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신라의 문호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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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우리나라 한문학의 비조로 일컬어짐. 문학 뿐만 아니라 유, 불, 선을 회통하는 사상 방면에서도 주목되는 인물.

생애

최치원은 857년(9세기 중엽)태어남. 12살 때인 868년 당으로 유학을 떠나게 됨. 최치원의 아버지는 이때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함. (당시 신라에 당에 간지 10년 안에 과거 합격을 못하면 귀국을 해야하는 법이 있었기 때문.)

최치원은 당에 간 지 7년 만인 18살에 빈공과에 합격하였고, 2년 후 선주 율수 현의 지방관으로 부임하였음. 이후 3년 뒤 황소의 난이 일어났는데, 최치원은 고변이라는 자의 종사관이 되어 종군하였음. 서기라는 직책을 맡아 격문을 비롯해 갖가지 글을 작성함. 이때 <토황소격문>을 지음.

885년, 17년 만에 황제(당시 희종)의 조서를 가지고 사신의 자격으로 신라에 귀국함. 헌강왕은 최치원이 돌아오자 바로 시독 겸 한림학사라는 벼슬을 내림. 886년 최치원은 자신이 당에서 쓴 글들을 모아 놓은 <계원필경>을 헌강왕에게 올림. 아마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 이후 887년 헌강왕은 최치원에게 사산비명 중 하나인 <지증대사비명>을 지으라고 명령함.

당시 신라는 국운이 기울고 있었고, 최치원은 고국에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주변의 의심과 시기로 인해 뜻을 이룰 수 없었음. 이에 최치원은 경주에서 벼슬하기를 그만두고 지방관으로 나서게 됨. 태산군과 천령군, 부성군의 태수를 지냈음. ->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최치원은 백성들의 동향과 민심을 잘 읽을 수 있었음.

이무렵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음.

894년(최치원 38세)에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조를 올렸음. 진성여왕은 이에 기뻐하며 육두품으로서는 최고의 벼슬인 아찬을 내렸음. 그러나 신라의 귀족들은 부패하였고, 지방에서는 호족이 발호하여 최치원의 개혁안은 실행되기 어려웠음. 최치원은 이에 낙담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게 됨.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치원이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미상으로 남아있음.

저술들

중국의 역사서인 <신당서>, <예문지>에 최치원의 <사륙집(사륙변려문으로 지은 글 모음)>1권, <계원필경> 20권이 기록되어 있음.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전>에 최치원의 문집 30권이 세상에 유포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음. -> 이를 통해 당시에는 최치원의 문집이 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이외에도 <선사>, <수이전>, <제왕연대력> 등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선사>는 국선도의 역사를 서술한 책, <수이전>은 ‘참 이상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신라에 전해 오는 기이하고 신비한 이야기를 채록해 놓은 책임. <제왕연대력>은 중국과 신라 왕들의 연대를 기록해 놓은 연표로 보임.

<수이전>의 경우 저자를 고려 전기의 박인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박인량은 <수이전>을 증보한 것이지 원작자가 아님. <삼국유사>에 언급된 고본(古本) <수이전>이 최치원의 저술임. 조선 중기의 문인 권문해도 <대동운부군옥(권문해가 편찬한 백과사전)>에서 신라 <수이전>은 최치원의 저술이라고 명기한 바 있음.

최치원의 저술 가운데 온전히 현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뿐임. 문집은 일실되어 신문 잔편이 약간 전하고 있고, <수이전>은 실린 글 일부가 후대의 몇몇 문헌에 실려 있을 뿐임. 다행히 헌강왕의 명으로 지었던 <사산비명>은 비석이 남아 있어 확인할 수 있음.

최치원은 불교에 조예가 있어 <사산비명>외에도 화엄 승려의 전을 여러 편 썼는데, <법장화상전(현수전)> 한 편만이 현전하고 있음.

<계원필경>은 중국에 있을 때 쓴 글이고, 문집이 일실되어 최치원이 신라에 돌아와 지은 시문은 조금 밖에 남아 있지 않음.

새벽을 읊은 부

‘부’: 사물이나 풍경을 쭉 나열하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일정하게 산문적인 면모를 띔.

(부는 내용상으로 볼 때 체물(采物)과 사지(寫志)를 반드시 갖추어야 하고, 예술적인 표현의 문제에서는 필연적으로 포진에 주의를 기울여 사물의 외형과 내적인 이치(內理)를 잘 형상화해야 한다. 포서(鋪敍)와 형용을 중시하기 때문에 언어에 있어서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채를 구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곱고 화려한 색채를 띠게 된다. 이 밖에 부는 성운(聲韻)의 아름다움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산문의 서술 기법과 구성 방식, 운문 시가의 성률과 리듬을 결합하고 길고 짧게 이어지는 시구와 생동감 넘치게 다양하게 변하는 각운 및 대구법, 대우(對偶) 등을 활용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 [賦]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부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최치원은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율부’를 배웠음. 율부는 규식을중시해 대구와 평측(한자의 높낮이)를 까다롭게 따짐.

최치원의 부 중 <새벽>이라는 한 편이 현전하는데, 이 작품은 우리나라 최초의 부에 해당함. 보통 율부는 형식을 까다롭게 따져 형식주의적인 성향이 강한데, <새벽>은 형식보다는 내용이 주목됨.

<새벽>은 먼동이 틀 때의 시공간을 읊고 있음. 여러 물상이 등장하고 있어 분량이 몹시 방대함.

(은하수, 궁궐, 수레, 길, 새벽별, 어슴푸레한 숲, 나무들, 주막집의 푸른 깃발, 닭 울음소리, 마을에 쭉 펼쳐진 집들, 제비, 변방의 병영, 호가 소리 …) -> 동트기 시작할 때 눈에 들어오는 온갖 자연물과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읊고 있음. 최치원이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머물때 쓴 작품으로 여겨짐.

최치원은 <새벽>의 끝을 이렇게 맺고 있음

“상쾌한 새벽이 되니

내 영혼 푸른 하늘처럼 맑아라.

온 세상에 밝은 해 비치자

어둠이 바위 골짜기로 사라지네.

천 개의 문과 만 개의 창이 비로소 열리고

넓은 천지가 활짝 펼쳐지누나.“

ㅡ> 당나라에 유학 온 젊은 최치원의 기백과 포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정념이 투사되어 있음. 따라서 풋풋하고 맑은 최치원의 영혼이 잘 느껴짐.

시 세계

최치원의 남긴 시들은 몇 가지 경향성을 보임.

1.     ‘그리움’의 정서

: ‘그리움’을 한국문학사에 처음으로 뚜렷하게 각인한 문인이 최치원이라 할 수 있음. 여러 종류의 그리움 중 최치원의 시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점이 중요함.

“그대와 서로 만나 노래하고 시 읊나니 / 흐르는 세월이 장대한 마음 꺾음을 한탄 마세나. / 다행이 봄바람이 길 영접하면 / 꽃 피는 좋은 시절 계림에 닿겠지,“ - <벗이 제야에 보내준 시에 화답하다>라는 시. 신라에서 당으로 유학온 벗에게 화답한 시임.

최치원은 어렸을 적 당으로 유학가 빈공과에 합격했지만, 중국인 과거 합격자와 빈공과 합격자 사이에는 차별이 존재했음. 최치원은 능력이 있었으나 민족으로 인한 차별을 받아야 했음. 이러한 차별로 인해 고국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이 더 컸을지도 모름.

2.     이별의 슬픔

: 최치원의 작품들은 한국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이별의 정한‘을 집중적으로 표출하고 있음.

이별의 슬픔은 그리움과는 다르지만, 그리움과 종종 연결되기도 함.

“만나서 잠시 초산의 봄 즐기다가 / 다시 헤어지려니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 바람 맞으며 슬피 바라본들 이상타 마오. / 타향에서 고향 친구 만나기 참 어려우니. ”

- <산양에서 고향 친구와 만나 이야기 나누다가 헤어지며>라는 시. ’초산‘은 산양을 가리키는 지명임. 떠나가는 벗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최치원의 모습이 생각남.

3.     ‘술회‘

: 술회란 마음을 서술하는 것을 말함. 즉, 회포. 술회를 주로 하는 시를 술회시라고 하는데, 박지원의 술회시는 지식인으로서 느끼는 번뇌와 삶에 대한 성찰을 주로 닮고 있음. 특히 혼란한 세상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에 대한 아려움을 읊고 있음.

“여우는 미녀로 잘 둔갑하고 / 살쾡이는 선비로 잘 가장하네. / 뉘 알리 짐승들이 / 사람 몸으로 변신해 홀리는 줄을. / 하지만 변신은 외려 쉬운 일이요 / 양심 지키기가 제일 어렵네. / 그러니 참과 거짓 알고 싶다면 / 마음의 거울 닦아 비춰 보게나.”

- <옛 뜻>이라는 제목의 시. 혼란한 세상에서 양심을 지키고 사는 일이 참 어렵다는 것과, 참과 거짓을 분간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수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 자기 성찰적 면모가 강한 시.

후대의 문학사에는 혼란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하는 가에 대한 번뇌와 고미을 담은 술회시를 쓴 시인들이 많음. 문제적 시인일 수록 술회시를 많이 남김. 최치원의 술회시는 문제적 문인의 술회시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주목됨.

4.     하찮거나 미천한 존재에 대한 연민

: “거친 밭가의 적막한 곳에 / 다복하게 꽃 피어 가지 휘었네. / 매화비 겪어 향기 그치고 / 보리바람에 그림자 비스듬하네. / 수레 탄 이 뉘라서 보아 줄까? / 벌과 나비만 옅보고 있네. / 천한 땅에 태어난 것 스스로 부끄리니 /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것 슬퍼할만 하네.”- <접시꽃>. 중국에 있을 때 외국인으로서 차별받은 최치원의 경험이 투사되어 있다고 여겨짐. 즉, 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느껴짐.

최치원의 시에서 드러나는 차별에 대한 감수성은 사회역사적 맥락은 다르지만 후대의 신분 차별, 적서 차별, 젠더적 차별에 대한 감수성과 연결됨.

5.     향악에 대한 관심

: 최치원은 <향악 잡영>이라는 다섯 수의 시를 지었는데, 이 중 <대면>과 <속독>은 탈춤을 노래한 것이고, <산예>는 사자춤을 노래한 것임. -> <삼국사기> 악지 편에 작품들이 실려있음. 이를 통해 신라에 다양한 토속 놀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악무를 노래한 시들은 후대의 ‘악부시’와 연결됨. -> 최치원의 <향악 잡영>은 우리 문학사에서 악부시의 출발점을 보여줌.

* 악부시: 자국의 노래나 놀이, 풍속 등을 읊은 시. 고려 후기에 나타나 조선때 풍부하게 창작됨.

최치원의 한시가 창작된 때는 신라 말기인데, 그 시적 성취가 매우 높음. 이 무렵 신라 한시의 수준이 높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

“중국의 사신 호귀후가 신라의 한시들을 많이 채록해 중국으로 돌아가 재상에게 보고하기를, “저 이후로는 무인을 신라에 보내지 않았으면 합니다. 신라의 임금이 시를 모아 인쇄한 책을 주기에 저는 전에 시 짓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억지로 부끄러움을 참고 화답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웃음거리가 될 뻔 했습니다.”라고 했는데, 식자들이 옳은 말로 여겼다.“

ㅡ>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대승복사비명> 내용 중. 당시 신라의 한시 수준을 잘 나타내는 대목.

<수이전> 외

<수이전>

<수이전>은 당시 신라에 전해지던 이야기들을 기록한 책. 이야기들의 시공간적 배경은 모두 신라임. 하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모두 초현실적이고 신비함. <수이전>에 실린 이야기의 대부분은 ‘지괴’에 해당함. 최치원은 민간에 전해지던 이야기에 애착을 느껴 책을 저술했을 것으로 여겨짐.

*지괴: 기과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기록한 글. 중국에서는 4-5세기 육조시대 남조 때 지괴가 성행함. 동진의 간보가 지은 <수신기>가 대표적인 성과.

최치원의 <수이전>은 우리 문학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지괴집이라 할 수 있음. 하지만 <수이전> 속에는 지괴 뿐만 아니라 소설도 일부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보임.

<수이전>은 인기가 있어 고려 초의 문인인 박인량이 증보 작업을 했고, 이후 김척명이라는 고려 문인이 다시 개작하였음.

고려 말부터 이런 종류의 글을 패설(자질구레한 이야기)이라고 불렀는데, 대부분 지괴가 속했지만 간혹 소설에 해당하는 것도 있었음.

Ex) <수이전>에 실려 있는 <호원(‘김현감호)>

: <삼국유사>에는 김현감호라는 이름으로, <대동운부군옥>에는 호원이라는 이름으로 실려있음. 작품 내용이 호녀에 관한 내용이므로 호원이 원 제목으로 보이며 <삼국유사>의 작품명은 일연이 임의로 바꾼 것으로 보임.

<호원>은 단순하고 짧은 내용인 지괴를 넘어서서 복잡하고 심각한 메세지를 담고 있어 초기 전기소설로 간주할 수 있음. -> <호원>을 초기 전기소설로 본다면 최치원을 우리 문학사 최초의 소설작가로 생각할 수도 있음. 최치원이 당에서 유학하던 시절 당에서 전기소설이 성행했었는데, 이때의 독서 경험 + 최치원이 가지고 있던 신라의 토속에 대한 관심 = <호원>의 창작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임.

ㅡ> 즉, 최치원은 단순한 이야기인 지괴뿐만이 아니라 더 복잡하고 발전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소설을 창작한 작가라는 점이 주목됨.

<선사>

현전하지 않음. 아마 국선(화랑)의 역사를 기술한 것으로 여겨짐.

최치원은 <난랑비서>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 교를 베푼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에서 자세히 말했다.”

라고 말함. ‘풍류도‘는 화랑도를 말하는데, 최치원은 풍류도가 공자와 노자,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망라하고 있다고 말하였음. -> 화랑을 적극적으로 긍정했기 때문에 이러한 발상이 가능한 것.

<법장화상전>

최치원이 쓴 고승전 중 현전하는 작품. 법장은 의상과 동문수학안 당나라의 고승임. 최치원은 장안의 법문사에 머물 때 이 글을 썼음.

<법장화상전> 이외에도 몇몇 화엄 승려의 전을 썼지만, 현전하지는 않음. 우리 문학사에서 <법장화상전> 이전에도 창작되었었음. Ex) <원효전>, 그러나 현전하는 것은 없음.

명문 사산비명

<진감선사비명>, <낭혜화상비명>, <지중대사비명>, <대승복사비명> 넷을 합해 ‘사산비명(四山碑铭) ‘이라고 부름. - 네 군데의 산에 세워진 비명이라는 뜻.

*비명(碑铭): 碑文과 铭文을 말함. 비문은 碑主의 사적을 기록한 글이고, 명문은 비문의 끝에 붙인 비주를 칭송한 글을 말함. 명문은 비문과 달리 운문으로 되어 있음.

대승복사라는 절을 창건한 연유, 절과 왕실의 연관에 대한 전말을 기록한 <대승복사비명>을 제외한 세 글은 모두 고승을 위해 쓴 글임.

사산비명은 모두 왕명에 따라 지어졌음. 네 개의 비문은 그 형식이 일률적이지 않고, 각자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음. 이는 최치원이 각각의 비문을 다르게 쓰기 위해 고심한 흔적으로 보임.

<진감선사비명>에는 서론이 앞부분에 길게 나오는데, 비주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유교와 불교의 도가 서로 다르지 않으며, 한곳에 귀착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음.

<낭혜화상비명>에는 비문의 끝에 긴 논평이 첨부되어 있음.

<지증대사비명>에는 비문의 끝에 최치원이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비명을 쓰게 된 경위를 자세히 밝히고 있음.

ㅡ> 일반적으로 비문은 비주의 사적을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최치원은 이러한 관행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비문을 쓰기 위해 노력하였음.

사산비명은 모두 사륙변려문으로 지어졌고 장편인데, 변려문으로 쓰여진 것은 당시의 문풍에 따랐기 때문임. 변려문은 대구를 맞춰야하고, 고사를 많이 구사해서 글을 읽기가 쉽지 않음, (고려시대에 이르면 변려문 대신 고문이 일반화 됨, 고문은 글쓰기에 제약이 없어 변려문 보다 쓰고 읽기가 쉬움.)

사산비명과 최치원의 사상

사산비명에서 최치원의 불교에 대한 깊은 조예를 확인할 수 있음.

1.     최치원의 유불 회통(유교와 불교가 하나로 귀착되며, 도가 하나임)사상을 보여줌.

: 유교, 불교 중 어떤 것의 우위가 없다는 생각.

2.     신라 불교에 대한 적극적 긍정

: 신라가 불교의 융성함에 있어 중국을 능가하며, 미륵이 신라에 강생할거라고 말하거나 (<낭혜화상비명>)

해인이 동쪽으로 흘러 군자의 나라에 부처이 도가 나날이 깊어지고 있다. (<지증대사비명>)라고 말한 것에서 신라 불교에 대한 최치원의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음.

ㅡ> 최치원은 신라를 불국토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신라 불교에 대한 긍정은 자국 신라에 대한 최치원의 자부심과 연결되어 있음.

조선시대의 승려들은 최치원의 사산비명을 교본으로 삼아 문장과 불교 공부를 하였음. 그래서 조선의 고승들이 사산비명에 여러 주석을 붙인 것들이 남아있음. (글이 어렵기 때문에 자세한 주석을 붙여 책으로 엮고 이것으로 공부를 하였음.)

사산비명과 최치원의 문인적 자의식

사산비명에서 문학사적으로 주목되는 것은 사산비명의 여기저기에 문인으로서 최치원의 자의식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것임.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과 남과는 다른 창의적인 글을 쓰겠다는 마음이 두드러짐.

Ex) <지증대사비명>

: “지증대사 비문을 쓰기 위해 기존의 비문들을 검토해 보니 ‘무거무래(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 ‘불생불멸(태어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와 같은 진부한 말 일색이고, 새로운 뜻이 없다.”

ㅡ> 최치원은 이 비명을 쓰는 데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음. 창의적인 글을 쓰고 싶었지만 그 과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으로 보임. 최치원은 이 글을 쓰는 데 8년이 걸렸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스스로를 문인이라고 자부하는 최치원의 문인적 자의식이 확인됨. (?)

<낭혜화상비명>

: “중국에 유학한 것은 대사와 내가 모두 같이 하였는데, 누구는 스승이 되고, 누구는 글을 짓는가? 아마 심학자는 높고, 구학자는 수고로운 것인가. (…) 그런데 심학자는 덕을 세우고 구학자는 말을 세우니, 덕이라는 것은 혹 말에 의지해야 가히 일컬어질 수 있으며, 말이란 것은 혹 덕에 기대어야 썩지 않고 오래도록 전할 것이다. 가히 일컬어질 수 있다면 마음이 능히 멀리 뒷사람에게 보일 것이며, 썩지 않고 오래도록 전한다면 말 또한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으리라. 가히 할 만한 일을 가히 할 만할 때에 하니, 다시금 어찌 글 짓는 일을 굳게 사양하겠는가?”

ㅡ> 심학자는 마음을 닦는 학자라는 뜻으로 승려를 칭함. 구학자는 언어 행위로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 문인을 뜻함. 승려와 문인을 대등하게 놓으며 문인의 창작 행위에 각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

=>최치원은 남과 다른 창의적인 글을 쓰겠다는 마음과, 불후의 문장을 남기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음. 훌륭한 고승들의 비문을 씀으로써 후대까지 자신을 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던 것. 이를통해 우리 문학사에서 최초의 문인적 자의식을 최치원에게서 발견할 수 있음.

<계원필경>

: <계원필경>의 책 이름에서도 최치원의 문인적 자의식을 확인할 수 있음. ‘필경’이라는 말은 붓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뜻임. -> 최치원이 글짓는 것을 자신의 본분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최치원보다 한 세대 뒤의 문인인 최승우는 <호본집>이라는 문집을 저술했음. ‘호본’은 생계의 바탕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글쓰기가 생계의 밑천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러한 이름을 붙였던 것.

ㅡ> 필경, 호본 등의 이름은 9세기 후반 이후 문인적 자의식이 문학사에 뚜렷히 대두됨을 보여줌.

최치원의 자국 인식

최치원은 신라가 ‘해가 뜨는 나라’라는 말을 여러 군데서 했음. 또 신라를 인역仁域, 인방仁方으로 불렀음. 인역, 인방은 동방이라는 뜻도 있지만 어진 지역이라는 뜻도 있음. 이러한 인식의 연장ㅇ선상에서 신라를 ‘군자국’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음.

ㅡ> 최치원이 자국에 대해 강한 자긍심을 지녔음을 알 수 있음. 그리고 이러한 자국에 대한 자긍심을 풍류도나 신라 불교에 대한 긍정, 항악이나 설화 등 자국 문화나 풍속에 대한 애정과 연결됨,

그러나 최치원은 중국의 천하 질서를 적극 긍정하며 신라를 당의 제후국으로 인식했음. 최치원의 이른 당 유학 경험과 이러한 인식은 관련이 있다고 보임.

또, 최치원은 신라의 중국화(한화汉化)를 적극 긍정하였음.

Ex) <낭혜화상비명>: 무열왕이 신라의 복식을 중국식으로 바꾼 것을 적극적으로 찬미함.

<지증대사비명>: 헌강황이 “화풍으로 폐풍을 일소”한 것을 찬미함.

ㅡ> 자국의 제도나 언어, 습속을 낙후되거나 열등한 것으로 여겨 이를 중국식으로 바꾸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 최치원이 향가를 짓지 않고 한시만 지은 것도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음.

김부식은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조 에서

“최치원은 <제왕연대력>이라는 책에서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신라 말들을 모두 왕으로 바꾸었는데, 이런 말이 비루해서 일컫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까. 지금 신라사를 기록할 때 신라의 말을 그대로 두어야 마땅하다.”

ㅡ> 김부식은 최치원과 다르게 역사 기술에 신라어를 쓰는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여김.

=>최치원은 자국 문화나 풍속에 대한 긍정과 애착이 있었지만, 다른 일면에는 중국의 제도나 문화, 풍속이나 습속으로 신라의 풍속을 대체시켜야 한다고 여기는 지향이 존재하였음. 이는 일종의 모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문인인 최치원 내부에 이러한 모순이 있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음. 그리고 후대의 문인들에게도 이러한 모순은 계속해서 관찰됨.

최치원의 은거와 그 의미

최치원은 은거를 택하고, 은거 이후의 종적은 묘연함. 최치원의 이러한 행위는 ‘지식인에게 은거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묻게하며, 이후의 지식인의 문인의 은거. -> 이러한 독특한 동아시아적 행위 패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음.

최치원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한데, 나중에 신선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결국 자살했을 거라는 설도 있음. 1833년 4월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서유구는 <계원필경>을 간행한 바 있는데, 이 저술에서 최치원이 충청도 홍산의 극락사라는 절 뒤에 묻혔다고 하였음.

은거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1.     가(假)은거: 가짜 은거

2.     진(真)은거: 진짜 은거. 최치원의 경우는 진은거임.

최치원의 은거는 일종의 내적 망명이라고 할 수 있음. 최치원이 남긴 시 중 어떤 스님에게 말하는 투로 되어 있는 시가 있는데,

“스님아! 나는 정말 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안 나올테니 정말 두고 봐라.” 이렇게 읊고 있음.

ㅡ> 최치원에게 은거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선택된 비장한 은거임. 이 경우 은거는 지식인에게 있어 자살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자신의 존재를 걸고 하는 행위라 할 수 있음.

은거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는 태도라 할 수 있음. (자신의 어떠한 입장을 고수하고자 지조를 지키는 행위.)

최치원의 은거는 최치원 개인의 ‘윤리적 물음’이 개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음. 최치원이 신흥 세력들에게 붙지 않고 역사 밖으로 나와버린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나다운 것이며,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는 것인가?’라고 하는 윤리적 물음에 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음.

최치원은 역사에서 나와 자신의 재능, 희망, 욕망과 같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음. 이러한 행위는 죽음이나 다름 없는 행위이며, 이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 최치원의 은거임.

육두품 문인의 행방

역사적 전환기인 나말여초 시기 육두품 문인의 역사적 행방

1.     최승우

: 최치원과 마찬가지로 당에 유학해 빈공과에 급제한 후 893년 신라에 돌아왔음. 귀국 후 견훤을 위해 일하였음. 왕건에게 보내는 격문을 짓기도 함.

2.     최언위

: 최치원의 사촌 동생. 18살에 당에 유학해 빈공과에 급제했으며 909년 귀국함. 귀국 후 신라에서 집사성 시랑 서서원 학사라는 벼슬을 제수받음. 이후 고려 왕건에 귀의해 태자태부가 됨. 그리고 한림원 대학사 평장사의 지위까지 오름. 왕건을 위해 견훤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신 쓰기도 함. 원래 최인연이라는 이름을 썼었는데, 고려에 귀의한 후 이름을 최언위로 바꿈.

고려 초기 고승의 비문은 최언위가 거의 다 썼음. 고려의 제도적 초석을 놓는대 큰 기여를 한 인물.

ㅡ> 이 두 사람은 최치원과 달리 은거를 택하지 않고 신흥 세력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주목됨. 현실에 참여하여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실현하였음.

최승로라는 문인의 행방도 주목되는데,

최승로는 최은함의 아들임. 고려때는 골품제가 없어져 최승로를 육두품 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은함이 육두품이므로 육두품 문인의 행방을 아는 것에 도움이 됨.

최승로는 고려 제6대 임금인 성종에게 시무 10조를 올렸는데, 성종이 이 시무책을 많이 채택함으로써 고려의 유교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됨.

신라는 무열왕 이래 중국화가 점차 진행되었음. 최치원은 이런 추세를 긍정하고 거기에 힘을 보탰었음. 그러다가 고려 때 와서 최승로에 의해 중국화가 다른 단계로 진입하게 됨.

빈공과 출신 육두품 문인의 공과

최치원을 위시로 한 빈공과 출신 육두품 문인들에게는 공/과가 동시에 존재함.

1.     공

: 한시 문학의 수준을 크게 향상 시킴. -> 이를 통해 신라의 문학은 동아시아 보편의 높이까지 도달할 수 있었고, 신라 문학의 심미적, 정신적 수준의 향상을 낳았음.

2.     과

: 신라의 문학을 한화시킴 -> 한문학은 중국을 전범으로 삼기 때문에, 이를 따라가며 동아시아 보편의 높이(중국문학)에 도달시킨 것은 결과적으로 자국 문학의 고유성을 억제하거나 약화시키면서 중국을 따라가려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음.

ㅡ> 빈공과 출신 육두품 문인들은 ‘자기‘에 대한 고려 없이, ’타자‘에 대한 학습과 수용에만 치중하였음. 안과 밖을 동등하게 고려했다면 한시 뿐만 아니라 향가 역시 함께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

최치원을 비롯한 나말여초 육두품 문인들은 한국문학의 지적, 심미적 수준을 향상시켰음. 하지만 이들이 만들어낸 문화는 지배층의 문화. -> 이들은 한시 문학을 지배층의 문화로 만들어놓으며 이전보다 지배층 <-> 백성 간의 문화적 거리를 벌려 놓았음. 하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기층문화를 지켜 나갔음.

상층문화와 기층문화의 간격이 이전보다 나말여초의 전환기에 좀 더 커졌고, 육두품 문인들이 이를 주도 하였음. 이 때문에 상층은 외부(중국)에서 받아들인 문화를 향유하고, 하층은 상층의 문화와는 다른, 고유한 것(기층문화)를 담지하게 됨. -> 이러한 괴리는 고려 시대로 이어져 문화적 틀로 고착되어 감.

이러한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문학사에 새로운 과제로 남았고, 나말여초의 한문학은 이러한 난제를 한국문학사에 남기게 됨.

*최치원 이외의 신라 시대 문인들

월명사와 충담사 -> 향가만을 남겼고, 한시문은 없음.

강수: 7세기에 활동한 문인. <삼국사기> 열전 강수전의 언급을 보면 삼국 각축기 때 강수가 주로 신라의 외교 문자를 맡아 지었다고 함. 한문학을 하였음. 강수는 원래 임나가야 출신인데, 임나가야가 신라에게 복속된 뒤로 신라를 위해 일하게 됨.

<삼국사기> 강수전의 말미에는 “문장은 강수, 제문, 수진, 양도, 풍훈, 골포다.”라는 신라 고기의 말이 인용되어 있음. 이들은 최치원 이전의 문인들로 보이는데, 현전하는 문헌이 없어 어떤 글을 썼는지 알 수 없음.

김대문: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에 활동함. 진골 신분으로, 한산주 도독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음. <삼국사기>에는 그가 지은 <화랑세기>, <계림잡전>, <악본>, <한산기>, <고승전>과 전기 몇 권이 현전한다고 언급되어 있음.

<악본>은 신라의 음악에 대한 글로 보이고, <한산기>는 한산주 도독 시절 남긴 한산에 대한 인문지리학적인 책으로 보임.

ㅡ> 김대문은 지적 관시이 폭 넓은 저술가였던 것으로 보임.

<삼국사기> 김대문전의 말미에는 박인범, 원걸, 왕거인, 김운경, 김수훈 등의 문인이 거론되어 있지만, 사적이 망실되어 열전을 쓰지 못한다는 말이 덧붙어 있음. 이들도 신라 시대의 주목할 만한 문인이었던 것으로 보임.

이중 김운경은 신라인 중 빈공과에 처음으로 합격한 사람임. 박인범은 최치원과 동시대의 인물인데, 빈공과에 급제한 후 귀국하여 한림학사가 되었음. 특히 시를 잘써쓰며, 불교에도 조예가 있었던 인물. (<동문선>에 칠언율시 10수와 산문 2편이 실려서 현전하고 있음.)

최광유: 최치원과 동시대의 인물. 최치원, 최승우, 박인범과 함께 신라 십현의 한 사람으로 꼽힘. 당에 유학 갔지만 빈공과에 급제는 하지 못한 것으로 보임. <동문선>에 칠언율시 10수가 실려 전하는데, 이방인의 외롭고 힘든 삶을 노래한 것이 많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