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무신란 이후의 문학과 신진사류의 의식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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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란과 문학장의 변화

고려전기; 문벌 귀족 사회로, 문벌귀족들에 의해 한문학이 주도됨.

인주 이씨(이자겸), 해주 최씨(최충), 경주 김씨(김부식) 등의 문벌이 주목되는데, 이러한 문벌의 인물들이 과거를 통해 입신하고 권력을 차지했으며 문학 담당층이 되었음.

1170년(고려 의종)에 일어난 무신란을 분기점으로 고려 후기가 시작됨. 정중부는 반란을 일으켜 백여 명의 문신을 살해하고 정권을 차지함. 이 당시 개경의 문신이 5백여 명쯤 됐는데, 1/5을 살해한 것. 살아남은 문신 중 상당수는 무신에게 포섭되었음.

수많은 문신이 살해되며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지방의 유생들이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이들을 신진사류라고 부름.

정중부는 무신란을 일으키며 문관(문신의 모자)를 쓴 자는 서리라도 죽이고 씨를 남기지 말라는 명을 내렸음. 이로 인해 사망한 문신도 있지만, 화를 피해 절 같은 곳에 숨어 지낸 문인도 있었음.

무신란 이후 문학장은 크게 바뀌게 되고, 세 부류의 문인이 관찰됨.

  1. 죽림고회의 문인

: 대부분 문벌 자제. 개경을 근거지로 함.

2. 김극기류의 문인

3. 무신정권에 적극 참여한 문인

: 2, 3번 부류는 주로 지방 향리 출신이거나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신진사류에 해당함.

-> 이들은 체질이나 의식 지향(멘탈리티)에서 차이를 가짐.

죽림고회의 일곱 문인

죽림고회는 죽림의 고상한 모임이라는 뜻. 무신 정권 때의 이인로, 임춘, 오세재,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일곱 문인이 늘 서로 만나 술 마시고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는데 이 모임을 이르는 말. 이들은 중국의 ‘죽림칠현’, ‘강좌칠현’에 견주어 해좌칠현이라고 불렸음. (해좌는 바다 왼쪽으로, 우리나라를 가리킴)

  • 죽림칠현: 중국 위진시대에 죽림에 은거하여 청담을 일삼은 일곱 명의 은자.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진(晉) 초에 노장(老莊)의 사상을 숭배하여 속세를 떠나 죽림에서 혜강(嵇康)과 함께 놀던 완적(阮籍),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을 말한다. 이들은 정치권력을 멀리하고 세상의 압박으로부터 도피하여 술 마시고 시 짓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도덕과 관습을 벗어나 노장 사상을 숭배하고 무위자연을 노래하였다. 이들 중 혜강은 귀공자 종회(鍾會)가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을 때 예를 갖추지 않아, 뒤에 종회의 참소를 받아 사형을 당하였다. 완적은 조정에서 자주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으며 거침없는 행동 때문에 원한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이들 해좌칠현은 무신정권에서 득의하지 못했던 사인(士人)이나 벼슬을 못한 소외된 사인들에 해당함. 그래서 이들은 무리를 이루어 술과 시로 즐기며 지내면서도 자부심과 세상에 대한 불만이 높았기 때문에 방약무인한 태도를 보였음. -> 이들은 자신이 불우하다는 의식이 몹시 강했음.

우리 문학사에서 불우하고 소외된 문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문학 활동을 한 것은 죽림고회가 처음. (조선 후기에는 취향이나 지체가 비슷한 사람이 모여 시회를 갖는 일이 빈번해짐. 죽림고회는 이런 일의 원류라 할 수 있음.)

이인로는 증조부가 평상사를 지낸 귀족 집안 출신. 무신란 때 산으로 피신해 승려 행세를 하다가 세상이 잠잠해진 뒤 속세로 돌아와 명종 때 장원급제를 하고 고종 초에 우간의대부에 올랐음. 정4품 벼슬로, 당세에는 크게 쓰이지 못했으나 죽림고회의 구성원 중에 가장 높은 벼슬을 지냈음.

이인로는 임춘과 더불어 죽림고회의 중심인물이었음. 이인로는 특히 시로 이름이 높았는데, <파한집>이라는 시 비평서를 남기기도 함. 이는 우리 문학사 최초의 시화집. (후대에 이를 본받아 고려 때 최차의 <보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의 시화집이 나옴.) 또한 <은대집>이라는 문집을 남겼으나 현전하지 않음.

임춘은 할아버지가 평장사, 아버지가 상서를 지낸 귀족 집안 출신. 20세 전후에 무신란을 만나 피신해서 겨우 목숨을 건짐. 개경에 5년여 숨어지내다 가족을 이끌고 영남으로 피신해 7년 남짓 떠돌다가 다시 개경으로 올라옴. 평생 벼슬을 하지 못해 불우한 삶을 살다 마흔 무렵 생을 마감함.

임춘은 여기저기 많이 떠돌았고, 이 중에 강원도 강릉 일대의 산수를 유람하고 <동행기>라는 글을 짓기도 함. 이 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산수유기(산수를 유람하고 쓴 글)이라는 점에서 주목됨. 조선 후기에는 유기가 많이 창작되었는데, 임춘의 <동행기>는 그 원류가 되는 글.

임춘의 문집 <서하집>(임춘이 죽은 뒤 이인로가 엮음.)은 현전하고 있는데, 이 문집에는 빈궁이나 현실에 대한 비분, 불만 등을 읊은 시가 여럿 실려있음.

ex) <손에 검을 잡다>(명종 4년,1174. 남쪽을 떠돌 때 쓴 시): ‘갑중의 서늘한 3척 검’을 노래함. 갑중의 검은 뜻을 펴지 못한 불우한 선비를 은유하는 말. 후대의 여러 시인들이 구사하기도 함.

문학사상 ‘시인적 자의식의 뚜렷한 표출’은 신라 말 최치원에 의해 처음 목도됨. 임춘과 최치원의 시는 불우감을 읊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나, 임춘의 시는 ‘궁수(곤궁에 대한 근심과 현실에 대한 비분의 감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최치원과 달라짐. 임춘이 <공방전>이라는 가전을 지은 것도 그가 극도의 곤궁을 겪으며 돈의 폐혜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임.

임춘은 최치원과 달리 지식인으로서, 문인으로서 극도의 생활고를 겪었고, 현실로부터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가 더욱 어둡고 비관적인 색채를 띄게 됨. -> 임춘의 문학은 이 점에서 극도로 소외된 지식인의 내면 풍경을 보여주게 됨. 우리 문학사의 새로운 지평이라 할 수 있음.

오세재는 문신집안 출신으로, 무신정권 때 과거 급제를 했으나 벼슬은 하지 못했음. 이인로가 세 번이나 벼슬에 추천했지만 결국 벼슬을 하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리며 삶.

오세재는 성격이 소탈하고 구속을 싫어하여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였음. 무신정권에서 벼슬을 하지 못했던 것은 이러한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

오세재는 이규보보다 35살이 많았지만 망년우(나이를 초월한 벗)를 맺었음. 이규보는 오세재가 죽자 <오선생 덕전 애사>라는 그를 추모하는 글을 지음. 이 글에서 이규보는 오세재를 ‘복양 선생’이라고 칭하는데, 선생이라는 칭호는 당시 존경하는 사람에게만 붙였던 칭호.

황보항 역시 귀족 집안 출신, 미관 말직만을 했을 뿐 변변한 벼슬을 하지 못함. 함순도 귀족 집안 이었으나 최충헌 집권 당시 말단 관직을 지냈음.

이담지도 귀족 집안. 문헌공도(하급 관직)을 지냈음. 조통도 귀족 집안의 자제로 추정되는데, 운이 좋아 좌간의대부(정4품 관직)까지 지냄. 해좌칠현 중 이인로와 조통만이 어느정도의 벼슬을 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벼슬을 아예 못하거나 미관말직만을 지냈음.

-> 해좌칠현은 대체로 귀족 문신 집안 출신이며, 이 때문에 무신정권에서 벼슬을 지낸 사람이라 해도 불평스러운 마음이 전연 없었다고 하기 어려움. 이들은 무신란 이후 문학장의 한 국면을 잘 보여주는 인물들.

김극기

김극기는 인물이지만, 하나의 ‘부류’이기도 함. 그만큼 당시의 문학 지형도에서 뚜렷하고 중대한 위상을 점함.

김극기의 이름은 이길 극(克) 자기 기(己)로, ‘자기를 극복한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임. 이는 전에 보지 못한 성찰적 지향을 갖는 이름.

김극기는 무신 집권기인 명종 때 급제해 한림 벼슬까지 했으나 벼슬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고, 벼슬을 그만둔 뒤 초야에 살면서 농민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 이를 시에 담았음. 김극기는 지배층의 입장에서 농촌을 목가적으로만 그리지 않았고, 그 속에서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농민들의 실제 삶을 시에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음. -> 이 점에서 김극기는 재야 문인으로서 우리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애민시를 선보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음.

애민시에서 民은 농민이나 어민을 뜻함. 당시는 농민이 백성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음. 기층적 존재로서, 농민이 없이는 지배층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음. 그러나 당시 농민들은 지배층에게 세금을 바치고, 지주에게 지대를 바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음. 지배층의 수탈이 극심했던 것. 무신정권 때 이러한 사정은 더욱 심각해짐. -> 김극기의 애민시는 이러한 배경에서 창작되었음.

김극기는 초야에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사류(士类)였고, 명종 때 잠시 벼슬을 하기도 했으니 신진사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음.

김극기의 애민시에는 지배층의 일원인 ‘나’의 ‘민’에 대한 성찰적 시선이 느껴진다는 것이 주목될만함. (나는 사대부 -> 사대부는 ‘민’으로 인해 먹고 살 수 있음. -> 그럼 나는 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물음이 김극기의 시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것.)

ex) 동문선에 실린 <향촌에서 묵다>

: 시인의 눈에 비친 농민의 모습이 미화되거나 멸시되지 않고 질박한 모습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됨. 시의 뒷부분에서는 시인의 내적 번민을 느낄 수 있는데, 번민을 야기하는 고민이 사대부로서의 고민, 즉 민에 대한 사대부의 책임임.

즉, 사대부로서의 ‘민’에 대한 책임의식이 김극기로 하여금 농촌을 시에 담거나, 애민시를 창작하도록 추동한 것. 이런 인식의 문학적 표출은 이 시기에 와서 처음 나타나게 됨.

김극기는 이규보와 달리 시종 재야의 문인으로서 이러한 애민시를 창작하였음. 이 때문에 지배에 대한 반성적 성찰, 사대부라는 존재에 대한 내적 물음 피지배층 민에 대한 따뜻한 긍정과 연민의 시선 등이 표출될 수 있었음. 이러한 풍경의 표출을 우리 문학사에서 처음 목도되는 것. 그러나 김극기의 애민시는 후대의 이규보 등의 애민시와 비교하면 현실 비판성, 반영적인 면모가 부족하다 할 수 있음. 그러나 김극기에서 시작된 애민시는 후대 우리 문학사에서 주요한 전통이 되게 됨.

김극기는 국토 여기저기를 떠돌며 많은 시를 남겼는데, 무신집권기에 최우의 명으로 문집 <김거사집>을 간행함. 총 135권(150권이라는 설도 있음.)으로 방대한 분량임. 이러한 규모의 문집은 우리 문학사에서 초유의 일이었고, 이를 통해 고려의 한문학이 크게 발전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음.

무신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문인들

무신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정권 유지에 기여한 문인들도 있었음.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 <한림별곡> 제 1연에 나타나있음.

  • 한림: 한림원을 말함. 고려의 한림원은 왕명을 받들어 문장짓는 일을 맡았는데, 이곳에 속한 관원으로는 학사승지 1인, 학사 2인, 시독학사 1인, 시강학사 1인이었음. 한림원 학사는 문재가 있어야 맡을 수 있고, 임금을 가까이서 시종하여 영광스러운 벼슬로 간주됨.

<한림별곡> 제1연

元淳 文(원순 문) 仁老 詩(인로 시) 公老 四六(공로 사륙)

李正言(이정언) 陳翰林(진한림) 雙韻走筆(쌍운주필)

冲基(충기) 對策(대책) 光鈞(광균) 經義(경의) 良鏡(량경) 詩賦(시부)

위 試場(시장)ㅅ 景(경) 긔 엇더니잇고

(葉) 琴學士(금학사)의 玉笋門生(옥순문생) 琴學士(금학사)의 玉笋門生(옥순문생)

위 날 조차 몃부니잇고

-> 원순은 유원순, 인로는 이인로(이인로는 한림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언급되었지만, 거론된 사람들과는 성향이 다름.), 공로는 이공로, 이정언은 이규보, 진한림은 진화, 충기는 유충기, 광균은 민광균, 양경은 김양경, 금학사는 금의를 말함.

유승단은 고종의 사부로, 고문을 아주 잘하기로 유명했음. 참지정사(종2품)까지 올랐음.

이공로는 사륙변려문을 잘 지었으며, 벼슬은 정3품직인 추밀원 우부승선까지 지냄.

이규보는 <고려사>에 집안 선조에 대한 소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지방 향리 출신임. 명종 20년에 급제함.

진화는 조부가 진준(병졸로 시작해 능력을 인정받아 장군이 됨. 무신란 때 문인을 많이 구해줘 그 덕에 목숨을 건진 사람이 많았음.)의 아들. 무신란 이후 과거에 응시해 문인이 됨.

유충기는 대책(과거 응시자가 임금의 질문에 답한 글)을 잘 지은 문인. <고려사>에 집안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지방향리 출신인 것으로 보임.

민광균은 경의(경전의 뜻에 밝았던 문인), 역시 <고려사>에 선조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지방 향리 출신으로 보임.

김양경은 시부에 능했던 문인으로, 나중에 인경으로 개명함. 문벌 귀족 출신이지만 무신정권에 잘 적응하여 형부상서까지 지냈음.

금위는 고위직인 평장사까지 지낸 인물. 지공거를 여러 번 맡아 많은 문생을 배출하기도 함. (그래서 <한림별곡>에 옥순문생이라고 언급된 것,) 문생과 지공거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기 때문에 문생이 많으면 세력이 더 큰 것이었음.

<고려사> 열전 금위전에 따르면 삼한공신 금용식의 후예로 되어 있는데, 그 뒤의 가계는 기술되지 않음. -> 금위의 집안이 금위로 인해 번창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음.

금위는 최충헌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하였던 것으로 보임. <한림별곡>에 언급된 인물 중 가장 벼슬이 높았음.

=> 한림별곡 제1연에 언급된 인물들은 대체로 무신정권에 득의한 인물들이고, 지방 향리 출신이거나 한미한 집안 출신인 것으로 보임. 무신란 이후 문인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새로 기용된 신진사류들이었음.