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의 형성 경로
(1). 구운몽의 형성경로
<구운몽>의 형성경로는 세 가지 측면에서 조명되어야 함,
- 환몽구조: 작품을 감싸고 전체적으로 구조적 완결성 부여
- 편력구조: 액자 내부 서사의 주요 골격을 이룸
- 전기소설의 전통: 액자 내부의 하위 서사에 뼈대와 살을 제공.
-> 전기소설의 전통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함.
[전기소설 전통의 변용]
구운몽은 전기소설을 중심으로 한 당대까지의 소설 전통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는 작품. 당대 독자들은 <구운몽> 속의 기존 작품의 흔적과 그것이 작품 안에서 산출하는 새로운 의미망을 읽어내는 것에서 흥미를 얻었을 것으로 짐작됨.
1. 양소유와 진채봉의 결연
양소유와 진채봉의 만남은 양소유가 ‘양류사’를 읊고 우연히 진채봉이 이를 들은 뒤 화답시를 보낸 것에서 시작됨. ‘양류사’ 수창 대목은 당나라 때의 전기 <유씨전>에서 연유하고 있음.
(<유씨전>줄거리 82~83쪽)
<유씨전>에서 남녀주인공이 ‘양류사’를 주고 받는 대목은 애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구운몽>이라는 새로운 문맥 속에서 ‘양류사’ 수창 대목은 남녀주인공 간의 정감 넘치는 분위기로 전화되고 있음.
2. 양소유와 계섬월의 만남
양소유는 낙양 수재들의 문회에 참가하여 계섬월과 만나게 됨. 이러한 문회 장면은 성당 시인 왕지환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
<구운몽>에서 양소유가 낙양의 다른 문사들을 압도하고 계섬월과 결연하게 된다는 설정은 <옥루몽>에서도 반복되지만, <구운몽>에서는 낙양 수재들의 불만이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가한 줄을 알지 못하겠나이다.“라는 계섬월의 말로 수그러든 반면, <옥루몽>에서는 양창곡에 대한 선비들의 질시로 새로운 긴장 국면이 조성됨.
-> 즉, <구운몽>은 작품 속에 여러 갈등의 소지가 있으나, 작자는 갈등의 표출대신 심각한 갈등 상황의 연출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진행함.
이후 계섬월은 양소유와 정을 나눈 뒤 자신이 기녀가 된 사연을 말하고, 양소유에게 일생을 의탁하고자 함. 이 대목에서 기녀와 선비의 결연 과정을 담은 여타 소설들처럼 비탄에 잠긴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 다만, <곽소옥전>, <주생전>의 여주인공들이 남자주인공에게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던가, 배신에 대한 질투 같은 애정 갈등 상황을 보이고 있다면 <구운몽>에서 계섬월은 갈등 상황 대신 되려 다른 여주인공을 천거하고 있음.
-> 계섬월과의 결연 과정에서 전대 소설에서 갈등의 진원지로 설정되었거나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는 ‘애정 갈등 상황’을 교묘하게 화해 국면으로 전화하고 있음.
3. 난양공주와의 결연
애정전기에서 거듭 활용되는 소사와 농옥의 고사가 인용됨.
- 소사와 농옥의 고사: 퉁소를 잘 불었고 소사와 결혼해 그에게서 봉황의 소리 내는 법을 배웠으며, 십 수년이 지나자 퉁소를 불면 봉황 소리와 비슷해서 봉황이 날아와 그 집에 머무를 정도가 되었다.
진목공이 봉대를 지어주자 소사와 함께 그 위에 머물면서 먹거나 마시도 않고 수년 동안 내려오지 않았으며, 어느날 소사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면서 농옥은 봉을 타고 올라갔으며, 그래서 진나라 사람들은 봉녀사라 지었고 때때로 퉁소 소리가 들리곤 했다고 한다.
늑혼 모티프가 주목됨. 양소유는 정경패와의 혼인을 이유로 낙양공주와의 혼인을 거부함. -> 이 결과 태후의 노여움을 받아 하옥되는데, 천자와 양소유의 논란이 매우 자세히 묘사되어 있음.
: 늑혼 모티프를 채택하는 대다수의 작품에서 권력자의 횡포를 드러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구운몽>에서는 양쪽의 입장이 모두 타당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를 자세히 묘사함.
천자와 양소유의 논란을 통해 두 사람의 입장차가 줄어들지만, 이튿날 양소유의 상소가 태후를 진노하게 해 황제가 양소유를 죄주게 만듦
양소유를 풀려나게 한 것은 토번의 침입임. 외적의 침입은 영웅소설에서 주인공의 입신양명 계기를 마련해주는 장치로 활용되어 왔는데, <구운몽>에서는 혼사장애를 해소하고 새로운 결연을 맺게하는 계기로 활용될 뿐임.
4. 심요연과의 결연
자객 심요연은 당대의 호협전기 <홍선전>의 주인공 홍선에서 따온 인물. 심요연이 비수를 들고 양소유의 군막안으로 잠입하는 장면은 홍선의 잠입 장면을 차용한 것.
그러나 <구운몽>에서 <홍선전>은 호협전기의 복수, 보은이 아닌 전생의 인연을 성취하기 위한 장치로 바뀌어서 차용되고 있음.
-> 즉, 기존소설의 어떤 전통이든 <구운몽>의 새로운 문맥 속에서는 모두 남녀의 행복한 결말을 위한 도구로 이용될 뿐임.
-> <구운몽>은 작품 도처에 전대 소설을 차용해 전혀 새로운 문맥에서 변용하는 것에 성공을 거둠. 그리고 이러한 전기소설 전통 활용은 독자로 하여금 전기소설의 독서 경험을 되살리게 해,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방식임.
-> 그러나 ‘즐거움’은 상층의 배타적인 ‘교양’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구운몽>의 세계는 전기소설의 독서 경험을 가진 ‘유식자 동호 집단’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구운몽>이 전기소설의 전통을 차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새로운 문맥을 창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비극적 애정전기의 계보에 놓이는 작품들의 주요 모티프임. 이들 작품에서 드러나는 애정장애는 주인공들의 순수한 애정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강고하고 심각한 것. -> 온갖 시련에도 사랑을 쟁취하려는 주인공의 내면을 통해 독자는 삶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며,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는 마지막 모습에서 ->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됨.
애정 장애가 심각할 수록, 주인공들의 시련의 강도가 높을수록, 작품의 결말부에 이르러 비극성이 증폭될 수록 애정전기의 문제제기는 심각해지며, 대단한 환기력을 가지게 됨.
그러나 <구운몽>에서는 이러한 비극적 애정전기의 창작의도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변용이 이루어지고 있음.
- 양소유와 정경패, 난양공주의 결연과정: ‘늑혼모티프’를 무력화 -> 절대 권력자의 횡포 대신 절대 권력자의 관용과 배려를 배치함.
- 계섬월, 적경홍, 가춘운 등 하층 여성과의 결연 과정: 남녀의 신분차로 인한 시련의 전개 및 삼각 갈등의 진행 무력화. -> 신분차이로 인한 장애: 여성 스스로의 일부다처 긍정으로, 여성들 사이의 갈등: 상층 여성의 시혜와 하층 여성의 ‘차등의질서 수용’
-> 여성 개개인에 대한 양소유의 지속적인 ‘다정’ 역시 갈등 봉합에 영향을 줌. 남주인공의 변심이나 무정은 찾아볼 수 없음.
- 진채봉과의 결연 과정: 가장 뚜렷하게 비극적 애정전기와의 차이를 보여줌. 가문이 몰락하며 궁녀가 된 진채봉은 <유씨전>의 유씨나, <보자영최영합전> 등과 달리 교묘한 장치를 통해 궁궐에 남은 채 정절을 보전하며 상대를 기다릴 수있게 되고, 권력자는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음.권력자에게 몸이 묶인 여인이 권력자의 눈을 피해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자 하는 염원에는 비극적 애정전기의 현실 비판적 의식이 투영되어 있음. 그러나 진채봉은 환선시를 지어주는 대목에서 슬픔을 맛보지만, 결국 황제와 난양공주의 배려로 말미암아 양소유와의 결연에 성공하게 됨. 또한 이 과정에서 양소유의 마음 씀씀이도 재차 강조됨 “(…) 양상서는 낭자의 ‘양류사’를 몸에 간직하여 잠시도 떼놓지 않고 낭자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시거늘 (…)“
-> 구운몽은 비극적 애정전기의 주요 모티프를 가져오면서도 갈등의 맹아를 제거하여 극도의 슬픔이 나타나지 않도록 함. 소설로서는 이례적으로 갈등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 이는 의식적인 기획의 결과.
‘환몽구조’의 변용
김태준 선생은 성진을 주체로 하는 깨달음의 과정을 ‘불교의 인연설’과 연관짓고, 양소유의 일대기를 ‘일부다처주의의 합리화’와 연결지어 <구운몽>을 해석하였음.
성진과 양소유의 이야기는 각각 <구운몽>의 외곽을 감싸고 있는 환몽구조와 액자의 내부에 해당하는 편력구조에 해당됨. 이 구조가 <구운몽>의 핵심 구조를 이룸.
<구운몽>의 무게중심이 ‘성진’과 ‘양소유’ 중 어느 쪽에 있는가는 논란의 소지가 있음. 육관대사의 가르침과 성진의 깨달음을 사상적 핵심으로 보고 <구운몽>을 ‘사상소설‘로 해석하려는 쪽이 있는 반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양소유의 일대기를 요체로 보는 쪽이 있다. 이 경우 작품의 액자(성진)를 내부의 양소유 일대기를 전개하기 위한 장치로 봄으로써 ’액자‘의 비중을 폄하하는 경향을 드러냄.
<구운몽>의 환몽구조는 <삼국유사> 조신전의 환몽구조를 이어받았을 가능성을 배재하기는 어려움. (<구운몽>은 전통시기 서사문학의 전통을 흡수하고 있으므로)
그러나 <조신전>의 경우 액자 내부(꿈)의 비참한 현실상으로 인해 ‘인생무상’의 깨달음을 얻게된다는 불교적 교훈을 담고 있음. 반면 <구운몽>은 동일한 환몽구조를 취하면서도 변용을 가해 다른 효과를 만들어냄.
1. 액자 내부에 해당하는 꿈속 현실의 차이
: 꿈속 현실의 차이는 ‘깨달음’의 과정과 내용의 차이를 낳음.
<조신전>- 꿈속 현실이 극도로 비참함. -> 인생무상의 깨달음을 얻음
세속의 현실을 부정하고 종교적 구원을 긍정
<구운몽>- 양소유와 여덟여인의 삶은 행복으로 충만함.
성진과 양소유의 삶 중 어느 것도 참/거짓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결론
“‘인간세상에 윤회하는 꿈을 꾸었다.‘ 하는데 이는 꿈과 인간 세상을 나누어 다르다 함이니 네가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하였구나. (…) 성진과 양소유 중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꿈이 아니란 말이냐?“
-> 작품 속 현실로 그려진 성진의 삶이 비현실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로 그려진 반면, 작품 속 꿈에 해당하는 양소유의 삶은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로 그려짐. 이러한 점에서 <구운몽>은 더욱 오묘하고 몽롱한 깨달음의 효과를 준다.
-> <구운몽>은 전대의 환몽구조를 혁신하여 좀 더 풍요롭고 차원 높은 경지를 열었다 할 수 있음.
2. <조신전>과는 다른 복잡한 환몽구조
: <구운몽>의 깨달음은 양소유가 행복의 극점에서 느낀 허탈감, 무상감에서 출발함.
“‘역가 양승상과 여러 부인들이 노닐던 곳이라네. 그렇건만 승상의 부귀 풍류와 여러 부인들의 아리따운 모습이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이요?”
<조신전>류의 작품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인생무상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구운몽>은 부귀영화의 극치에서 느끼는 인생의 덧없음이라는 문제를 제기함. <구운몽>은 현실의 고통과 분만을 ‘위로의 형식’을 통해 무화하는 것을 창작의 문제의식으로 삼고 있음. 또한 겨냥하는 독자층 역시 상층임. 따라서 <조신전>처럼 세계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인생무상을 추론하는 것보다 부귀영화라는 행복이 성취되었음에도 느껴지는 무상감, 결핍감이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된 것.
-> 이러한 환몽구조의 변용을 통해서 김만중이 <구운몽>을 창작하게 된 이유 한 가지가 드러남. 유배중인, 최상층 사대부로서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인 작자가 인간 존재의 근원적 결핍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현재의 지독한 불행을 이겨내고자 한 것으로 보임.
-> 이 경우 ‘본원적인 결핍감’이 작품의 주가 되고, 이는 <구운몽> 창작의 복합적인 의도 중 작자 자신을 위한 영역에 해당하는 것.
편력, 환원구조의 연원
<구운몽>은 ‘편력구조’를 ‘환몽구조’로 검싸안아 형식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는 점이 돋보임. 이러한 구조는 동시기 소설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따라서 이를 <구운몽>의 창안 요소로 생각할 수 있음.
그러나 환몽구조를 제외하고 본다면, 수미쌍관적 환원구조와 편력구조의 결합은 동시기의 중국 소설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음.
Ex) <비검기>: 도교 색채가 강한 작품. 도입부에서 부분적으로 환몽구조를 활용하고 있음. 꿈속 일대기에서 양소유의 편력구조를 보여주는 <구운몽>과는 달리 <비검기>의 여동빈은 꿈에서 깨어나면서부터 편력이 시작됨.
<비검기>에서 취하는 편력구조의 내용과 메세지는 <구운몽>과는 다르지만, 천상계의 주인공이 스승의 뜻에 반하여 세속의 삶을 염원하다가 인간계로 내려와 다채로운 사건을 겪고 스승의 도움을 얻어 다시 천상계로 돌아간다는 전체 구도가 <구운몽>과 비슷함.
-> 따라서 <구운몽>이 <비검계>류의 도가적 색채가 강한 소설에서 수미쌍관식 환원구조와 편력구조의 결합 방식을 차용했을 가능성이 있음.
또한 애정전기의 통속적 변용인 명대의 문언소설 <천연기우>는 도입부에 이어지는 장면+결말부에서 천상계의 인물인 옥향선자를 거듭 등장시켜 ‘적강모티프’를 활용하여 수미쌍관식 환원구조와 비슷한 효과를 냄. <구운몽>에 비해 각각의 결연담 자체가 가지는 완결성이 부족하고, 결연담끼리의 매개고리가 취약하지만 전체적인 구도가 <구운몽>과 매우 흡사하고, 특히 작품 후반부에서 주인공이 반란군 토벌을 통해 결연장애를 해소, 이전 장면에서 이루지 못한 결연에 성공하는 부분은 거의 동일하다 할 수 있음.
-> <천연기우>의 여성 편력구조를 정교화시키고, 불완전한 형식의 환원구조를 온전하게 만들면 <구운몽>의 뼈대가 된다 할 수 있음.
-> 다만 <천연기우>는 남주인공의 애정행각이 매우 외설적이고, 속세에서 천상계로 돌아가는 지점에 특별한 깨달음이 존재하지 않음. ‘기우적일대기’에서도 여성 편력을 통한 정욕 충족 외에는 다른 메세지가 존재하지 않음.
->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구운몽>이 <천연기우>나 그 이후의 통속염정소설의 전체적인 작품구조와 흥미요소에서 시사를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려움.
환몽구조, 엄격한 환원구조를 제외하고 ‘편력구조를 서사의 전체 골격으로 잡다가 반성과 깨달음으로 종결하는 구조’를 중심으로 보면 더 많은 작품이 <구운몽> 앞에 존재하게 됨. 이러한 구조는 동시기 동서양에서 일대 유행하던 소설 형식이었음.
특히 명말청초의 통속염정소설 중 여성 편력의 끝에서 인생무상의 깨달음을 얻는 작품이 많음. 또한 유럽 초기 장편 소설에도 편력구조, 복잡한 애정 관계의 결말을 종교에의 귀의로 이끄는 작품이 많음. 즉, <구운몽>의 구도는 동아시아의 오랜 문학 전통에 기반하면서 동시에 17세기를 전후한 중세 동서양소설의 보편적인 장르 관습과도 관련을 맺고 있음.
‘편력구조를 서사의 전체 골격으로 잡다가 반성과 깨달음으로 종결하는 구조’는 작품의 파격성을 다소나마 상쇄할 목적으로 도입부, 종결부에 교설적인 내용을 끼워넣었다고 보는 편이 옳음. 소설은 중세의 정통 문학 장르가 아니었으나 주류적 공식 담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때문에 환원구조, 혹은 교설적 메세지가 강한 깨달음의 구도를 사용해 편력구조 내부의 일탈과 파격을 완화하고자 한 것.
-> 작자는 이러한 구조를 통해 편력구조 내부의 흥미를 추구하면서도 표면상으로는 자신의 본의가 편력구조의 외부에 있다는 부재증명을 내세움. 또, 편력과정에서의 일탈과 그로 인한 환멸이 클수록 깨달음의 강도도 크다는 논리를 통해 편력 과정의 서술 제약을 사라지게 함.
<구운몽>은 이와 같은 구조를 사용하면서도 작품 내부의 편력구조를 참과 거짓으로 분별할 수 없다고 말하는 오묘한 수법으로 ‘부재증명’의 진위를 분별할 수 없도록 만듦. 이러한 점에서 <구운몽>의 작자는 동시기 흡사한 구조의 어떤 작품보다 최상의 부재증명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음.
통속염정소설의 모티프 변용
<구운몽>은 <천연기우>나 <육포단> 같은 염정소설의 환원구조와 편력구조, 흥미요소를 받아들이면서도 작중인물의 향락이 음탕하지 않을 정도로 조절하고 있음. 통속염정소설의 음란성에 대항하여, 상층 예법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않고 은근한 방법을 통해 충분히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육포단>류의 작품에 수시로 등장하는 노골적인 성묘사는 채택하지 않고 은근한 묘사로 대체하였으며, <육포단>에서의 편력 대상이 유부녀였던 것과 달리 양소유의 편력 대상은 상층의 규수, 여종 혹은 기녀이기 때문에 일대일 관계로 바라보면 애정전기의 연애담과 크게 다르지 않음.
<구운몽>의 중요한 서사 추동력 중 하나인 여성 주체의 속임수는 <육포단>류의 염정 소설에서도 활용되었음. 그러나 <육포단>에서는 속임수의 이유가 미앙생의 성적 능력 시험이었으며, 이 부분에서 노골적인 묘사가 나타남. <구운몽>에서는 이 부분의 흥미요소는 취하되, 자극적인 부분을 삭제하고, 바로 앞 대목에서 적경홍을 남자로 꾸며 양소유가 계섬월과의 관계를 의심케하는 속임수를 중첩시켜 재미를 배가하고 있음. 또한 <구운몽>에서 계섬월이 양소유에게 정경패와 적경홍을 배필로 추천하던 장면의 제목이 “계섬월이 원앙금에서 어진 이를 천거하다“였다던가, 두 여인이 기녀가 되어 양소유 같은 군자를 함께 섬기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고 하는 대목을 볼 때 이러한 속임수는 양소유의 여성 편력을 정당화하면서도 법도를 어지럽히는 음란성을 보여주지 않게됨.
<육포단>에서 미앙생이 염방의 계략에 빠져 추녀와 동침하는 장면은 ‘가춘운의 귀신 놀음‘ 장면에서 농락당하는 양소유의 어리석은 모습을 연상시킨다.
또한 양소유가 여도사로 가장하며 정경패를 만나는 장면은 <공공환>의 한 장면과 흡사함. 여주인공의 남장이 <최적전>, <홍백화전> 이래로 후대 장편소설까지 두루 보이는 반면 남주인공의 여장은 <구운몽>과 <창선감의록>이 시초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짐. 명말청초의 소설의 경우에도 남장 및 여장 모티프가 자주 발견되어 이러한 설정이 당시에 큰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임.
- 남장모티프- <화영집> 중의 유방삼의전에서 시작하여 재자가인소설의 대표작인 <옥교리>를 거쳐 후대 소설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보임
- 여장모티프- <공공환>, <오강설>, <옥루춘> 등
<공공환>, <오강설>과 같은 작품에 구체적인 영향을 받았다고는 할 수없지만, 당시 중국 소설에서 이러한 모티프가 인기리에 활용됐으므로 이런 유형에 속하는 작품을 읽고 <구운몽>을 전개했을 가능성이 있음. 그러나 위 작품들과 달리 <구운몽>은 그 파격적 성격이 완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뚜렷한 의도가 느껴짐.
양소유가 여장을 한 장면에서는
“재상댁 높은 문이 다섯층이요 화원 담장이 두어 길이니 엿볼 길이 없고, 정소저가 책을 읽고 예를 익혀서 일거일동이 구차하지 않은 바 도관과 절에 분향하지 않고 삼월삼짇날 곡강에서 노닐지 않으니, 외간사람이 어찌 만나볼 길이 있겠소? “
라며 정경패를 만날 수 없는 이유가 사대부가 여성의 법도임을 나타내고 있음. <공공환 >에서는 고을 태수의 집이므로 접근하기 어렵다는 간단한 설정만 있고, <오강설>에서는 문벌의 차이와 주변 적대 인물의 방해때문이라는 설정과는 크게 다르다.
또 <구운몽>에서 양소유와 정경패가 만나는 장면에서 여도사로 변장한 양소유가 거문고 연주를 하자 정경패는 음악을 품평한다.
“<예상우의곡>은 진선진미하나 세속의 소리, <옥수후정화>는 아름다우나 즐겁되 음란하고 슬픔이 과한 망국의 노래 (…)“
사대부의 미의식 또는 윤리의식을 독자에게 전달하고자는 의도가 느껴짐.
또한 마지막 곡을 연주하는 장면에서 양소유가 <봉구황>이라는 사마상여가 탁문군을 유혹하던 노래를 연주하자 정경패는 양소유의 속임수를 간파한 뒤 자리를 뜸. <오강설>, <공공환>의 주인공들이 첫만남에 우여곡절을 거쳐 동침한 것과 다르게, 여장한 양소유와 정경패의 만남은 이것이 끝임.
이후 정경패는 “규중 처자의 몸으로 남자와 마주 앉아 언어로 수작하였으나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야! (…) 저자가 사마상여라 해도 나는 결단코 탁문군이 되지 않으리!“라고 말하며 이를 수치로 여김.
-> <구운몽>은 앞선 중국소설과 동일한 모티프를 활용하여 스토리 전개의 흥미요소는 받아들이되, 당대 규범으로부터 완전히 일탈하지는 않도록 하는 안전장치를 곳곳에 마련해두고 있는 것임.
이러한 요소는 양소유와 진채봉의 결연 과정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음. 진패봉이 먼저 양소유에게 유모를 통해 결연 의사를 밝히고, 양소유가 흔쾌히 그날 밤 만나자는 뜻을 전함. 이때 진채봉은
“남녀가 혼인 전에 만나는 것이 예가 아닌줄 알되 (…) 하오나 밤에 만나면 남들의 의심이 있을 듯하고 부친이 아시면 잘못이라 여기실듯 합니다.“
“소저의 밝은 견해와 바른 뜻은 내가 미칠 바 아니로다!“
파격적이나 결정적인 한계를 넘지 않음. 통속염정소설이나 애정전기에 비해도 조심스러운 만남이지만, 이는 이후로 공격의 대상이 됨.
“반면 진채봉은 비록 재주와 용모가 빼어나다 하나 거동이 자못 존귀하고 진중하지 못하니 (…)“
혼인의 뜻을 먼저 밝힌 진채봉은 거동이 진중하지 못한 이로 평가절하되고 있음. 즉, <구운몽>은 자유로운 애정 관계가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경패와 같은 상층 사대부가 여성은 한 차원 높은 도덕성과 엄정한 예법을 스스로 지키는 한편,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여성에 대해 분명한 차등을 두고자 하고 있음이 드러남.
양소유의 끝없는 애욕추구와 정경패와의 혼인 이전에 가춘운과 동침하는 과정 역시 ‘가부장’의 승인을 통해서 인정되고 있음.
양소유가 여도사로 가장하는 속임수는 정경패의 부친인 정사도의 승인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음. 그의 입장에서 참된 풍류재자인 양소유가 여자로 가장하여 배필을 얻고자 한 일은 “재주 있고 정 많은 사람의 유희“이며, 정경패가 양소유를 여자로 여겨 만났기 때문에 탁문군과는 다르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가춘운과의 동침이라는 파격은 정실보다 시비를 먼저 보내 양소유의 적적함을 달래게 하자는 정사도의 승인을 통해 인정이 되며, “그저 보내자니 소홀하고, 예를 갖추자니 혼인전이라 마땅하지 않다“는 정사도의 고민은 정경패가 귀신 놀음을 제의하며 속임수 놀이로 이어짐. 정경패 일가는 물론 독자까지 양소유가 놀림감이 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파격을 잊게 되며 진정한 승자가 양소유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이를 통해 작자가 정사도라는 구세대 가부장과 양소유라는 신세대 가부장을 이용해 기묘한 남성중심의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