왜냐하면 김시습은 도교의 방술에 몹시 비판적이었고, 신선이 되려는 노력을 부질 없는 일로 여겼기 때문. 그러나 단군을 선인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음.

즉, 김시습은 도교가 사회적, 정치적으로는 별 효용이 없다고 여겼지만, 양생에는 도움이 된다고 여겨 그 수련법에는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임.

조선 시대 도인들은 단군으로부터 해동도가의 도맥이 이어져 나왔고, 김시습을 이 도맥의 계승자로 여겼음. 그리고 김시습으로부터 조선의 도맥이 다시금 쭉 이어지는 것으로 상정하였음. 그러나 이는 ‘상상된 사실‘. (최치원을 도맥에 포함한 것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시 민간의 도인들이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 따라서 해동도가의 담론을 살필 때 이를 주의해서 살펴야함.

<해동전도록>에 따르면 김시습이 홍유손에게 도를 전했다고 하였는데, 홍유손은 세종 13년(1431)에 태어나 중종 24년(1529)에 세상을 떠났음. 원래 향리 집안 출신인데, 나중에 향리에서 풀려나 김종직의 문인이 되었고, 무오사화때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반정으로 인해 풀려났음.

“단군이 제위에 오른 무진년보다 앞서 태어나 / 기준이 마한을 이름한 걸 목도했도라. / 영랑과 더불어 용궁에서 노닐다가 / 다시 봄술에 이끌려 인간 세상에 머무노라.” - <소총유고> 중 금강산에 적다.

ㅡ> 시에 단군과 영랑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음. 영랑은 신라 4선 중 한 사람. 작자가 스스로를 불사의 신선으로 여기며, 단군, 영랑과 같은 옛 선인을 소환하고 있음.

조선 때 도가는 이단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음. 그러나 16세기 사상사에서 도가의 사상 공간은 각별한 주목을 요함. -> 도가의 선술을 추구한 사람들이 주변부에 속하거나, 사회적으로 불우하거나,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반/비’ 지배 사상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 성리학이 양지의 사상이라면, 도가는 음지의 사상이라 할 수 있음. 따라서 이들의 문학을 통해 주류 세계의 인물과 다른 삶을 만날 수 있고, 기존의 사상사와 문학사를 다른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함.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16세기 도가 계열의 인물로 ‘북창 정렴’과 ‘남궁두’를 뽑을 수 있음.

정렴: 연산군 12년(1506)에 태어나 명종 4년(1549)에 세상을 뜸. 정렴의 동생인 정작도 선술을 추구하였음. 정렴은 <용호비결>이라는 도가적 수련법의 요체를 적은 책을 남겼음. 이 두 사람은 유가에서 도교로 들어간 경우에 해당.

남궁두: 중종 21년(1526)에 태어나 17세기 초 광해군 연간까지 생존한 전라북도 임피 출신의 도인. 1609년 부안에 머물고 있던 허균을 찾아가 <황정경> 등 도가 경전의 심오한 뜻을 전수하고, 자신이 왜 도가에 입문하게 되었으며 어떤 수련의 과정을 거쳤는지 자세히 이야기 해줌. 허균은 이 때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남궁선생전>이라는 소설을 썼음.

16~17세기 도가 사상사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는 문헌으로는 1. <해동전도록> 2. <청학집 3. <해동이적>이 있음. 이 세 책은 모두 17세기에 저술됨.

<해동전도록>

해동에 전하는 도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광해군 2년(1610년) 한무외가 쓴 책. 이 책에서 말하는 ‘도’는 유교가 아니라 도가의 도를 의미함.

한무외는 중종 12년(1517)년에 태어나 광해군 2년(1610)에 사망하였음. 사망하던 해 이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분량이 매우 짧아 팜플렛 하나 정도의 분량밖에 되지 않음.

한무외는 충청도 청주의 선비인데, 젊을 적에 관기를 독차지 하려고 그의 기둥서방을 죽인 뒤 보복을 피해 평안도 영변으로 달아났따가 인근 희천의 교생으로 있던 곽치허를 만나 선도를 전수 받았음. 곽치허는 원래 평안도 사람으로 신분이 미천했는데, 자신의 아내가 중과 사통하는 것을 목격해 그 중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으나, 기르던 개가 중을 공격해 겨우 살아난 뒤 세상을 벗어나 도를 닦았음 (?)

<해동전도록>에는 당나라의 종리권이 신라 사람 김가기, 최승우, 자혜 세 사람에게 도를 전한 것으로 되어 있음. 김가기와 최승우는 당나라에 유학 가 빈공과에 합격한 인물들이고, 자혜는 승려 의상을 가리킴, 김가기는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당에 남았는데, 중국 심분이 지은 <속선전>에 그 전기가 실려있음.

최승우와 자혜가 전수받은 도는 이청과 최치원에게 다시 전해졌다고 언급되고 있음. 또 이들의 도는 승려 명법에게, 고려 시대로 와 권청에게 전수되었음. 권청은 ‘권 진인’으로 불렸는데, 허균의 <남궁선생전>에서 남궁두의 스승으로 나오는 인물임. 그리고 권청은 다시 원나라 사람인 설현에게 도를 전함. 설현은 조선 초 김시습에게, 김시습은 홍유손, 정희량, 윤군평, 서경덕에게 도를 전함. 곽치허에게 김시습의 도가 전해지고, 마지막에 저자인 한무외에게 도맥이 이어짐. 당시 도가의 인물 사이에서 이러한 계보가 전승되고 있었음.

  • 서경덕이 유자임에도 해동도가의 도맥에 포섭된 이유: 서경덕은 성리학자이지만, 그의 성리학은 ‘기’를 우선으로 한다는 점에서 도가와 접점이 있음. (도가도 기를 중시함) 서경덕 설화 중 서경덕이 도술을 행했다는 언급이 있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추정됨.
단군 (?)
(당) 종리권
김가기(빈공과-> 귀국 x) 최승우(빈공과 -> 귀국 o) 자혜(승려 의상)
이청 최승우
명법 (승려)
(고려) 권청 (남궁두의 스승)
(원) 설현
(조선) 김시습
홍유손 정희량 윤군평 서경덕(유교학자)
곽치허 (?)
한무외

<청학집>

평안도 사람 조여적이 17세기 중엽경 저술한 책임. 청학은 도사 위한조의 호. ‘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 문집으로 보이지만, 문집은 아니고 조여적이 듣거나 본 위한조와 그 제자들의 이야기를 엮어 놓은 책임. 이 이야기들은 인물 설화에 가까운데,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비주류적 인간 유형과 삶을 엿볼 수 있음.

조여적은 선조 21년 과거에서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사연이라는 도인을 우연히 만나 그 문하생이 되어 60년간 도를 닦음. -> 도가에 속한 인물들의 행태는 보통 우연히 어떤 도인을 만나 은밀히 전해져 내려오는 도를 전수 받는데, 신비주의의 색채가 있음. <-> 저명한 학자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어 그를 찾아가 사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가와 달리 도가는 도인들이 자신을 감추고 살기 때문에 대개 우연한 기회로 만나 사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음.

이사연은 호가 편운(구름 한 조각)자 / 운학(구름위의 학)이며 명종 14년에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났음. 16세 때 우연히 오대산에서 일곱 도인을 만나서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가 위한조에게 수학함. 일곱 도인은 모두 위한조의 문생들인데, 이들은 모두 재주가 있으나 떄를 만나지 못해 강호에 자취를 감춘 채 천하를 떠돌며 살았음. (호남 사람 금선자, 관서 사람 취굴자, 여진인 계엽자, 요동인 아예자, 중국인 채하자, 화오자, 벽락자)

위한조는 함경도 갑산 사람, 갑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지에 속하는 곳. 따라서 위한조는 벽지 출신의 한미한 인물이라 할 수 있음.

위한조의 스승은 둘인데, 한 명은 백우자 이혜손(연산군 때의 인물), 중국인 양운객. 어렸을 때는 이혜손에게 배웠지만 나이 들어서는 양운객에게 도술을 배워 여러 나라에 노닐다가 만년에 조선으로 돌아와 청학동에 거주했다고 함.

“우리나라는 귀한 사람을 높이고 천한 사람을 억압하는 풍습이 심하다. 심지어 훌륭한 점을 기리고 표창하는 것도 모두 명문가의 귀족을 대상으로 한다.“ – 위한조의 말

ㅡ> 위한조의 반귀족적, 반지배적 지향이 느껴지는 대목

<청학집>에서는 해동선파의 조종이 환인진인(환인)으로 되어 있음. 환인진인의 아들이 환웅천왕이고, 그 아들이 단군으로 되어 있음. 단군은 즉위한 지 10년에 구이가 모두 높여 천왕이 되었으며, 1048년 후에 아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는데, 당시 아홉 대국과 열두 소국이 모두 단씨였다고 언급됨. 단군의 도는 문박씨라는 사람에게 전해지고, 문박씨는 영랑에게, 영랑은 신녀 보덕에게 도를 전하였다 함.

한편 선가별파가 있는데, 신라 초 표공의 도가 가락국의 참시선인과 신라의 물계자에게 까지 전해지고, 물계자의 도가 대세와 구칠을 통해 최치원에게 전해졌다고 하였음.

<해동전도록> <청학집>
최승우와 자혜의 도가 최치원에게 전해짐 물계자의 도가 대세와 구칠을 통해 최치원에게 전해짐
-><해동전도록>, <청학집> 모두 최치원이 해동도가의 주요한 인물로 꼽히고 있음.


<청학집>에서는 소중화 의식이 잔존하고 있음에도 자주적 역사 의식이 보인다는 점이 주목됨.

“조선 땅의 별도의 구역으로 소중화라고 일컬어지지. 그러므로 중국에 성인이 태어나면 조선에는 또한 진인이 태어나지, 단군은 요와 나란하고, 기자는 주와 나란하고, 삼한은 칠웅과 나란한고, 혁거세는 한고조와 나란하고, 무열왕은 당 태종과 나란하고, 태조 왕건은 송 태조와 나란하고, 우리 태조는 명 태조와 나란하지.” – 취굴자의 말

ㅡ> 해동의 임금과 중국의 임금이 대등하다는 인식을 보여줌. 도가적인 주체사관.

또한 여성에 대한 존중을 볼 수 있음. 시에 능한 여성을 거론하거나 사람을 알보는 안목이 높은 여성을 거론하고 있는 것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음.

Ex) 중국인 도사 양운객의 문생인 매창 조현지의 처 ‘섭씨’는 안목이 높은 것이 남편과 다름없었었는데, 조선에 와 살면서 농부 나만진의 딸을 며느리로 들여 행계라는 호를 지어줌. 어느날 행계의 집에 도둑이 들어 남편이 잡으려 하자 행계가 “이 도둑은 본래 양민인데 기한에 몰려 그런 것이다. 처지가 가여우니 잡지 말자”라고 함.

->섭씨의 안목과 며느리 나씨의 측은지심을 높이 평가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음. ??흠 이게 여성에 대한 존중인가


Ex) 이자건의 처 권씨

하루는 자건이 손님을 불러 잔치를 했는데 권씨가 창호로 엿보았다.(…) “모인 손님들은 누구인가요?“ / 자건이 대답했다. ”정인홍, 이순, 유희발, 한찬남, 이위경, 허균, 하인준, 최응허, 윤인이라오. 유명한 사람들이고 모두 현달한 귀객이지요.“ / 권씨가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모두 상서롭지 못한 분들이예요.

ㅡ> 이 때 언급된 사람들은 모두 광해군 떄 인목대비 폐모를 주장한 사람들. 허균과 하인준은 역모 사건으로 능지처참되고, 나머지는 인조반정 때 처형되거나 처벌을 받음. 권씨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이들의 정체를 파악해 남편에게 주의를 준것.

이처럼 <청학집>에서 여성의 능력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을 발견할 수 있음. 도가문집에서 여성에 대한 긍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과 해동선가의 정맥에 보덕이라는 여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같이 생각해볼 수 있음.

<청학집>에는 위한조의 문생뿐만 아니라 그 밖의 도인들도 많이 언급되어 있음. 이들은 둔갑이나 호풍환우(바람을 불게 하고 비를 오게 함) 등의 술법을 하고, 미래를 투시하는 등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음.

<해동이적>

우리나라의 특이한 사적이라는 뜻으로 현종 7년(1666) 홍만종이 24세 때 쓴 책. 홍만종은 인조 21년(1643)에 태어나 영조 1년(1725)에 사망함. 홍만종은 젊을 적 몸이 좋지 않아 양생의 방도로 도가서를 읽다가 도가 사상에 경도되었음.

홍만종은 17세기 후반~18세기 초에 활동한 문인이지만, <해동이적>에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에 활동한 도인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음.

앞서 <해동전도록>, <청학집>을 쓴 한무외나 조여적과 달리 홍만종은 좋은 가문 출신임. 33세 때 진사시에 합격해 38세 때 부사정이 되었는데, 이 때 허견과 친했다는 이유로 허견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게 됨. 이 옥사는 노론이 조작한 사건.

  • 허견: 본관은 양천(陽川). 숙종대의 대신 허적(許積)의 서자이다. 교서관(校書館) 정자를 지냈다. 숙종 초년에 허적을 비롯한 남인세력이 도체부(都體府)를 복설시켜 병권을 장악하려고 하자 서인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때마침 그는 부친의 세력을 믿고 황해도에서 수천 그루의 재목을 도벌하여 집을 짓는다든가, 남의 처를 약탈하는 행위를 하여 비난을 받았는데,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인 복선군(福善君)과 내왕이 있음을 기화로 하여, 그가 역모를 꾀한다고 종척인 김석주(金錫胄) 등으로부터 고변당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4월 12일 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능지처참당하고 복선군 · 복창군(福昌君) · 복평군(福平君)과 허적을 비롯한 남인 실권자 등이 죽음을 당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후 남인이 세력을 잡자 이 사건이 무옥(誣獄)임을 주장하여 허적 등 처벌을 당한 자들이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버림.)되었으나, 허견과 복선군은 비록 목전에서 반역하지는 않았지만,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이유로 신원되지 않았다.

이 옥사로 인해 조정에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권력을 잡게 됨. 홍만종은 2년 뒤 유배에서 풀려나지만, 그 후 벼슬에 나가지 못하고 말단 벼슬만 잠시 했을 뿐, 사실상 포의로 지냈음. 그는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갈릴 때 소론의 편에 섰음.

홍만종은 17세기 전/중기에 활동한 저명한 문인인 정두경에게 수학하였음. <해동이적>의 서문은 정두경이 썼고, 발문은 송시열이 썼음. <해동이적>은 유교적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이단의 책이라 할 수 있는데, 아마 홍만종이 정두경의 제자이고, 당색이 같은 서인이라 본인이 엄격한 성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발문을 써준 것으로 보임.

<해동이적>에는 우리나라의 선인 38명이 소개되고 있음. 제일 처음 나오는 것이 단군이고, 마지막에 나오는 인물이 곽재우임. <해동전도록>, <청학집>이 설화집에 가깝다면, <해동이적>은 우리나라 선인들의 전기집에 해당함. -> 우리나라 최초의 도가 전기집.

보통의 전기와 다르게, <해동이적>은 전기집임에도 모두 설화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함. 설화를 전기로 변모시킴을 통해 홍만종이 신비하고 비합리적인 도가류의 설화를 ‘역사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유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행위는 이단에 탐닉하는 일로 치부될 수 있으나, 홍만종은 유교적 관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책을 쓸 수 있었다고 여겨짐.

문학사의 긴 흐름에서 본다면 홍만종의 <해동이적>이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 1. 두 글 모두 도가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삼고 있음. 2. 도가류의 설화를 역사화하고 있음.

<해동이적>의 서술을 보면,

단군 -> 혁거세 -> 동명왕 -> 사선(영랑을 위시한 술랑, 남랑, 안상 등 네 명의 국선)의 행적이 서술되어 있음. 이어서 옥보고(<청학집>에는 보덕의 분파로 서술되고 있는데, <해동이적>에는 보덕이 언급되지 않음.), 대세, 구칠, 김가기, 최치원, 권진인, 김시습, 홍우손, 정희량, 서경덕, 정렴의 행적이 서술되고 있음. 이어서 <해동전도록>과 <청학집>에는 언급되지 않은 전우치, 남궁두, 유형진, 장한웅, 장생 등이 서술되어 있음.

허균은 남궁두를 주인공으로 한 <남궁선생전> 뿐 아니라 장한웅과 장생의 전기인 <장산인전>, <장생전>을 쓰기도 했고, 유형진의 사적을 기록한 <유형진 유사>를 썼음. 홍만종은 허균의 이 글들을 토대로 남궁두, 유형진, 장한웅, 장생의 행적을 서술하였음. (주로 16세기 후반에 활동한 인물들) / 전우치는 16세기 전기에 활동한 술사로 알려져 있음.

<해동이적>은 <해동전도록>과 <청학집>을 아우르면서도, 몇몇 새로운 인물을 추가하고 있음.

세 책에 대한 전체적 조망

세 책을 통해 16세기 도가의 인물들이 대체로 지방에 거주한 한미한 집안 출신의 선비, 혹은 하층 신분 춘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이들은 지배 질서의 주변부에 속한 인물로서, 유교와 판연히 다른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었음.

Ex) 이혜손(위한조의 스승): 한미한 사족, 집이 가난해 혼적농상함. 위한조: 북쪽 변방 갑산 출신.

조여적: 평안도 사람,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한 실의지사, 전우치: 개성출신의 한미한 인물

ㅡ> 16세기의 도인들은 대개 지체가 한미하며 불우한 인물들이었음.

또, 세 책을 통해 17세기 들어 도맥이 계보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음.

물론 이 계보가 사실이라고는 여길 수 없지만, 이 계보화를 통해 어떠한 사상적 지향과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실/비사실을 따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님.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청학집>과 <해동이적>이 모두 단군을 해동 선가의 시원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함. 도가의 주체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

정렴, 한무외, 위한조, 조여적, 남궁두, 윤군평, 전우치 등의 인물들을 모두 16세기의 인물이며, 몇몇은 17세기 전~중기 까지 생존하였음. -> 이를 통해 16세기에 들어서 선풍이 현저해졌음을 알 수 있음.

16세기는 조선 성리학의 심화기임과 동시에 이인들의 시대라고도 부를 수 있음. 16세기에 도가를 추구한 이인들이 많이 생겨난 것은 체제 모순의 심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

성리학 이념을 근간으로 <신분적 차등과 사대존화>라는 틀이 공고하게 자리 잡으면서, 한미한 출신의 인물들이 나서기 힘들어졌음. 그들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자아를 실현할 방도를 찾기 어려웠음. 그래서 지배 질서의 기초가 되는 ‘유교’를 벗어나 도가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한 것임.

->이러한 지향은 대내적으로는 신분적 차별이나 젠더적 차별의 완화 / 부정으로 이어지고, 대외적으로는 존화주의의 거부와 민족 주체성의 강조로 이어짐.

<최고운전>

해동도가의 도맥에서 최치원은 매우 중요한 위상을 점하고 있음. <해동전도록>, <청학집>, <해동이적> 세 책 모두에 최치원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음.

<최고운전>은 16세기 후반에 한문으로 창작되었고, 작자와 창작시기는 미상이지만, 1579년 이전에 창작된 것은 분명함. (고상안의 <효빈잡기>에 “기묘년(1579)에 충청도에 갔을 때 보령 현감이 <최고운전>을 자기에게 보여줬다”고 하고 있기 때문.)

<최고운전>의 내용은 최치원의 실화와는 관련이 없으며, 민간 설화, 미간의 상상력에 의거한 허구로 보임. 이 작품에서는 몇 가지가 주목되는데,

1.      가부장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음

: 최치원의 아버지가 최치원이 태어나자 그를 집 밖에 버리도록 하는데, 나중에 이를 후회하고 최치원을 집으로 데려오라고 사람을 보냄. 그러나 최치원은 이를 거부하면서,

“나를 금돼지의 자식이라며 이곳에 버렸으면서 이제 와서 조금도 부끄러워 하는 마음 없이 나를 보고 싶어 하신다고? (…) 그런데도 아버지는 나를 버렸으니 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일이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무슨 면목으로 나더러 부모를 찾아뵈라는 거요? 만일 또다시 나를 보고 싶다고 한다면 나를 바다로 뛰어들고 말거요.”

->최치원이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명을 거부하며 한 말. 가부장의 권위가 부정되고 있음. (잘못을 뉘우치면 용서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인데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

2.      중국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음.

: 중국은 부당하게 우리나라를 압박하고 업신여기며 침략하려고 하는 나라로 여겨지고 있음. 그래서 최치원이 중국에 가서 황제를 욕보이기까지 함. 당시로써 매우 파격적인 서사라고 할 수 있음.

3.      신분제 질서를 부정하고 있음.

: 최치원은 자원해서 신라 나승상의 종이 되는데, 나승상의 딸과 혼인하기를 요청하고, 혼인을 관철하게 됨. 나승상은 최치원의 요구에

“ 종놈의 사위로 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저놈의 말이 참으로 고약하구나”

라고 말함. 종이 승상의 딸과 결혼하는 것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불가능한 일이지만 <최고운전>에서는 이것이 실현됨으로써 신분적 질서의 전복을 꾀하고 있음.

4.      여자를 남자보다 더 명민하고 지혜로운 존재로 그려내고 있음.

: 주인공인 최치원을 제외하고 거의 다 그럼. 최치원의 부친보다 모친이, 나승상보다는 승상의 처가 더 지혜로운 인간으로 나타남. 나승상의 딸도 명민하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나ㅏ남. 남성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눈물을 흘리며 울지만 여성들은 울지 않음.

5.      최치원과 자국 임금의 불화를 그림.

: 최치원 <-> 권력 사이의 불화, 긴장 관계를 나타냄. 최치원은 권력에 순종하지 않고, 이 때문에 권력에 편입되지 못함.

ㅡ> <최고운전>이 보여주는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부정은 일체의 지배 질서에 대한 부정과 연결됨. 대외적으로는 중화주의적 질서에 대한 부정, 대내적으로는 신분제적 질서나 젠더적 차별에 대한 부정, 권련의 부당한 권위에 대한 부정과 연결되고 있음.

즉, <최고운전>은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 중국 중심적 질서, 신분제적 질서, 젠더적 질서에 반발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있음.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최고운전>의 지향에는 해동도가의 정치적, 사상적 입장이 반영되어 있음. (지배 체제 바깥에 있던 16세기 도가적 지식인들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는 것.) 도가적 지식인들은 유교적 세계관의 틀로 구성된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꿈꾸었는데, 이러한 ‘꿈꾸기‘는 주로 ’설화적‘ 담론 방식으로 표출되었음. -> 이러한 표출 방식은 곧 민중적 사고방식,  감수성과 연결됨.

<최고운전>의 작자는 해동도가의 사상을 지닌 주변부 지식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됨. 대내적으로는 반권력, 반위계적 지향을 보여주며, 대내적으로는 존화적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보여주는데, 사실 이 두 측면은 서로 연결된 것으로 판단됨.  -> 지배권력과 위계적 사고방식이 존화적 사대주의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임.

<최고운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민족자존 의식, 민족 주체성의 단초가 이 작품에서 발견된다는 점임. -> 중국의 침략에 대한 반대, 자국 문화와 자국의 지적 수준에 대한 강한 자부심의 피력을 통해 나타나고 있음.

<최고운전>에서 일방적 사대주의에 대한 반대가 천명된 것에는 해동도가에 내재된 주체적 역사 의식 뿐만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임.

16세기 전반기인 중종 때 들어서서 명에 대한 사대과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됨. 중종은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왕권의 정통성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고, 이를 중국 황제에게 기댐으로써 해소하고자 하였음. 17세기 전반기의 인조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음. -> 사대가 심화됨.

따라서 16세기 전반기에 심화된 명에 대한 사대정신에 대한 반발로 <최고운전>의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여지가 있음.

<최고운전>에 일방적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은 나타나지만, 그 토대가 되는 화이론적 세계관에 대한 성찰과 모색은 이루어지지 않음.(이는 18세기 후반 홍대용에 의해 가능해짐.) 이러한 한계가 있지만 민중적 서사 방식으로 민족에 대한 자존 의식을 표명함으로써 맹목적 모화주의에 대한 엄중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음.

<전우치전>

작자와 창작연대는 미상이나, 허균의 한문소설 <홍길동전>의 영향을 받은 것을 보아 17세기 이후에 창작된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임.

전우치는 16세기 중종 때의 실존 인물로, 당시 윤군평이라는 인물과 함께 방술로 유명하였음. <최고운전>처럼 <전우치전>도 민간설화에 의거해 창작되었으며, 해동도가의 세계관과 감수성이 그 바탕에 깔려 있음.

<전우치전>에는 약간의 이본이 존재하는데, 그 중 신문관본에서는 전우치가 임금에게 황금 들보를 내놓으라고 해서 이것으로 빈민을 구제함. 또 횡포한 무리를 징벌하고 억울한 이를 도움 -> 반권력적이고 활빈적인 면모를 보여줌.

<전우치전>에는 <최고운전>에는 없던 자국의 지배 권력에 대한 항서나 백성에 대한 옹호가 나타나고 있음. 그러나 중국에 대한 문제의식, 민족에 대한 자존의식, 젠더적 문제의식 따위는 나타나지 않고 있음.

<남궁선생전>, <장생전>, <장산인전>

세 작품은 모두 허균이 창작한 작품. 이 작품들은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신선전’ 창작의 전통 하에서 창작되었음.

장르적으로 <남궁선생전>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장생전>과 <장산인전>은 소설적 요소가 얼마간 있어도 소설보다는 ‘인물전’이라고 해야 옳음.

허균은 도가에 경도되어 도가서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도가 수련을 하기도 하였음. 이러한 허균의 사상적 지향에는 16세기 이래 있었던 선풍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

<남궁선생전>

남궁두는 전라도 임피의 사족인데 첩이 자신의 당질과 사통하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을 죽인 후 달아나 중이 되고, 그러다 권 진인을 만나 선술을 배우게 됨. 권 진인의 스승은 신라 시대 승려 의상의 제자인데, 도를 전할 사람을 찾지 못해 죽지 못하다가 권 진인을 만나 도를 전수하고 죽음. .. 암튼 남궁두는 스승 밑에서 7년간 선술을 수련하고 선도를 거의 이루엇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결국 실패하게 됨. 그래서 천선은 못되고 지선에 그치게 됨.

작품 말미 남궁두는 허균에게

“우리 스승꼐서 내가 인내심이 있음을 인정하셨건만 인내하지 못해 천선이 되지 못햇으니 ‘인’이라는 한 글자는 선가의 묘결이니 만큼 그대는 삼가 잘 지녀 잃지 말았으면 하오.”

ㅡ> 이 작품은 인내심이 강했던 남궁두의 연단 실패를 통해 인간이 일체의 욕념을 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하고 있음.

신선이 되고자 하는 것은 장생불사를 위해서인데, 남궁두는 만녕에 오래 사는 것에 대한 깊은 회의를 나타냄.

“(…) 사람이 세상을 오래 살고자 하는 것은 원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인데, 나는 이제 쓸쓸하기만 할 뿐 아무런 즐거움이 없으니 오래 살아 무엇하겠소?“

ㅡ> 허균은 도가에 경도되어 신선을 꿈꾸면서도 신선이 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내적으로 성찰하고 있음. 이 부분에서 신선소설 <남궁선생전>의 문제의식이 나타남.

또, 허균은 <남궁선생전>에서 도가적 상상력을 한껏 발휘해 초월적 신선의 세계를 호한하게 묘사하고 있음.

(장면 196~197)

ㅡ> 이전의 우리 문학사에서 볼 수 없던 상상력과 묘사력임. 필치가 기이하고 거리낌 없음.

<장생전>

<장생전>은 거지인 장생의 이야기로, 원래 밀양 좌수의 아들인데 팔자가 기구하여 호남과 호서를 떠돌다가 서울로 올라와 비렁뱅이들의 두목 노릇을 함. 그는 비천한 인간에게 각별한 친화감을 보여줌.

장생은 원래 검선인데, 자신의 진 모습을 감추고 있어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임. 장생에게는 그를 따르는 무리가 있지만, 그 행적이 비밀에 부쳐져 있다고 하였음.

<장산인전>

장한웅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로, 의원 집안 출신인 장한웅이 마흔 살에 지리산에 들어가 어떤 이인을 만나 연마법을 전수 받게 됨. 연마법은 귀신을 부리는 방술로, 이를 전수 받은 장한웅은 이를 이용해 악을 퇴치하는 등 도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줌. 이 작품은 장산인의 도사적 면모를 보여준,ㄴ 일화들을 여럿 제시하고 있음.

장생과 장한웅은 모두 허균과 동시대인으로, 이들은 모두 임진왜린이 일어난 해에 세상을 떠나게 됨. 흥미로운 점은 둘 다 시해(육신을 버리고 혼백이 빠져나와 신선이 되는 것)을 하고 있다는 것임. <장생전>과 <장산인전>에서는 시해법을 보여주고 있음.

우리 문학사에서 거지나 도사 같은 비주류적인 인간이 인물전에 입전된 것은 <장생전>과 <장산인전>이 처음임. 이들은 주류적 인간과는 다른 삶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허균은 인간과 그 삶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홍만종의 저술과 그 지향

홍만종은 31살 때인 1673년 <소화시평>이라는 시화집을 썼으며 49세때 다시 <시평보유>이라는 시화집을 썼음. 59세 때 옛 문헌에 수록된 시화들을 모아 <시화총림>이라는 책을 편찬하였음.

->이 책들은 홍만종의 시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민족문화유산 정리에 관심을 가졌던 홍만종의 고전학자로서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해줌.

홍만종의 36세 때 <순오지>를 썼는데, 순은 10을, 오는 5를 뜻함. 그래서 <순오지>는 15일 동안 쓴 글이라는 뜻이 됨. 여름에 장맛비가 내릴 때 홍만종이 15일만에 써낸 책임.

이 책은 4가지가 주목되는데,

1.     단군을 우리 역사의 출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

:24살에 집필했던 <해동이적>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던 사고임.

2.     자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적극적 긍정이 보인다는 점

3.     자국 어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게 나타난다는 점

: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조위한의 <유민탄> 등 10편의 가사를 소개하고 그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함.

또, 우리말 속담을 소중히 여겨 140여개를 기록하였음. ㅡ> 18세기 이후 민간 속담을 기록하는 문헌들이 나타나지만, 홍만종의 이 작업이 가장 이른시기의 작업으로 평가됨.

4.     유교를 절대화하는 관점에서 탈피함

: 유불도 삼교 회통이 제시되어 있으며, 특히 도가 사상이 많이 나타남.

ㅡ> <순오지>는 이처럼 문학사적, 사상사적 의의가 아주 큰 책이라고 할 수 있음.

저술 연도가 미상이고, 현전하지는 않지만, <순오지> 이전에 <동국악보>라는 책을 엮기도 하였음. 이 책은 <역대가>, <권선지로가>, <만분가>, <면앙정가>, <관동별곡> 등 가사 10편을 수록하고 그에 대한 비평을 달아놓은 책으로 추정됨. 이 비평은 <순오지>에 그대로 옮겨져 있음.

홍만종의 63세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술한 <동국역대총목>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함. 이 책에서도 역시 단군이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나타나있음. 20대에 저술한 <해동이적>에서 단군을 해동선파의 신원으로 간주한 후, 이후 쓰여진<순오지>, <동국역대총목>에서도 단군이 우리 역사의 출발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음.

이외에도 민간의 웃기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소화집인 <명엽지해>, <고금소총>, <속고금소총>을 엮기도 하였음.

<명엽지해>: 책력에 적은 우스운 이야기라는 뜻, 마을 노인이 들려준 소화를 적어놓은 것. 조선 초 강희맹의 <촌담해이>와 연결된다 할 수 있음.

또 시조 가집인 <청구영언>과 <이원신보>를 엮기도 하였음. 청구는 우리나라를, 영언은 말을 길게 한다, 즉 노래를 가리킴. 그래서 청구영언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노래라는 뜻이라 할 수 있음. 청구영언이라는 명칭의 시조 가집이 1728년 가객 김천택에 의해 엮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천택은 홍만종이 처음 엮은 <청구영언>에 여항 천류의 시조와 사설시조를 보태어 곡조별로 분류하는 증보작업을 꾀한 것으로 보임. -> 따라서 우리 문학사에서 시조 가집을 처음 편찬한 사람은 홍만종으로 보아야 옳을 듯

“입에서 나온 것이 소리가 되고, 소리를 조절한 것이 말이 되며, 말을 길게 한 것이 노래가 된다. 노래는 가슴속의 답답한 것을 쏟아 내어 마음을 형용한 것이다. 무릇 사람은 기쁘거나 화나거나 슬프거나 무료하거나 불평스런 마음을 모두 노래로 푼다. 그러니 사람의 뜻과 기운을 선양할 수 있고 정신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군자는 노래를 취한다.” -<청구영언> 서

ㅡ> 이 서문은 우리말 노래의 고유한 의의를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있어서 주목됨. 자국어 시가에 대한 정당한 의미 부여라 할 수 있음.

홍만종은 자국어와 자국 문화를 중시하여 속담을 채록하거나, 민간 설화를 채집하거나, 노래를 수집하기도 하였음. 또, 주체적인 시각으로 (단군이 역사의 시조) 자국 역사를 서술하기도 하고, 옛 문헌에 전하는 시화를 모아 편찬하기도 하였음. -> 홍만종의 이러한 작업을 뒷받침하는 사상은 ‘해동도가’ 사상이라 할 수 있음. 해동도가 사상은 민중과, 토풍과 친화적임. -> 홍만종은 다른 지식인들과 다르게 자국의 언어, 문자, 문화, 역사에 대해 긍정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기존과 다른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자 하였음.

그러나 홍만종이 모화주의 / 화이론에서 완벽히 벗어난 것은 아님. 홍만종의 저술 중 <소화시평>을 보면 ‘小华’(작은 중화)가 우리나라를 의미하는 말임. -> 소중화주의를 내포하고 있음.

즉, 홍만종에게 여러 진보적인 면모가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계 역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두어야 함. 그렇지만 17세기 후반에 해동도가 사상에 힘입어 홍만종이 주체적, 민중적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

마무리

해동도가 사상에 의거해 창작된 16~17세기 문학은 이전의 문학에서는 볼 수 없던 독특한 성취가 있음

1.      소설 장르를 통해 주제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

2.     신선, 이인들의 행적을 담은 책이 저술되고 있다는 점

3.     자국어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을 보여준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